#048
“저는… 저는 오래 연기를 쉬었습니다. 제 의지였고 이제 와 다른 핑계를 댈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연기가 그립지 않았던 건 아니었습니다.”
유준은 조금 억울했다. 제 일도 아닌데 그건 전부 뻔뻔한 얼굴로 여기에 앉아 있는 한재우의 탓이라고 대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수록 유준은 마치 사영의 감정에 전혀 이입하지 않는 것처럼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물론 그런 알량한 연기로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순 없었다.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고,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운명처럼 서단우를 만났어요. 그때부터 제가 한 생각은 오로지 한 가지입니다. 서단우라는 역을 하고 싶습니다. 잘 해내고 싶어요.”
유준은 이 자리에서 사영이 하는 말이 전부 진실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재우가 이 영화에 출연한다는 걸 한재우 본인보다 먼저 알았던 사람이고, 이 영화를 고른 건 그를 괴롭힐 목적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앞에 선 사영은 한재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연기만 생각하는 배우의 모습 그대로였다.
연기일까. 저것도 전부 복수를 위해, 감독을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일까.
유준은 좀처럼 그 속마음을 단정 지어 판단할 수가 없었다.
사영은 긴 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는 정말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 혹은 소름 돋을 정도로 치밀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그것이 진실이든 연기든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움직이게 만드는 모습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영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끝끝내 울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활동을 쉬었던 탓에 연기가 부족할 수도 있을 거고, 어쩌면 제가 살아온 날들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살아온 날들이 문제가 되어야 하는 건 한재우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용하고, 괴롭히고, 조롱하고, 끝끝내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사람은 당당하게 이 자리에 앉아 있는데 오로지 윤사영만이 저 자리에 서서 인생을 평가받고 있다는 건 부당했다.
사영의 입장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유준은 제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렇게 소리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도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하면 남은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연기를 다시 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감수했던 일이고, 떨어지더라도 도전은 하고 싶었습니다.”
“…….”
사영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재우는 다소 고통스러운 듯한 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아도 예상치 못하게 맞닥뜨린 상황에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랄한다, 진짜.
유준은 그렇게 쏘아 주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내리누르며 오히려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살짝 짚고 속삭였다.
“한재우 씨, 괜찮습니까?”
사실 유준은 사영이나 재우에게 연기력이니 뭐니 할 군번이 아니었다. 지금의 김유준이야말로 정말 소름 끼치는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속으로는 온갖 혐오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주제에 유준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재우가 척 보기에도 더없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준을 돌아보았다. 유준은 이 상황이 정말로 어리둥절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오로지 재우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재우 씨도 모르고 있었어요?”
“네….”
“아… 좀 너무하네.”
“저는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유준 씨.”
그렇게 말하며 유준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한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재우는 가련한 척을 하며 힘없이 웃었다.
정작 사영은 심판대에 서서 날 선 평가를 받고 있는데, 여기서 둘이 이러고 있다는 게 우스워도 유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영이 서단우를 맡기 위해 저렇게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데 아무리 최선을 다할 생각 따위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는 해 줘야 꿈자리가 사납지 않을 것 같았다. 유준의 핑계였다.
“한재우 씨랑 같이 연기를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죠?”
그때, 감독이 사영을 향해 다시 물었다. 재우의 어깨가 덩달아 움찔했다. 이 모든 게 어찌 보면 거대한 코미디극 같았으나 사영이 겪어 온 일들은 유준이 그저 방관자처럼 마음 편하게 그들을 비웃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네. 저는 배우로서 다른 분들이 그러하듯 최선의 연기를 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잘 들었습니다. 또 질문하실 분 있나요?”
감독은 그제야 말을 마무리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하지만 이미 감독이 가장 노골적이고 예민한 질문을 전부 해 버렸는데 이제 와 누가 더 질문을 덧붙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음, 없는 것 같군요. 이만 나가 봐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감독이 다시 사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영은 처음 섰을 때 그랬던 것처럼 예의 바른 태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재우 씨.”
“네?”
정 감독이 재우를 부른 건 그 순간이었다. 매사 여유가 넘치는 태도를 고수하던 재우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재우에게 감독이 온화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내가 윤사영 씨를 캐스팅한다면… 한재우 씨는 어떨 것 같습니까?”
“아, 저는….”
유준은 웃음을 참았다. 외통수였다. 사영이 오로지 연기 하나만을 열심히 하고 싶다고 대답한 마당에 한재우가 여기서 쟤랑 절대로 같이 일하지 못한다는 뉘앙스로 대답하면 이건 백 퍼센트 한재우가 지는 게임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감독이 정한 걸 막을 수 있다면야 감수할 만한 손해였지만 솔직히 정 감독 성격상 배우 하나가 싫어한다고 자신의 결정을 번복할 것 같진 않았다.
그걸 아는 이상, 재우가 선택할 수 있는 답변은 하나뿐이었다.
“캐스팅에는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이 결정하실 일이고 저는 그저 열심히 연기할 뿐이죠.”
“…음, 아주 좋네요. 고마워요.”
애초에 그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놓고, 정 감독은 능구렁이처럼 사람 좋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가 정말로 재우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고 싶었다면 이렇게 모두가 다 보고 듣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물을 게 아니라 재우를 따로 불렀을 것이다.
“유준 씨는 어떤가요?”
감독이 이번에는 유준에게 물었다.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재우가 괜찮다고 한 마당에 여기서 유준이 나는 그런 거 너무 불편해서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자기 정신력이 그들보다 연약하다고 광고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았다.
감독의 질문이 제게도 올 거라 예상하였던 유준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그런 거에 신경 쓰느라 연기 못할 정도는 아니라서요, 제가.”
감독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작가와 다른 스태프들도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깨질 것처럼 얼어 있던 분위기가 유준의 답으로 인해 그제야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말들을 해 주니까 고맙구먼.”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댔으면서 정 감독은 사람 좋은 노인네 같은 말투로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더 여우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유준은 긴장해서 굳어져 있던 어깨를 슬쩍 이완시키곤 사영이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사영이 서단우 역을 따내겠다고 했을 때 유준은 그 계획에 무척이나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감독이 그를 캐스팅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끌어낸 것만 해도 대단한 수완이었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명백하게 심장이 점점 박동을 빨리했다. 사영의 서단우가 손에 잡힐 듯이 그려졌다.
유준은 처음으로 그의 복수가 아닌 그와 함께할 연기가 조금, 아주 조금 기대되기 시작했다.
***
“후….”
사영은 복도로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게 눈으로도 다 보일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 안에서는 똑바로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웠다.
아무리 미리 상황을 알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도 한재우와 마주치는 일은 전혀, 조금도 수월하지 않았다.
결정은 사영이 내린 것이지만 죽기 전 사영이 연기를 포기하도록 교묘하게 그를 몰아간 건 한재우였다.
네가 연기를 계속하면 나는 영영 네 뒤에서 부당한 대우와 평가를 받게 될 거고, 나는 불행해질 거라는 한재우의 직간접적 표현에 사영은 자꾸만 복귀를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복귀해선 안 된다고, 그러면 버림받을 거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억눌렀다.
종국에는 아무도 나의 복귀를 바라지 않으며, 내가 연기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이 인기 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진 채로, 이렇게 좋은 작품에 캐스팅되어, 사영을 평가하겠답시고 눈앞에 앉아 있었다. 버겁지 않았을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
사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모아 그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연신 숨을 골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영은 다만 나약해 빠진 자신을 빨리 진정시키고 싶었다.
감정은 둘째 문제였다. 감정보다도 더 큰 문제는 재우를 마주하고 있으면 신체가 먼저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지난번 재우를 마주쳤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얼굴을 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몸이 떨렸다. 육체에 각인된 공포가 발동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그런 상황에서 연기를 하고 감독의 질문에 태연하게 대답까지 한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죽음이라는 경험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일이다.
우습게도, 그런 상황에서 사영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건 재우의 바로 옆에서 뚫어져라 자신을 보고 있던 유준의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