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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47화 (47/193)

#047

“안녕하세요, 윤사영입니다.”

사영이 입을 열어 인사를 하고 난 후에야 공간을 차갑게 얼렸던 적막이 깨졌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사영은 정 감독을 시작으로 제 앞에 앉은 이들과 짧게 한 번씩 시선을 마주쳤다.

유준은 그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 한재우에게로 향할 때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영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하듯 무감한 눈동자로 남들에게 그랬던 만큼 재우에게도 짧게 시선을 두었다가 거뒀다.

한재우는 들고 있던 펜을 꽉 쥐었다. 등 뒤에서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무리 유준이 미리 언질을 줬다고 해도 솔직히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력을 되찾을 만큼 충분한 시간은 결코 아니었는데, 사영은 마치 처음부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준비한 사람처럼 보였다.

전기가 통하듯 손끝이 짜릿해 유준은 연신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우선… 연기부터 보겠습니다.”

감독의 옆에 앉아 있던 작가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사영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진짜로 마음까지 평온한 건 아니었다.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이다. 죽음의 고통을 겪고 나서야 감히 바랄 수 있었던 자리였다.

단순히 복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죽기 전의 삶에서 사영은 서단우를 보며 자신이 포기해 버린, 영영 도전할 기회조차 놓쳐 버린 길을 실감하며 더더욱 큰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다른 모든 삶의 의지를 잃고 한재우에게 더 극단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그토록 사랑하는 연기도 포기했는데, 오직 한 사람 때문에 저 빛나는 세계를 스스로 닫아 버렸는데 사랑까지 얻어 내지 못하면 제 삶은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다는 강박 때문에 사영은 더 한재우의 애정에 집착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사영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 서단우의 앞에 서서, 제 손으로 잠가 버렸던 문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여긴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멍청하고 한심하게 빼앗겨 버린 연기에 대한 갈망이 그 안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영은 그제야, 어쩌면 자신이 오히려 한재우를 핑계로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서단우 역을 정말로 하고 싶어서. 다시 이 자리로 나설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아 복수라는 명분으로 제 등을 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든 이 역을 따내는 건 재우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이는 일이 될 테니 이유 따윈 상관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고 눈을 뜬 사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세자 저하를 배신하면, 대군께서는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리고 거기엔 서단우가 있었다.

***

사람은 살면서 본능적으로 어딘가,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강렬한 예감을 받을 때가 있다. 유준의 경우 바로 지금이 그랬다.

사영이 앞에서 서단우의 대사를 읊으며, 완전히 서단우 자체가 되어 버린 이 순간 유준은 제 인생이 어딘가가, 무언가가 정말로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얻었다.

사영의, 아니 서단우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딱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 장면은 서단우라는 캐릭터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서단우의 눈물은 오랫동안 모시던 주군을 어쩔 수 없이 배신해야 하는 자의 서러움이었지만 동시에 주군을 위해 기꺼이 첩자가 된 이가 상대를 속이기 위해 하는 능숙한 연기이기도 했다.

의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면서. 서단우가 강무준을 쉽게 배신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강무성이 결국 서단우를 받아들인 건 바로 저 가련한 눈물 때문이었다.

그가 내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을 테니까. 그의 진정한 주군이 되어 그의 손을 잡고 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컸을 테니까.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토록 얻고 싶었던 그의 마음까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열망이 모든 의심을 잡아먹고 태워 버릴 정도로 강렬했을 테니까. 서단우는 강무준에게 그렇듯, 강무성에게도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렇기에 서단우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중요한 역할이었다.

일국의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두 사내가 어찌하여 일개 사내 하나에 휘둘리고 매달리는지, 그 개연성을 서단우는 오로지 자신의 매력으로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사영은 어째서 자신이 서단우일 수밖에 없는지, 서단우를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정 감독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유준의 귀에는 그 소리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한재우의 반응을 살피는 일조차 완전히 잊어버렸다.

마치 이곳에 윤사영과 자신, 단둘뿐인 것처럼 유준은 끝도 없이 그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혼자 막연히 상상하던 사영의 연기와는 달랐다. 오래전 찍었던 작품에서 보던 것과도 같지 않았다.

삶이 녹아들어서일까. 타인은 겪지 못한 경험을 겪어서일까. 오랫동안 연기를 쉬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유준은 이것이 비단 자신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상입니다.”

지정 연기와 자유 연기가 모두 끝난 뒤 잠시 여운을 고르던 사영이 끝났음을 알리듯 인사를 하자 잔뜩 응축되어 있던 공기가 일순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여기저기에서 후우, 하고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유준도 마찬가지로 아주 먼 거리를 달려온 사람처럼 숨을 깊이 내쉬며 꽉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손가락이 다 욱신거렸다.

사영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깝든 말든 작품에 연기로 민폐를 끼친다면 그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돕기로 마음을 먹은 건 사실이지만 기대했던 작품을 걸고서라도 돕고 싶을 만큼 간절한 마음은 절대로 아니었다.

사영에게 미리 경고했듯, 그가 이 작품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유준은 절대로 그의 뒷배가 되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사영의 연기를 본 지금, 유준은 오히려 다른 쪽으로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사영이 가진 다른 불리한 조건들 때문에 그가 결국 서단우 역을 맡지 못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에 대한 개인적인 모든 감정을 제외하고 보아도 작품을 위해서는 윤사영을 잡는 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한재우와 윤사영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한재우를 버리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피해자이기까지 한 사영이 한재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밀려난다면 유준은 절대로 그 꼴을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준이 그런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지경이 되었을 때쯤, 정 감독이 사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윤사영 씨.”

유준은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나 정작 앞에 선 사영은 지극히 담담한 얼굴로 ‘네.’ 하고 감독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했다.

그는 마치 모멸과 치욕을 전부 감수하고 선 포로처럼 보였고, 그마저도 서단우 같았다.

감독이 물었다.

“한재우 배우가 강무성 역을 맡았다는 거, 알고 있었나요?”

말투는 제법 부드럽고 정중했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구도 직접 대놓고 물을 생각은 못했던 질문에 작가를 비롯해 안에 있던 이들 대다수가 크게 당황해 웅성거렸다.

당연히 그들 중 가장 크게 당황한 한재우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감독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질문을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요란한 반응들 속에서도 감독은 조용히 사영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유준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사영에게로 향했다.

그 역시 노골적인 질문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눈을 느리게 두어 번 깜빡거리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곧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원할 때는 몰랐고, 그 이후 기사로 공개됐을 때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여기에 왔네요. 사생활을 터치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만약 캐스팅이 된다면 같이 일하는 데 불편함이 있지 않겠어요?”

만약 캐스팅이 된다면. 사영은 직접적인 질문보다 오히려 그 가정에 더 놀랐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영이 오디션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이들은 대부분 사영이 캐스팅될 거란 가능성을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오랜 공백을 겪은 그가 오디션의 부담감까지 이겨 내고 제대로 연기를 해낼 리가 없다고 여긴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감독이 그를 절대로 캐스팅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한재우가 이미 캐스팅되어 있는 상황에서 굳이 사영을 캐스팅할 위험을 질 필요가 없었다.

정명철은 노이즈 마케팅을 할 필요가 없는 감독이었고, 실제로 그런 방법을 싫어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영은 오랫동안 연기를 쉬었다. 그런 사람이 모두를 압도할 만한 연기력을 보여 주기는 힘들게 분명했다.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연기 정도로는 택도 없었다. 그러니 아마도 윤사영에게는 가능성이 없을 거라고 짐작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리 가정이라고 해도 감독이 긍정적인 뉘앙스를 보인 건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정 감독의 말은 꼭 내가 너를 캐스팅하고 싶은데, 연기 외적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모두의 시선이 사영에게 집중됐다. 유준은 무슨 대단한 발표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그 대답 하나에 이렇게까지 집중하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사영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매한가지였으므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윽고 사영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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