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46화 (46/193)

#046

대신 이 바닥에는 감독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극적인 기사를 뽑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이 많았다.

오늘 오디션이 끝나고 나면 감독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윤사영의 오디션 참여에 대한 소식으로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유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처음엔 당연히 좋은 말을 찾아보기 힘들 테지만 그 분위기를 사영이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보는 재미도 쏠쏠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준은 제 왼쪽에 앉은 재우를 슬쩍 돌아보았다. 유준에게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던 건지 재우가 금세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춰 오며 싱긋 웃었다.

눈치로 보아 재우는 사영이 여기에 와 있다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미 변수를 알고 있는 사영이 유리했다.

과연 한재우는 사영을 마주치는 그 순간, 얼마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걸 상상하니 괜히 마음이 들떠서, 유준은 기꺼이 재우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

재우는 사실 한참 전부터 이 오디션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고, 남들 앞에서 자신을 꾸며 내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집중해서 신중하게 참가자들의 연기를 보는 척을 제법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온통 딴생각뿐이었다.

적절한 이유를 대자면 오디션은 너무 지루했다. 도무지 볼만한 사람이 없었다.

감독은 아마도 신선한 마스크와 조금 서툴러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배우를 원했을 텐데 오디션이 중반을 넘어서 후반에 다다라가는 지금까지도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다.

볼만한 사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워낙에 좋은 배역이었기에 신인뿐만 아니라 흔히들 말하는 실력파 배우들도 대거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분명 서단우 역에 제법 어울리는 배우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고작 ‘제법 어울리는’ 정도의 배우를 뽑을 거면 뭐 하러 이 난리를 피워 가며 시간과 돈을 낭비해 오디션을 열겠느냔 말이다.

그럴 거면 그냥 개인적으로 시나리오를 보내 캐스팅하는 게 모든 면에서 이득이었을 것이다.

‘가관이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하는 배우를 보며 재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배우는 서단우 캐릭터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극히 일부분의 대본만을 받았다고 하는 건 핑계가 되지 못했다. 하다못해 캐릭터 설명 몇 줄만 읽었어도 알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서단우는 마주치면 절로 보호 본능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여리고 처연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캐릭터 설명에도 나와 있듯, 그 안에는 누구보다 강인하고 불같은 영혼이 있는 캐릭터였다.

그는 목숨을 위협받는 세자와 호시탐탐 세자의 자리를 노리는 대군 사이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충절을 지키는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서단우를 연기하는 대다수 참가자는 그의 기개보다는 처연함을 나타내는 데 더 힘을 주기로 한 모양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쉽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게 단시간에 훨씬 더 매력적인 포인트를 보여 줄 수 있어서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매번 비슷한 결의 연기를 보자니 질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디션 진행 중에 유준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미리 거리를 좁힐 계획이었지만 아까 느낀 미묘한 불편함 때문인지 그도 영 흥이 나지 않았다.

다음 참가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재우는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참가자들의 서류를 뒤적였다. 그가 모든 동작을 멈추고 숨까지 참으며 눈을 크게 뜬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윤사영.

한재우의 눈에 그 이름 하나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

유준은 옆에서 한재우가 온몸으로 초조함을 내뿜는 걸 꽤나 즐겁게 만끽했다. 그가 사영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건 굳이 고개를 돌려 옆을 보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재우는 좀처럼 오디션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닌 척을 하고 있지만 바로 옆에서 그에게 신경 쓰고 있는 유준은 그의 변화를 제법 세밀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재우가 보인 반응은 이전과는 달리 격렬하고 적나라했다.

유준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런 재우의 변화를 눈치챘으리라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한재우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는 건 비단 유준만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영이 유준을 구한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은 이 기묘한 삼자대면을 흥미롭게 지켜볼 테고, 재우와 사영의 결혼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재우의 반응을 안타까워하며 사영의 뻔뻔함을 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진짜로 오디션을 보고 있는 건 자신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난장판 삼자대면에서 과연 누가 더 태연해하고 누가 더 무너질지. 누가 더 못난 모습을 보이고 누가 더 동요할지.

심사위원의 눈을 한 이들은 저마다의 관전 포인트를 가지고 지엄한 판단을 내리는 중일 것이다.

“다음이 드디어 윤사영 씨네요.”

그 순간, 유준에게 조용하고 은근하게 말을 걸어 온 건 정 감독이었다.

유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감독을 돌아보았다. 감독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유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준이 ‘예?’하고 되묻자 감독이 다시 말했다.

“연기를 다시 시작하려고 준비 중인지는 몰랐는데 말이죠.”

“아, 윤사영 씨요. 네. 저도 놀랐습니다.”

“오래전에 그 친구 연기를 참 좋게 본 적이 있었어요. 언젠가 내 작품에 한번 담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지요.”

감독은 마치 그를 둘러싼 모든 추문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람처럼 넉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의 위치가 되면 배우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자신의 아래로 보고 막 대하려 드는 경우도 많은데 정 감독은 드물게 정중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유준은 마찬가지로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셨군요. 저도 윤사영 씨 작품은 몇 개 본 적이 있어요.”

“참 괜찮게 연기하지요?”

“네. 솔직히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었는데도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사영에게 나는 캐스팅에 관해서는 티끌만큼의 도움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게 무색하게, 유준은 제법 호의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어차피 사영이 오디션을 망치면 이런 립서비스는 정 감독 정도 되는 인사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거기다 옆에서 감독과 자신의 대화에 온 신경이 쏠려 있는 한재우 꼴이 볼만해 괜히 더 좋은 말이 나왔다.

“다음 참가자입니다.”

짧은 정리가 끝나고, 어딘지 모르게 조금 더 들뜨고 긴장한 것 같은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우는 깊은숨을 몰아쉬었고, 유준은 자세를 바로 했으며,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린 감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 지금은 어떤지 봅시다.”

그제야 유준은 정 감독이 왜 사영이 오디션을 보러 오는 걸 굳이 거르지 않았는지, 왜 그들의 관계를 알면서도 한재우가 이 자리에 오는 것을 막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한재우에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는지에 대한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정 감독은 사영이 예전의 연기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리는 서단우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 줄 배우가 될 수도 있다고 기대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므로 이 오디션은 단순히 연기력만을 보기 위한 오디션이 아니었다.

한재우가 있어도. 둘 사이에 복잡한 과거가 있어도.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들이 주시해도.

그래도 사영이 진짜로 해낼 각오가 되어 있는지, 감독은 그걸 전부 확인하고 싶었던 거다. 그 많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사영에게 서단우를 정말로 맡겨도 되는지를 말이다.

유준은 등을 곧게 펴고 숨을 골랐다. 재우가 느끼는 초조함과는 다른 긴장감이 유준의 혈관을 타고 손끝까지 뻗어갔다.

감독과 마찬가지로 유준은, 사영이 정말 이 복수를 끝까지 해낼 수 있는 각오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바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

사영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 어디선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사위는 고요했다. 그간 다른 참가자들이 들어왔을 땐 카메라 체크다 뭐다 분주하게 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결혼과 거의 동시에 연예계를 떠난 사영의 공백기는 자그마치 5년이었다. 요즘처럼 모든 게 급변하는 흐름 속에서 5년의 공백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게 아름다웠던 이가 술에 찌든 방탕한 생활로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이 되거나, 바르고 성실한 이미지였던 가수가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의 오디션 참가 소식이 스태프들 사이에 퍼지고 난 후 각자의 머릿속에는 저마다의 윤사영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을 테지만 아마 많은 이들은 소문처럼 망가진 모습을 기대했을 테다.

유준은 아마도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재우가 만들어 낸 표독스럽고, 질투와 시기심에 찌들었으며, 열등감을 이겨 내지 못하고 끝끝내 이혼까지 당한 사영의 모습을 상상했을 거라는 데에 큰돈을 걸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지금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은 분명 충격일 테지.

유준은 제법 느긋한 태도로 앉아 창백한 얼굴과 단정한 걸음으로 무대 위에 올라서는 사영과 그를 보는 주변의 반응을 감상했다.

사영은 분명히 변했다. 그는 더 이상 20대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랜 시련에 지쳤고, 다소 망가졌으며, 그로 인해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놀랍게도 사영을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속으로 짜증이 날지언정 유준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영은 싱그럽고 사랑스러운 대신 애처로웠다. 햇살처럼 따사롭진 않아도 겨울밤의 달빛처럼 아름다웠다.

온실 속 화초처럼 건강하진 않았으나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한,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같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삶의 슬픔이 있었고, 눈매에는 애틋한 서러움이 맺혀 있다.

그 순간 아주 분하게도 유준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하지>의 서단우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앞서 나온 그 누구도 저 사람보다 서단우를 잘 표현할 수는 없다.

아직 연기를 보지도 않았건만 유준은 제 안에서 격렬하게 피어오르는 예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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