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아, 안녕하세요….”
사영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자 도율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사영의 머릿속에 차근차근 도율에 대한 정보들이 떠올랐다.
20대 초반의 어린 신인 배우로 귀여운 조연 역을 많이 맡았던 게 기억났다. 그는 기대와 설렘이 적절히 섞인 얼굴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혹시… 저 누군지 아세요?”
“…….”
“이런 질문 죄송해요. 예의 없는 질문이라는 건 아는데 혹시 절 아실까 너무… 궁금해서….”
사영은 그의 질문이 다소 혼란스러웠다.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아는 척을 해 오는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무엇보다 이 상황이 너무 낯설었다. 사영은 죽기 2년 정도 전부터는 극도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다.
도율은 사영의 머뭇거림을 부정으로 해석한 건지 금세 눈꼬리를 추욱 내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제가 괜한 걸 물었어요. 그, 제가 사실은….”
사영은 당황한 와중에도 그가 자책하는 걸 막고자 서둘러 대답했다.
“당연히 알죠. 도율 씨.”
“아….”
“드라마 잘 봤어요.”
빈말은 아니었다. 조연이긴 했어도 어린 나이에도 꽤 능숙한 연기를 하는 친구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분명히 났다.
그 순간 도율의 얼굴이 화라락 붉어졌다. 그 변화가 얼마나 선명하게 눈에 보이던지 사영이 당황했을 정도였다. 도율 역시 자신의 급격한 변화를 눈치챘는지 허둥지둥거리며 말을 뱉었다.
“아, 죄, 죄송해요. 그게 아니라 제가… 그, 제가….”
“……?”
“사실은 제가 윤사영 배우님 팬이라서… 지금 너무 떨려서….”
사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율이 분명 팬이라고 한 걸 듣긴 들었는데 그 단어가 왜 제 이름 옆에 붙어 나온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영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아… 이런 말 하기 적절한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아… 아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사영 선배님 연기를 보고… 반해서… 연기자가 되고 싶어서… 죄송해요. 제가 너무 횡설수설하죠.”
도율은 이제 아예 식은땀을 흘려 댈 기세였다. 어린아이가 끙끙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달래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다만 사영 역시 지금 적잖이 당황한 상태라 쉽사리 말이나 행동이 나가질 않았다.
사영은 어린 나이에 데뷔한 축에 속했다. 도율의 정확한 나이는 몰라도 20살을 넘긴 지 그다지 오래되진 않은 것 같으니 충분히 그럴 만한 나이이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쟁쟁한 배우들을 놔두고 어째서 나였나,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영의 침묵에 당장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은 어린 친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사영은 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긴장을 떨쳐 내려 애썼다. 그리곤 도율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도율 씨. 팬이라니… 제게는 과분한 칭찬이네요.”
“불편하셨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게 오랜만이라 조금 놀라서 그랬어요.”
사영은 제 감정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제 처지를 감추는 건 의미가 없었다.
사영이 대답해 주자 그래야 조금 숨통이 트인 얼굴을 한 도율이 쭈뼛거리면서도 꿋꿋하게 할 말을 이어 갔다.
“누가 뭐래도 저는 선배님이… 다시 연기 시작하시는 거 너무 좋아요. 저 정말 대기실에서 선배님 봤을 때 너무 좋아서 소리 지를 뻔했거든요. 다시 연기하시는 거 볼 수 있길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요.”
“…….”
“그리고 아마 저 같은 사람 아직도 많을 거예요. 아니, 많아요. 정말이에요.”
사영은 제게도 팬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한때는 아이돌 팬덤 부럽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팬들을 가졌으나 지금까지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사영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그래서 남편의 애정조차 얻어 내지 못하는 자신의 틀에 갇혀 살았다. 죽는 순간까지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누군가가 제 팬을 자처하다니. 사영에게는 그것이 죽었다 살아난 것보다도 훨씬 생경한 충격으로 느껴졌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제게는… 큰 의미가 되는 말이에요.”
이런 짧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는데 도무지 그걸 다 꺼내 놓을 수가 없어 사영은 서툴게 그 한마디를 뱉어 냈다. 무심한 대답이라고 여기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도율은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양 황홀한 얼굴을 했다.
“저, 그럼 이제 방해 그만할게요! 혹시… 혹시라도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저 찾아 주세요!”
“…네, 그럴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영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도율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돌렸다. 여기가 오디션 자리만 아니었어도 조금 더 들이대서 어떻게 번호라도 따 보는 건데 아쉬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제 본격적으로 연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으니 앞으로도 기회가 있겠지? 도율은 부지런히 희망적인 생각들을 떠올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도율에게 몇몇 시선이 따라붙었다. 선수를 빼앗긴 데에서 오는 명백한 부러움이었다. 사영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영은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기운을 눈치채는 데는 도가 텄지만, 반대로 호감을 알아채는 쪽으론 전혀 감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또한 한재우가 망가트린 부분이었다.
사영은 저만치 떨어진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서도 사영과 눈을 마주치자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이는 도율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여 손에 쥔 오디션용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모 사항이 빼곡하게 적힌 대본을 보자 그제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실감이 났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수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서고 연기를 할 공간에 한재우가 있을 거라는 사실이 다시금 날카로운 현실 감각이 되어 손끝을 찔러 왔다.
그는 자신이 이 오디션에 참가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알고 일부러 온 것일까.
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랬을 리가 없다. 만약 알았다면 지난번 만났을 때 분명히 오디션 참여를 막으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유준과 함께 만들어 갈 영화에 혹시라도 사영이 침범할 수 있는 위험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었다. 그날 이후에라도 알았다면 뭔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대응이 없는 걸 보면 재우는 사영이 여기에 와 있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긴장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갑작스러운 마주침이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한재우가 있다는 걸 미리 알게 된 이상 유난스럽게 동요할 필욘 없었다.
어차피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재우의 앞에서 연기를 해야 했다. 미리 체험하는 셈 치면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러자 사영은 오히려 곧 자신을 마주할 한재우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그는 일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미였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유준과 함께하는 작품에, 다른 사람도 아닌 윤사영 따위가 끼어들다니.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한재우가 얼마나 당황하고 분노할지를 떠올리자 긴장이 덜해진 것으로도 모자라 슬슬 기대되기까지 했다. 이왕이면 자신이 그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모른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죽기 전에는 재우의 앞에 서면 혹시나 그의 심경을 거스를까 벌벌 떨며 주눅 들기 바빴다.
몸이 기억한다는 건 생각보다 지독한 굴레라서, 솔직히 사영은 정말로 그의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지금처럼 통쾌한 기분으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대감 아래로 미미한 두려움이 동시에 일었다. 한재우를 향한 감정이라기보단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과연 준비가 되었을까, 나는. 정말로 한재우에게 복수할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죽기 전 모든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왔던 자신이 과연, 죽음을 한 번 겪었다고 해서 제대로 일을 해 나갈 수 있을까.
불안이 밀려오자 사영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밤의 아스팔트를 떠올렸다. 몸을 얼려 오던 차가운 기운과 바닥을 적시던 붉은 피. 반짝거리던 흰 눈. 자신을 경멸하던 한재우의 목소리와 끝없는 후회들.
사영이 그렇게 살을 저미는 듯했던 고통을 곱씹고 또 곱씹는 사이, 멀리서 오디션의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영은 눈을 떴다. 결과를 확신할 순 없다. 하나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끝나는 삶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준비가 됐든 안 됐든, 자격이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사영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한재우에게 고통을 안겨 줄 거고 이 오디션은 마침내 맞이한, 제대로 된 첫걸음이 될 거였다.
***
“오디션 시작하겠습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부산스러운 공간이 일순 조용해졌다. 앞에는 무대처럼 얕게 올려진 단이 있었고 그 맞은편 중앙에는 정명철 감독이, 그 오른쪽으로는 관계자가, 왼쪽으로 유준과 재우가 순서대로 앉아 있었다.
유준은 참가자들의 서류를 뒤적이는 정 감독을 흘끔 바라보았다. 사영이 오디션에 참가한 걸 알면서도 재우가 오는 걸 막지 않은 저의가 궁금했다.
물론 감독은 그냥 별 뜻이 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정 감독은 배우의 부차적인 배경보단 연기력을 가장 중히 여기는 감독으로도 유명했다.
어차피 사영이 노릴 수 있는 건 일단 어떤 이슈든 끌어와 작품 홍보에 쓰려고 하는 타입인 감독과 배우의 뒷이야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인 감독, 단둘뿐이었다.
정 감독은 후자에 속했고, 아마 사영도 그런 감독의 성향을 알았으니 이런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