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44화 (44/193)

#044

사영은 침묵했다. 유준은 그 침묵에서 어렵지 않게 사영의 동요를 느낄 수 있었다. 떨리는 숨결의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이 정말로 사영의 숨인지, 아니면 유준이 자신의 감정을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맞닥뜨리면 당황할까 봐 미리 알려 주는 겁니다. 준비하라고.”

사영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유준은 초조함을 느꼈다. 손등에 즐비한 흉터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 …감사합니다.

사영은 한참 만에 그렇게만 대답했다. 유준은 지나치게 순종적인 탓에 오히려 성의 없어 보이는 그의 단답을 싫어했지만, 지금만큼은 차마 그것을 탓할 수가 없었다.

아니, 씨발 그게 뭔 개소리에요? 하고 되묻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물론 유준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쪽이 마음이 편했겠지만.

너머의 사영이 말을 이었다.

- 알려 주시지 않았으면 정말… 정말로 당황했을 거예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래요. 그럼 잘해 봐요.”

- 네. 들어가세요.

더 그럴듯한 응원 같은 걸 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준은 그냥 그렇게 통화를 종료했다.

유준은 어디까지나 그가 어떤 연기를 하나 궁금해서 구경하러 온 거지 그를 응원하거나 그의 편이 되어 주려고 온 건 아니었다.

한재우가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전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라 유준은 통화를 끝낸 뒤에도 바로 오디션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거기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이 어쩜 이렇게 교묘하게 돌아가나 싶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런 상황을 의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유준은 손안에서 휴대폰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여기까지 일이 진행된 것 자체가 좀 이상했다.

사영이 오디션에 지원한 사실을 스태프들은 알았을 것이다. 한재우가 캐스팅된 이상 여기에 윤사영이 합류하는 건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감독에게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유준이야 최근에 사영이 유준 대신 다친 일을 빼면 딱히 이전에는 얽힌 일이 없어 오디션을 보든 말든 신경 쓸 게 없겠지만 한재우는 사정이 달랐다.

두 사람의 지독한 이야기는 연예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혼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다.

제작진이 불필요한 소란을 줄이고 싶었다면 얼마든지 재우를 이 자리에 오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한재우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고 사영은 이제 그가 보는 앞에서 연기를 해야만 했다.

사영이 연기를 그만두게 만든 장본인의 앞에서 말이다.

아무리 사영이 자처한 일이고 그의 포부대로 정말 캐스팅이 된다면 어차피 수도 없이 겪어야 하는 상황이라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마주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유준의 입술 사이로 옅은 숨이 흘러나왔다. 사영이 지금 어떤 심정으로, 어떻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을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 덕분에 준비할 시간이라도 벌었으니 다행이지, 하고 우쭐한 척을 해 보아도 그 이면에서 유준은, 분명 사영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것도 못 이겨 내면 어차피 복수할 능력도 안 되는 거겠지.”

제 불안을 떨쳐 내려는 것처럼 유준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말 그대로 이 정도도 이겨 내지 못하는 사람의 계획엔 동참할 가치가 없었다.

***

유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재우는 조금 전 유준과 악수를 나누었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재우는 오늘 유준이 이 자리에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을 때 은성에게 스케줄을 알려 주며 일정을 조율하던 스태프가 김유준 배우도 참관하기로 되어 있다고 말을 해 준 것이다.

유준이 오디션을 참관한다는 소식 역시 홍보의 일환으로 깜짝 공개하기 위해 미리 외부에 알리진 않았지만 이미 캐스팅이 완료된 재우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스태프는 다만 이 소식이 홍보 기사가 뜨기 전 밖으로 새어나가지만 않게 해달라 당부했다.

그래서 재우는 오늘을 무척 기대했다. 안 그래도 유준을 직접 만나고 싶어 애가 타는 마당에 조금 더 빠르게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이날을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이 벌어진 지금, 재우의 표정은 생각만큼 기쁘거나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표정 관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한재우는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상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감정이었다.

처음 그를 마주하며 인사를 나누었을 때는 좋았다. 재우는 더 이상 유부남이 아니었고 표면적으로는 이혼마저 전부 윤사영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마침내. 드디어. 그 모든 방해 공작들을 뛰어넘어 당당하게 제 감정을 어필할 수 있는 위치가 되어 그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재우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공들여 이 자리에 섰고 바라던 만남을 가졌는데. 그랬는데, 왜. 재우는 지금 이렇게 불쾌한 감정을 곱씹고 있는 걸까.

“저, 배우님. 뭐 불편한 거 있으세요?”

갑자기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재우가 재빨리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스태프 한 명이 조심스러운 얼굴을 한 채 옆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표정에서 너무 티가 났던 모양이다.

재우는 자연스럽게 표정을 관리하고는 그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아…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셔서 걱정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오디션은 약 15분 정도 후에 시작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흠잡을 데 없는 대처에 스태프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그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에도 재우는 표정이 제 통제를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 쓰며 유준이 나간 문 쪽을 쳐다보았다. 저만치에서 유준을 찾는 이들의 분주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병원에서 사영을 만났던 날 그를 부축하던 김유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조심스럽던 손길과 사영을 기다리겠다고 말하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말이다.

유준은 사영이 일부러 재우의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자신이 느낀 불쾌함은 그 때문일 거라고. 사영이 그런 식으로 유준을 이용하고 있는 게 생각난 것뿐이라고. 재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정의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유준과 자신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거고 사영이 거기서 더 선을 넘는다면 자신이 진실을 알려 줄 수 있을 만큼 그와 가까워지면 그만이었다.

***

유준과 통화를 마친 사영은 화장실에 들러 괜히 손을 씻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자신을 차분히 진정시킨 뒤 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사영의 오디션 순서는 거의 마지막 즈음이었으나 그렇다고 자리를 이탈해 있을 순 없었다.

배우들은 번호순대로 여러 개의 대기실에 나뉘어 배정되었다. 그러나 워낙에 참가자가 많은 탓에 한 공간에는 꽤 많은 배우들이 함께였다.

대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사영은 은근히 제게 붙어 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위축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 시선 자체가 두렵다기보다는 그 눈빛들이 죽기 직전의 삶을 떠오르게 만든다는 게 문제였다.

결혼생활에 대한 루머들이 본격적으로 퍼진 이후, 사영은 어딜 가나 적대적인 의문과 확신을 담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들은 직접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채 사영이 보이는 사소하고도 평범한 행동에서 자기들만의 해답을 찾았다. 사영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들은 각자 사영에게서 마치 어떠한 답변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를 확신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사영의 대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다만 어떠한 사실이 자신을 더더욱 즐겁고 짜릿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죽기 전의 사영은 바보같이 그런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했었다.

사영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리에 앉아 눈을 꼭 감았다. 지금은 이깟 자기연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멍청하고 한심했던 죽기 전의 윤사영은 지금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진짜 뻔뻔하다. 어떻게 이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와?’

‘한재우 캐스팅된 거 알고 일부러 온 거 아냐?’

‘설마… 이혼했는데? 한재우가 보낸 선물도 거절했다며.’

‘그냥 엿 먹이려고 그런 걸 수도 있어.’

‘아냐. 한재우가 아니라 김유준이 목적일걸? 요즘 엄청 들이댄다잖아.’

어두워진 시야 밖으로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정말로 들리는 목소리인지, 아니면 제 마음이 멋대로 만들어 낸 환청인지 알아내려 애쓰지 않았다. 어떤 것이 차라리 나은 건지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건 그냥 거기에서 일어난 일이고, 사영은 그 소란으로부터 다만 멀어지고 싶었다.

“안녕하세요.”

그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목소리 하나가 불쑥 사영의 침묵 안으로 파고들었다.

사영이 반사적으로 눈을 떠 고개를 돌리자 곱슬곱슬하게 웨이브 진 밝은 금발 머리가 눈에 확 들어오는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도율,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영도 익히 아는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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