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43화 (43/193)

#043

“여기예요.”

조연출이 먼저 문을 열고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준이 짧은 숨을 훅, 내쉬고 들어가려던 차,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정민이 유준의 손목을 슬쩍 잡아 왔다.

돌아보자 어두운 표정을 한 정민이 한껏 작게 죽인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안에… 한재우 있는 거 같죠?”

“그런 것 같네.”

“저도 그 자식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여기 감독님도 계시고 하니까 먼저 선 넘지 않는 이상 괜히 긁지 말아요.”

그제야 유준은 정민이 자신을 붙든 이유를 눈치채고 눈썹을 찡그렸다. 정민의 당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기분 나쁘다고 사고 치지 말라는 소리였다. 어이가 없었다.

유준은 상냥하거나 다정한 성격은 못 되어도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정중히 대해 오는데 거기다 대고 먼저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만약 상대가 무례하거나 먼저 시비를 붙여 오면 절대로 참는 법이 없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민의 불안은 일견 타당성이 있기도 했다. 까놓고 말해 인기가 곧 권력이기도 한 이 바닥에서 유준이 참아야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정민의 걱정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정민은 유준이 이미 한재우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먼저 유준에게 거슬리는 추파를 던진 건 그였으니까. 어쨌든 내색하진 않았어도 유준의 최대 기대작인 작품에 갑자기 그가 끼어든 것이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게 되다니. 정민은 행여나 오늘 유준이 대놓고 한재우를 비꼬지는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쩌면 한재우가 먼저 유준의 성질을 건드릴지도 모른다. 그 딴에는 호감을 표현한다고 하는 행동들이 유준의 입장에서는 재수 없고 거슬리는 행동일 게 뻔했다.

솔직히 재우에게 한마디 한다고 해서 유준이 크게 타격 입을 일은 없겠지만 정민은 이곳이 오디션을 위해 열린 자리고 정 감독이 함께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굳이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에 안 좋은 이미지를 심어 줄 필욘 없질 않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정민의 표정에서 그 모든 속내를 읽어 낸 유준이 기가 찬 듯 참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유준이 말했다.

“너는 나를 뭘로 보고.”

“김유준 대배우님으로 보죠.”

“말이나 못하면. 시끄럽고 너나 표정 관리 잘해.”

유준은 정민이 원하는 대답은 제대로 해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려 열린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배우, 라는 표현과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당당하고 일견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표정과 자세였다.

다들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린 문 사이로 유준이 보이던 순간부터 모든 신경을 그쪽에 쏟던 오디션장 안쪽의 사람들은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유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준이 제게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마음을 먹으면 관심 없는 척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지는 법이었다.

“유준 씨, 어서 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멋대로 자라있던 수염을 깔끔하게 다듬은 정 감독이 먼저 유준을 향해 인사와 함께 악수를 건넸다. 정명철이나 되는 거장이 배우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준은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감독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김 배우 연기 볼 생각에 떨려서 잠을 못 잤지.”

“저야말로 하루빨리 감독님과 작업하고 싶어서 힘들었죠. 오디션 참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준 씨가 같이 봐 준다면 내가 고마운 일이죠.”

“아닙니다. 저는 오늘 그냥 방청객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결정은 전적으로 감독님께 달렸습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유준의 대답에 감독이 흡족한 듯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유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곤 몸을 돌려 두 사람에게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 굳이 소개가 필요할 것 같진 않지만… 우리 영화 주인공 역을 맡을 김유준 배우입니다.”

그제야 여기저기 유준을 향해 스태프들이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해왔다. 유준 역시 그들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며 인사를 나눴다.

정명철 감독은 단순히 작품을 잘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현장 분위기를 잘 이끌고 스태프들 처우 등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유준은 스태프들의 얼굴에 피로나 긴장이 아닌 기대와 설렘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 만족감은 감독의 뒤로 다가오는 뻔뻔한 얼굴을 보는 순간 전부 다 사라져 버렸다. 한재우였다. 그의 표정에 가득 어린 호감이 유준의 기분을 더더욱 더럽게 만들었다.

유준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저렇게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제 이미지를 만들어 가면서, 뒤로는 사영에 대한 더러운 소문을 퍼트리고, 침묵으로 추문에 동조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둔갑시켜, 끝끝내 윤사영을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죽게 만든 장본인이.

“안녕하세요, 유준 씨. 드디어… 유준 씨랑 같은 작품에서 만나 보네요.”

그런 사람이 대놓고 호감과 애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유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영이 재우에게 들었다던 온갖 쓰레기 같은 말들이 떠올랐다.

발작적으로 손등을 긁어 피를 내고서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던 모습과 강압적인 페로몬을 뒤집어쓴 채 견디던 모습들 역시 연달아 기억났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그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다.

아니, 하다못해 ‘그래요? 전 그쪽이랑 연기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는데.’하고 그의 자존심을 있는 대로 뭉개 놓고 싶었다.

“…반가워요, 한재우 씨. 그러게요. 저도 재우 씨랑 함께 연기를 맞춰 볼 수 있게 되어 기대되네요.”

하지만 유준은 하고 싶은 모든 행동을 기적적으로 참아 내고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로 재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유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얼굴을 만들어 내며 그를 향해 살살 눈웃음까지 쳤다.

설령 한재우가 자신에게 별다른 호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 얼굴을 보고 반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있을 만큼 잘난 얼굴이었다.

재우는 악수한 손에 힘을 주며 집요하게 유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모르는 이들은 힘겨루기하는 거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유준은 그가 아주 명확하게 저를 유혹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재우는 대놓고 유준이 자신이 보내는 섹슈얼한 제스처를 알아채길 바라는 것 같았다.

유준은 역겨움을 느꼈다. 온갖 욕설을 전부 다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인사를 마무리한 건 전부, 윤사영이 말한 복수를 위해서였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재우를 바닥으로 떨어트리기에 적절한 순간이 아니었다.

사영의 말대로 그가 지금보다 더 자신에게 빠져들도록 만들어야 했다. 단순한 호감 정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거절당하면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유준이라면 절대로 이런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겠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윤사영의 복수고, 거기에 맞춰 주기로 한 이상 사영의 뜻대로 해 주는 게 옳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한재우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그럼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인사를 대충 마무리한 유준은 재빨리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따라오려는 정민도 물리고 사람이 없는 건물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며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당연히 사영이었다.

받아라. 제발 받아라.

유준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오디션에 집중한다는 등의 이유로 휴대폰을 꺼 놓았거나 연락에 신경 쓰지 않고 있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 한재우가 와 있음을 알려야 했다. 그가 아무 대비하지 못한 채 오디션 무대에 서서 재우를 마주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한재우가 사영의 길을 막는 걸 두 눈 뜨고 지켜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대로 사영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대기실로 직접 찾아가야겠다는 다짐까지 한 순간,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 유주…. 네. 윤사영입니다.

습관적으로 유준의 이름을 부르려 했던 것 같은 사영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무래도 주변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양이었다.

유준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자신이 무작정 대기실로 그를 찾아갔으면 그의 반응이 참 볼만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김유준입니다.”

- 네. 무슨 일이세요?

“잠깐…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전화 받아요.”

- 아, 잠시만요.

사영은 유준의 목소리에 어린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건지 답답하게 굴지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유준은 외진 복도 끝 창가에 서서 누군가 다가오지 않는지 주변을 살폈다. 전화기 너머로 사영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사영이 지금 진실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홀로 던져져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건 아니다. 사영의 일에 관심도 없고, 루머를 들었다고 한들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입을 대기도 한다.

사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올 때까지, 유준은 적막한 복도에 서서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앉아 있을 사영을 떠올렸다.

- 네. 이제 됐어요.

그리고 너머에서 다시 사영이 말했다. 유준은 목소리로 그가 괜찮은지를 파악하고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담담한 사영의 음성은 어떤 추측도 허락하지 않았다.

유준은 반사적으로 괜찮으냐고 물으려다가, 그 질문이 오히려 사영을 건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말을 멈췄다.

대신 유준은 사영이 당장 알아야 할 사실에 대해 입을 열었다.

“윤사영 씨. 침착하게 들어요.”

- …….

“한재우가 와 있습니다. 오디션 참관하려는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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