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41화 (41/193)

#041

“형, 요즘 왜 이렇게 바빠요?”

장 봐 온 것들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채우며 정민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준은 세상 가장 게으른 사람처럼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바쁘긴. 쉬는데 뭐가 바빠.”

“연락도 없고, 전화하면 매일 밖에 있고.”

“…모처럼 휴식이니까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지, 뭐.”

솔직히 유준은 조금 뜨끔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했다.

“하긴, 진짜 오랜만에 쉬는 거죠. 형 진짜 그것도 중독이에요, 일 중독. 그나마 차기작 촬영까지 텀이 있어서 망정이지…. 이참에 촬영까지 진짜로 좀 푹 쉬세요.”

다행히 정민은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다.

정민의 말마따나 유준은 그간 정말로 쉴 틈 없이 일했다. 괜히 소처럼 일한다는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가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아하는 팬들조차도 이제 제발 좀 쉬면서 하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작품 외에는 예능 등의 방송도 거의 안 하고, 요즘 유행하는 그 흔한 SNS나 동영상 공유 서비스 채널조차 없는 유준의 활동 스타일을 감안한다면 이제 좀 쉬라는 팬들의 요청은 꽤나 이례적이었다.

그 정도로 유준은 지금까지 정말로 쉴 새 없이 달려왔으며 그 행보는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오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다작을 해 왔는데도 지금껏 크게 삐끗한 적 없이 좋은 성적과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유준을 더더욱 대단하게 만들었다.

“놀면 뭐 하냐. 빨리 촬영이나 들어갔으면 좋겠다.”

유준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느리게 대답했다. 간밤에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한 바람에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전부 다 윤사영 때문이었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다는 점이 특히 더 짜증스러웠다.

제 배우가 얼마나 곤란한 밤을 보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정민은 촬영이나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유준의 말에 그를 위로한답시고 대답했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요. 얼마 안 있으면 벌써 오디션이니까….”

그와 동시에 유준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오디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아주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혼자 있으면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만 떠올리니까 거기에서 조금 벗어나고자 괜히 정민을 부른 건데 전부 다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렸다.

“형 진짜 오디션 참석하실 거예요?”

그 사이 냉장고 정리까지 싹 마친 정민이 거실로 다가와 기역 자로 놓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유준은 뻑뻑한 눈을 껌뻑거리며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천장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테리어를 싹 바꿀까. 이사 온 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작품에 진짜로 기대가 큰가 봐요, 형.”

그거 말고는 생전 관심도 없던 상대역 캐스팅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던 정민은 나름대로 유추해 낸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유준은 별다른 반박 없이 ‘뭐,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정민은 오늘따라 이 형이 왜 이렇게 얼빠진 사람처럼 구나 싶었지만 뭔가 말하기도 귀찮아 보이는 그를 더 귀찮게 하는 대신 자신이 유준의 몫과 함께 사 온 커피를 입에 물며 휴대폰을 집었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으면 이대로 돌아가 여자 친구와 데이트할 생각이었다.

“어?”

그리고 습관적으로 연예계 뉴스를 먼저 살피던 정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건 그냥 별거 아닌 반응이었다. 평소의 유준이라면 굳이 궁금해하지 않았을, 아무것도 아닌 순간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감각이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유준은 본능적으로 정민의 그 반응이 자신이 알아야만 하는,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윤사영에 관한 일일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을 받았다.

“…왜? 뭐 떴어?”

유준은 애써 별로 대수롭지 않은 궁금증인 척 물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앞에 놓인 커피를 쥐고 마셨다.

다행히 유준의 행동과 물음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은 정민이 손가락으로 액정을 부지런히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한재우가 윤사영한테 선물 보냈었나 본데요? 얘네 안 좋게 헤어졌던 거 아닌가?”

“뭐? 네가 그걸 어떻…!”

“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대?”

하마터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펄쩍 뛸 뻔한 유준이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머릿속이 다시 엉망진창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정민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기사 났는데요? 윤사영 다쳤다는 얘기 듣고 매니저를 통해 보냈는데 윤사영이 문전박대하고 쫓아냈대요.”

“…….”

“이야… 윤사영 또 엄청나게 욕먹네요. 어떻게 이혼을 하고 나서도 조용할 날이 없냐, 이 둘은.”

정민의 감탄 아닌 감탄을 들으며 유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재우가 선물을 보낸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다. 정보가 공개될 수 있는 다른 루트를 탄 것도 아니고 한재우와 그의 매니저인 최은성, 그리고 윤사영 이렇게 세 명만이 엮여 있었다.

그런데 언론에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는 건 세 사람 중 하나가 흘렸다는 소리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리 줘 봐.”

갑자기 힘을 되찾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난 유준이 정민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정민의 말대로 기사 댓글창은 물론이고 포털사이트에 검색되어 나오는 SNS에서도 사영을 욕하는 글들이 한 무더기였다.

간간이 한재우의 경솔함이나 이른바 ‘호구력’을 탓하는 글도 있었지만 그런 글조차도 기본적으로는 한재우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개새끼 윤사영에게 헌신하느냐 이런 말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손가락으로 나불대는 게 우습고 꼴같잖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윤사영이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겪고, 끝끝내 무슨 일까지 겪어야 했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가 견디기 힘든 사람인 거 잘 알고 있어요. 귀찮고, 이기적이고, 오래 함께할수록 지긋지긋한 사람인 거. 알아요.’

고해하듯 담담하게 토해 내던 사영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분노는 한층 더 깊어졌다.

한재우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의 인생에 대해 쉽게 떠들고, 재단하고, 재미로 욕을 일삼는 이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윤사영을 거기까지 무너트렸다.

자신은 독하고, 이기적이며, 재수 없고, 한재우에게는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이 사람들이 윤사영을 벼랑 끝으로 같이 몰고 간 것이다.

손이 떨렸다. 죽기 전 수많은 날에 홀로 이러한 폭력을 겪고 있었을 사영을 생각하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형!”

점점 더 깊은 감정 속으로 침잠하는 유준의 정신을 일깨운 건 정민의 높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화면에서 시선을 떼 고개를 든 유준이 정민을 바라보았다.

유준을 쳐다보는 정민의 표정은 크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요. 뭐 심각한 거 봤어요?”

“…어?”

“아니 갑자기 엄청 화가 난 표정을 해 가지고….”

“아…. 아니야, 그냥 잠깐 딴생각을 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을 했길래 표정이 그래요.”

꼭 누구 하나 잡아 죽일 것처럼.

정민은 순간적이었지만 소름이 쫙 돋았던 감각을 애써 떨쳐 내며 중얼거렸다. 그냥 딴생각하는 중 지은 표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살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정민은 굳이 어떤 생각이었는지를 캐묻지는 않았다.

매니저 생활을 평탄하게 보내는 방법 중 제1법칙은 ‘눈치가 없는 척을 해야 할 때를 눈치 빠르게 알아채라’였다.

정민은 괜히 유준을 들쑤시는 대신 그가 내민 제 휴대폰을 받아 들곤 느낀 바를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무튼, 다들 한재우가 윤사영한테 잘못 걸렸느니 불쌍하니 하는데 저는 걔 영 쎄하단 말이죠?”

“그래?”

“네. 뭐, 잘은 모르지만 형한테 하는 것도 그렇고 보면 진짜로 그렇게 윤사영한테 헌신적이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아무튼 사람이 그냥 좀 별로예요. 느낌이 안 좋아.”

“…….”

“더 짜증 나는 게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면 꼭 한재우를 질투해서 그러는 줄 안다니까요? 아니, 내가 김유준 매니전데 한재우 같은 걸 왜 질투해요? 안 그래요, 형?”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는지 정민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그 덕분에 조금 기분이 풀린 유준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그래. 김유준 매니저가 뭐가 모자라서 그딴 새끼를 부러워해.”

“제 말이요! 참나. 아무튼… 윤사영도 이제 퇴원했고, 더 이상 그 걔네랑 엮이지 않게 조심해요, 형도.”

“…….”

“엮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러고 보니 정민은 사영이 영화 <하지>의 서단우 역 오디션에 참가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뜨끔한 마음이 든 유준은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방금 본, 사람들이 사영에게 하는 말들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사영도 이런 기사가 뜬 걸 알았을까. 혹시 댓글 같은 걸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준은 자꾸만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재우가 선물을 보내 왔던 일을 사영이 언론에 제보했을 리는 없으니 이건 분명 한재우 쪽에서 제공한 정보일 것이다. 이혼한 지금도 이런 식으로 여론몰이를 해 대는데 결혼생활 중에는 오죽했을까 싶었다.

자신과 관련 없는 연예계 소식에는 통 관심이 없던 유준조차도 사영에 대한 소문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 부부에 관한 소문은 늘 파다했다. 그것도 항상 문제의 원인이 사영에게 있다는 식으로만 말이다.

이제 와 사영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지독했을지를 가늠하려니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형…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그 생각을 하자 또다시 표정이 심각해진 건지 정민이 한층 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작 염려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아주 작은 온기조차 없는 그 휑한 집에서 윤사영은 지금 혼자 있을 텐데.

“…괜찮아.”

한참 만에 겨우 대답을 내놓은 유준은 재빨리 소파에 다시 누워 버렸다. 순간 사영의 집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 탓이다.

진정하자, 진정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유준은 눈을 감고 연신 자신을 달랬다.

잠도 잘 잔다는데. 다 죽어 가는 몰골을 하고서도 잘만 잔다는데 그깟 인간을 걱정해 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오늘따라 이 형이 진짜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까, 하고 제 매니저가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유준은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모든 충동을 모른 척했다.

지금부터 김유준은 윤사영이 도와 달라고 ‘직접’ 요청해 오지 않는 일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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