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처음에는 화가 났다. 사영이 어떻게 감히 자신에게 그딴 태도를 보일 수 있는지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사영의 앞에서 마지막까지 이성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재우는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하려 애썼다. 처음 이혼을 요구했을 때는 굳이 깊이 따져 보지 않았다.
어쨌든 그도 인간인데 아무리 맹목적인 사랑을 했다고 한들 한계라는 건 있기 마련이고 드디어 그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만 여겼다.
사영의 입장에서는 사실 한참 전에 그만뒀어야 했다. 그는 헛된 기대와 희망에 잠겨 너무 오랫동안 부당한 대우를 견뎌 왔다.
사영이 제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그의 정신을 무너트린 건 재우였지만 어쨌든 참지 못하고 벗어나야 할 지점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 왔다는 뜻이다.
마침내 사영이 정신을 차려서 이 지긋지긋한 인연을 끊어 내자고 마음을 먹고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면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사영이 갑자기 김유준과 얽힌 데다, 오늘 자신을 대하는 태도까지 보고 나니 무언가 자꾸만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정신은 우위를 명확하게 하는 공격이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약하다. 괜히 세뇌를 위험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재우는 아주 오랫동안 치밀하게 공을 들여 사영의 정신을, 감각을, 자존감을 망가트려 왔다.
특히나 재우는 자신이 사영의 이름을 이용해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일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별것도 아닌 네 곁에 내가 있어 주는 거라고, 너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고, 사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렇기에 내가 네 덕분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내게 아주 부당한 일이며, 너는 나에게 미안해해야 한다는 인식을 특별히 공들여 사영에게 주입했다.
그토록 정성스럽게 망가트린 덕분에 그간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사영은 재우에게 반박하거나 역으로 그를 공격할 마음을 감히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윤사영이, 다른 것도 아니고 잘나가는 배우에게 접근해서 인생을 바꾼 거 아니냐는 말을 어떻게 자신에게 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오늘 사영을 직접 보기 전까지만 해도 재우는 그가 김유준에게 일부러 접근한 게 아니냐는 의심은 억측이라고 생각했다.
사영에게는 그럴 만한 의지도, 배짱도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재우 그 자신이 사영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이혼 요구, 김유준과 얽힘, 오늘의 태도까지.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치고 나자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사영이 무슨 속내를 가지고 있든 이제 와 뭐 대단한 일을 할 수는 없겠으나 함께 살던 때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은성아.”
“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재우가 갑자기 이름을 불러 오자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온통 등 뒤로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고 있던 은성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재우는 여전히 창밖을 보던 자체 그대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 윤사영 집에 갔던 거, 혹시라도 외부에 알려지면 어떻게 얘기할지 내가 말했었지.”
“네.”
“그거 말 좀 풀자.”
재우는 길게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사전에 들은 바가 있기에 무엇을 말하는지 헷갈리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속 한구석에서 그 일이 부당하다는 거, 당신도 알고 있지 않냐고 말하던 사영의 목소리가 자꾸만 맴돌 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사영은 은성에게 아무도 아니다. 그는 은성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그에게 돈을 주지도 않는다.
은성은 제 삶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의 순서를 머릿속에 되새기며 기계적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설령 알량한 마음의 가책 같은 걸 느낀다고 한들 은성은 재우를 거역할 마음이 없었다. 은성의 대답을 들은 재우는 조금 더 좌석에 등을 깊이 기댔다.
만약 윤사영이 정말로 자신의 관심을 얻어 내려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한 것이라면 확실히 제법 괜찮은 시도였다.
그에게 이렇게까지 집중하고 신경 쓴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때는 윤사영의 모든 걸 빼앗고 망가트리기 위해 말 한마디, 숨소리 하나까지 조절하기도 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사영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야말로 가진 모든 걸 걸어 아양을 떨어 댔다.
그 시간은 안 그래도 사영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재우의 감정들을 더더욱 깊어지게 했다.
사영이 강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차라리 사영이 강요했다면 재우는 그를 덜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이기적이고 비굴한 그 모든 행동이 성공을 위한 자신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는 건 재우의 마음을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사영과 자신의 권력이 역전되자 재우는 마치 복수라도 하듯 사영에게 더 차가워졌고, 무관심해졌으며, 종국에는 폭력적인 존재가 되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한재우 그 자신인데, 자신에게는 복수할 수 없으니 사영을 희생자로 삼은 것이다.
사영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겠으나 재우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재우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번뜩였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가설이었다.
설마 윤사영이 나에게 이제 와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 하는 추측이 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가장 타당한 생각이었다. 어째서 지금까지 떠올린 적이 없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여기까지의 사정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꺼내 놓을 만한 추측이다. 하지만 재우는 이내 그 가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애초에 재우가 ‘복수’라는 키워드를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못했던 건 상대가 윤사영이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재우에게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제게 매달려 오기만 했던 바로 그 윤사영이다.
화를 내긴커녕 큰 목소리 한 번 못 내고, 재우가 손을 내밀면 좋다고 와서 머리를 부비던 사람이 복수를 한다니. 떠올린 게 우스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 자신을 유기했다고 주인에게 복수하는 개를 찾아보기 힘들듯 철저히 재우의 훈련 아래 살아온 윤사영에겐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사영이 진짜 개는 아니고,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인지라 겨우 이혼을 요구하고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복수라니, 그건 불가능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결국 어떻게든 한재우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수작을 부리는 거란 소린데.
심각하게 굳어 있던 재우의 표정에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겨 흘려버리긴 했지만 재우는 솔직히 사영이 먼저 이혼을 요구한 게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결국 그조차도 자신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니.
바닥까지 떨어졌던 감정이 서서히 올라오는 걸 느끼며 재우는 딱딱하게 굳었던 몸을 이완시켰다.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는데도 은성에게 한 명령을 거두지 않은 건, 아무리 그래도 자신에게 그 정도로 저열한 막말을 쏟아 낸 사영을 향한 처벌이었다.
재우는 여전히 자신에게 그만한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다.
***
“참나.”
유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소리를 작게 뱉으며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창백한 얼굴로 곤하게 잠들어 있는 윤사영이 있었다.
사영의 집으로 오는 길의 중간 즈음부터 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 난리를 쳐 놓고 잠이 오나.”
사영의 몸에서는 아직도 한재우의 기분 나쁜 향이 옅게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으로 피워 낸 게 분명해 보이는 사영의 페로몬 역시 함께였다.
덕분에 유준은 운전하는 내내 불쾌함과 자극 사이에서 아주 예민한 상태로 다른 곳도 아닌 윤사영의 집까지 와야 했다. 사영을 데려다주기 위해서 말이다.
한데 정작 문제의 당사자는 이토록 태연하게 잠이나 자고 있다니. 사람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정말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불만으로 시끄러운 머릿속과는 다르게, 정작 유준은 마치 사영이 깨는 걸 염려하는 사람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임을 죽인 채 사영을 보고만 있었다.
감은 눈가에는 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피로가 어려 있다. 얌전히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등에 유준이 붙여 준 밴드 주위로 흉터가 선명하다. 입술은 조금만 움직여도 찢어져 피가 날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윤사영 씨, 하고 그를 깨우려고 입을 열었다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냥 닫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지는 굳이 추론씩이나 해 보지 않아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 겨울의 밤. 차가운 아스팔트. 붉은 피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와 죽음.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고통스러웠을 나날들.
전혀 상관없는 유준조차도 그 말을 듣고 난 뒤론 이따금 그 겨울밤이 떠올라 잠자리가 뒤숭숭했는데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당사자는 오죽할까 싶었다.
그게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단지 사영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망상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어쨌든 적어도 눈앞의 이 사람의 세계에서는 모든 일이 사실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오늘 한재우가 보인 행태를 마주하니 죽음으로 시간을 되돌아온 것까진 몰라도 그에게 오랫동안 학대당한 것만큼은 사실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일들을 겪고 이제야 겨우 탈출한 사람이 밤에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을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다가 오늘 그런 일까지 겪었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든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