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음, 원래 이민규 씨를 캐스팅할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정민은 운전하며 뒤에서 들려오는 유준의 통화내용에 귀를 바짝 세웠다. 낮게 가라앉은 유준의 목소리도 그렇거니와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잡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유준은 다음 영화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다른 일 없이 휴식을 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리 잡혀 있던 오늘 인터뷰가 차기작 이전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아니요, 잘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조금 의외라서 놀랐어요.”
유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유준을 알았던 정민은 그의 심기가 꽤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요. 캐스팅은 어디까지 감독님 고유 권한이시니 제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죠. 감독님께서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저도 좋습니다.”
이민규가 물망에 올랐던 역이라면 주인공인 ‘강무준’의 대척점이자 중심 스토리를 함께 이끌고 가는 주요 인물인 ‘강무성’ 역이었다. 이미지나 연기력이나 어느 모로 보아도 이민규는 꽤 적절한 캐스팅이라 잘되었다고 유준과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났다.
그 배역 캐스팅에 문제가 생긴 건가. 정민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 그럼 오디션 날 뵙겠습니다.”
유준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통화를 마쳤다. 정민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감독님이세요?”
“응.”
덤덤한 유준의 대답에 정민은 속으로 짧게 감탄했다. 김유준 정도 되는 대스타는 어딜 가나 황제처럼 대접받는 게 일상이긴 했지만 <하지> 감독인 정명철 감독은 세계무대에서도 인정받은 거장이었다.
그런 감독이 개인적으로 연락해 캐스팅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다니. 새삼 배우로서 유준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되었다.
그게 제 능력도 아닌데 어깨가 으쓱해진 정민은 괜히 흠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물었다.
“왜요? 강무성에 다른 사람 캐스팅했대요?”
“응. 그렇게 됐대.”
“누구요?”
“…한재우.”
“네?!”
정민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차를 멈춰 세울 뻔했다.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이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물었다.
“한재우요?”
“응. 한재우.”
“헐….”
정민의 입에서 곧장 날것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여기에서 갑자기 한재우의 이름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온 정민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아, 걔는 왜 자꾸 형하고 엮인대요?”
“뭐… 워낙에 좋은 작품이니까 그쪽에서도 욕심이 났겠지.”
“아니, 그렇긴 한데…! 뭔가 꼭 작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든단 말이죠.”
아무래도 영 찝찝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정민의 목소리에 유준은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보았다. 만약 사영에게 먼저 듣지 못했다면 유준 역시 정민처럼 놀라고 찝찝해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사영의 말을 전부 사실이라고 믿고 행동하던 유준이지만 다시 한번 그가 알려 준 미래가 맞아 들자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이렇듯 미래를 알 수 있는 게 한 번 죽었다가 시간을 되돌아왔기 때문이라니. 차라리 없던 예지 능력이 갑자기 생겼다고 하는 게 그보다는 더 현실성이 있었다.
사영의 말에 따르면 유준에게 가벼운 호감을 가지고 있던 재우의 마음이 급격하게 깊어진 건 바로 이 작품을 함께하게 된 이후부터라고 했다. 재우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진심이 된 건지는 유준도 알 수 없었다.
사영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한재우는 그 시간선의 유준과 아무런 진척도 이뤄 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준은 재우에게 일말의 호감도 느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달라질 감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재우는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함께 일하면서도 곁을 주지 않는 유준의 태도에 재우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애를 태웠다. 결국 촬영이 끝날 즈음엔 완전히 김유준에게 빠져들어, 그때부터 사영을 대하는 태도가 더더욱 악랄해졌다고 했다.
이야기를 종합해 본다면 어쨌든 사영을 알기 전의 김유준도 한재우에게 티끌만큼의 마음조차 가지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사영이 복수의 대상에 유준을 끼워 넣지 않은 것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
유준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지나치게 벽을 세운 행동이 결과적으로 재우의 감정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고 한들 그건 유준의 잘못이 아니고, 유준이 신경 쓰거나 책임질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한 건 무엇 때문일까.
“…형은 괜찮으세요?”
그 사이 유준의 침묵에 살살 눈치를 보고 있던 정민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유준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뭐가?’하고 대답했다. 정민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형도 한재우 싫어하잖아요. 같이 일하면 불편할 텐데….”
“어쩌겠어. 감독님이 캐스팅하셨다는데 해야지. 항상 나 좋은 사람들 하고만 일할 순 없는 거고.”
“그건 그렇죠….”
유준의 말은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연예계에 얼마나 많고 다양한 군상들이 있는데 늘 잘 맞거나 호감을 두었던 상대하고만 일할 순 없었다. 원한다면 방법은 있으나, 그러려면 배우 스스로 캐스팅에 관여하며 월권을 행사해야 하는데 그건 유준이 정말로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휴…. 아무래도 찝찝한데….”
정민이 이번에는 뒤에까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우가 괜찮다고 한 마당에 매니저인 정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나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였다.
유준이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아는 정민으로서는 부디 한재우가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실은 이 영화에 윤사영까지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
초인종이 울렸을 때 사영은 소파에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반쯤 잠들어 있었다.
요즘은 잠시라도 밖에 나갔다 오면 잠이 쏟아졌다. 다친 다리 때문인지, 생각이 많은 머리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시간을 되돌아온 부작용 같은 게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단지 겨울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영은 이전부터 겨울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정적은 차가운 공기를 만나면 더 깊고 짙어진다. 그 시린 온도에 숨이 막혀 올 때면 사영은 두꺼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하염없이 잠에 취하곤 했다.
사람들은 사영이 남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사치를 일삼으며 집안일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어떻게 집에 파묻혀 있는 사영의 일상에 대해 떠들 수 있었는지 그때의 사영은 알지 못했다.
내가 잠들었었나. 사영이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만 느리게 깜빡이고 있는 사이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사영은 그제야 소파에 기대 있던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이 집에는 찾아올 사람이 없다. 어머니는 매사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이기 때문에 미리 연락도 하지 않고 무작정 들이닥치는 일이 없었다.
사영이 이사 오고 나서 유일하게 이 집에 왔던 타인인 김유준은 이미 돌아갔다.
사영의 심장이 불안한 방식으로 뛰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타인의 침범이 낯선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사영은 손을 뻗어 무기를 쥐듯 목발을 꽉 쥐고 의지하며 최대한 발걸음을 죽인 채 인터폰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에 보이는 얼굴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임에도 안심할 순 없었다.
집 앞에 있는 건 한재우의 매니저, 최은성이었다.
사영은 대답하지 않고 그 앞에 서서 은성이 왜 자신을 찾아왔을지를 짐작해 보았다. 병원에서 유준과 함께 찍힌 사진이 기사화됐던 게 떠올랐다.
그게 분명 한재우의 신경을 건드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득달같이 매니저를 보낼 줄은 몰랐다.
상대가 누군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대강 짐작하고 나자 막연히 두려움을 느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사영은 천천히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은성 씨.”
화면 너머의 얼굴이 흠칫 놀랐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 아, 안녕하세요, 사영 씨….
한때 사영은 그가 고마웠고, 그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때로는 언제나 한재우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그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재우가 너무 그리워 농담처럼 차라리 자신이 재우의 매니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다. 은성의 얼굴을 보자 지난날 제 안에 있던 어리석은 감정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인사를 한 후에도 은성은 여전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혹시 문이 열린 건 아닌지 현관 쪽을 기웃거렸다가, 여전히 문이 굳게 잠겨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화면을 향해 입을 열었다.
- 그… 배우님이 보내셔서 왔는데요. 다치셨다가 퇴원하셨다는 소식 듣고 선물을 전해 드리라고 하셔서….
말을 하며 은성은 한곳을 쳐다보지 못하고 연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문 안쪽에서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사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별거 아닌 한마디의 문장에서도 은성이 재우를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티가 났다.
딱하기도, 우습기도 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