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그냥 한재우를 잊어버리고 자기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복수를 결심한 사영의 선택은 마음에 들었다. 유준은 용서가 최고의 복수니 뭐니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아팠으면 상대도 죽을 만큼 아파야 하고, 내가 울었으면 상대는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 용서는 복수를 한 이후에나 고려해 볼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영의 복수는 틀렸다. 잘못된 방식이었다. 복수하는 주체가 내가 되어야지 나의 모든 것이 복수에 잠식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사영의 복수는 그 자신을 망가트리는 일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흥분한 감정을 잠시 가라앉히며 긴 숨을 내쉰 유준이 다소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말은… 한재우를 끌어내리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윤사영 씨의 삶이 이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으면 그건 반쪽짜리 복수밖에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기껏 도와줬더니 그런 꼴을 보는 것도 기분 더러우니까.”
사영은 잠자코 유준의 말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가라앉은 표정에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말을 해도, 가만히 있어도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유준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한번 헝클이고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들어가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요한 말을 할 때는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던 사영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유준은 사영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차에 타 문을 닫아 버렸다. 틀에 박힌 감사 인사나 사과 따위는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집 안에 들어가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 서 있는 사영의 모습이 보였다. 유준이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저런 태도는 사영이 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일까, 아니면 한재우가 강제적으로 주입시켜 놓은 습관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뒤로하고 유준은 그대로 차를 몰아 윤사영에게서 벗어났다.
***
“…….”
사영은 현관 앞에 서서 눈에 들어오는 집 안의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파와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고는 있는 게 없는 거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게 사람 사는 집입니까?’
방금 들었던 유준의 말이 떠올랐다. 사영은 그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유준은 이 집이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가구라도 좀 들여놓으라고 했다. 사영은 그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가구를 들여놓으면. 무언가 물건들로 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면 사람이 사는 것 같은 집이 되나?
사영과 재우가 함께 살던 집에는 없는 게 없었다. 집 안에는 비싼 가구와 최신형 가전 등이 즐비했지만 사영은 늘 그 집을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다고 느꼈다. 물건으로 집을 채우는 건 아무것도 채우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영은 사람답게 살라는 유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미미하게 알 것도 같았다. 집의 문제가 아니다. 가구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마 유준도 정말로 가구 그 자체에 의미를 둔 것은 아니리라.
가구를 들여놓으라는 말은 결국 이전 삶에서 유준이 제게 해 주었던 말과 궤를 같이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거짓말처럼 심장 안쪽에서 아주 작은 따스함이 퍼졌다.
사영은 분명 살아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살아 있는 건지 확신하기 힘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이 시간이 다만 죽음에서 유예된 순간 같다고 느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 세계를 부유하는 망령처럼 말이다.
그런데 산다는 게 무얼까. 사람답게 산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
사영은 너무 오랫동안 그 감각을 잊고 살았다. 죽기 한참 전부터 이미 그랬다.
단순히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는 것 이외에,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한 정신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만 할까.
아주 오래전 사영은 연기를 할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꼈고, 한재우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영혼이 존재함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두 가지 모두 잃어버린 지금은 무엇으로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사영은 거실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침잠하듯 소파에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머리가, 가슴이, 손톱으로 긁은 손등과 다친 다리가 전부 아파서 결국에는 아무 곳도 아프지 않았다. 사영에게는 모든 날이 그랬다.
***
“야, 너 나 촬영하는 동안 윤사영한테 좀 갔다 와.”
“네?”
재우의 앞에서는 좀처럼 목소리 높이는 일이 없는 매니저 은성은 드물게 당황하여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재우가 한쪽 눈을 치켜뜨자 은성은 곧장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혼란스러운 표정까지 전부 다 숨길 수는 없었다.
재우는 대기실 거울에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 보며 별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대충 몸에 좋다는 거 사 가지고 가서 퇴원 축하 선물이라고 전달해 주고 오라고.”
“무슨….”
“그리고 전해.”
은성은 이어진 짧은 재우의 침묵에 불안함을 느꼈다. 재우는 살짝 흘러내려 온 앞머리를 스윽 한번 넘기고 고개를 돌려 은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행동거지 똑바로 하라고.”
은성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고 완전한 남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한재우가 무슨 자격이 있어 사영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사영이 여전히 한재우의 남편이라고 하더라도 저런 말을 들을 이유 같은 건 없겠지만 그조차도 아닌 지금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그건….”
은성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가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거나 되묻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말을 제대로 들은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재우는 기분이 상했을 때 짓는 특유의 찡그린 표정을 하고는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윤사영한테 말하고 와. 내 얼굴에 먹칠 하지 말고 행동거지 똑바로 하라고. 이혼하자마자 아무 남자한테나 껄떡대서 괜히 이름 오르내리지 말라고. 내 말 무슨 뜻인지 몰라?”
은성은 사영이 일부러 김유준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설령 그랬다고 한들 그게 무슨 문제인가. 은성은 이 결혼의 파탄 원인이 사영에게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만약 사영에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건 한재우다.
종종 마주칠 때마다 예의 바르고 세심하게 자신을 챙겨 주던 사영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은성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어째서 이런 사람이 한재우를 사랑하는 걸까 의문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은성은 사실 제게 그런 생각을 할 자격조차 없는 것을 알았다.
은성은 때때로 한재우의 손발이 되어 사영의 숨통을 막았다. 사영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알면서 외면한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고 갖은 억측으로 대중이 사영을 공격할 때도 침묵했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나는 시키는 대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변명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은성은 정말로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이혼해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은성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또다시 재우는 은성에게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왜.”
“…….”
“하기 싫어?”
드문 은성의 침묵에 한재우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은성의 입술 끝이 떨렸다.
은성에게는 대학에 다니는 동생이 있었다. 돈이 없어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은성은 동생만큼은 꼭 4년제 대학 졸업장을 딸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혼자 두 아들을 키우며 갖은 고생을 다 한 어머니는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은성은 가장이고, 한재우의 매니저 자리는 다른 매니저들에 비해 월급이 꽤 높았다. 매니저에게 고액의 연봉을 준다는 사실은 한재우의 이미지 메이킹 재료로 쓰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은성은 제 손에 떨어지는 돈이 많으면 그만이었다.
은성은 거세게 뛰기 시작한 심장을 애써 모른 척하고 익숙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온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지금 다녀올까요?”
재우는 속내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입을 다문 채 뚫어져라 은성을 쳐다보았다. 은성은 적극적이면서도 순순한 표정을 익숙하게 꾸며 냈다. 재우는 한참 만에 은성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은성은 아주 성실하고 적극적인 목소리로 대답하고 돌아서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은성은 한재우를 잘 알았다. 그가 단순히 사영의 속을 뒤집을 요량으로 이런 일을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뻔했다.
오늘 자신의 방문에 사영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 반응하든, 지금 한재우가 짜고 있을 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다.
은성은 절로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한숨을 쉬면 정말로 자신이 몹쓸 짓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고단한 삶을 사는 이들은 그 누구도 타인의 불행을 제 불행보다 앞서 염려하지 않는다. 그건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다.
그래서 은성은 오늘도 자신을 위한 수많은 변명을, 변호를, 자기연민을 되뇌며 움직였다.
자신이 그 ‘어쩔 수 없는’ 걸음을 걸었던 길 끝에서 윤사영이 결국 죽음에 다다랐다는 걸, 은성은 몰랐다. 몰랐다고 변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