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유준은 옷을 골라 차려입은 뒤 드레스룸의 거울 앞에 섰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옷을 골랐다. 셔츠부터 바지까지 전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평소 즐겨 입는 조합인데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이상하게 보였다.
유준은 뒤를 돌아 또다시 옷을 골랐다.
“…나 뭐 하냐.”
그러다가 유준은 지금 자신의 행태가 참으로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말 그대로, 정말로 뭘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준은 얼굴보다 연기력에 더 자부심을 가지는 배우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외모에 자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떤 배우들은 연기가 아닌 외모에 관한 칭찬을 듣는 걸 부끄러워하거나 자존심 상해하기도 했으나 유준은 달랐다.
유준은 연기력만큼이나 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배우에게 절대적으로 좋은 자산임을 인지하고 있으며, 제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잘났는지를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유준은 지금 이 상황이 정말이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는 족족 제 눈에 비친 모습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 상황이 말이다.
지금 유준은 사영을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를 하는 중이라는 걸 떠올린다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거적때기를 입고 간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을 자리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다.
유준은 한 번 더 옷을 갈아입으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풀었던 단추를 도로 잠그며 다시 거울을 보았다. 하지만 유준의 눈동자에 비친 건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이 아니라, 기억 속에 있는 사영의 모습이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윤사영의 ‘얼굴’ 말이다.
사영은 오랫동안 연예계 활동을 쉬었던 것치고 지나치게 ‘연예인다운’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비단 유준만의 개인적인 평가가 아니다. 오늘 유준이 의도적으로 공개한 병원 사진에 달린 수많은 악플 사이에서도 윤사영의 외모에 감탄하는 글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비호감인 것과는 별개로 얼굴 하나는 인정한다는 둥, 저러니 한재우가 첫눈에 반해서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진 거 아니겠냐는 둥 하던 말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졌고 창백한 피부에 수척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그 덕분에 전에는 없던 처연한 분위기가 더해진 사영의 얼굴은 오히려 배우로서는 더 유리한, 어딘지 모르게 사람이 깊어진 듯한 느낌을 풍겼다.
아무리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하더라도 돈은 넘치게 많았을 테니 꾸준히 관리를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사영이 아주 매력적인 미인이라는 데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악플러의 말처럼 ‘그가 비호감인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유준은 셔츠 끝의 단추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유난을 떨고 있는 게 결국 사영의 그 외모를 의식해서인가, 싶어 영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사영이 다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과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평판을 그는 과연 다시 뒤집을 수 있을까. 재기할 수 있을까.
오디션에서는 어떨까. 그의 연기력은 그대로일까. 아니면 퇴보했을까. 한번 물꼬를 튼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사영의 연기가 궁금해졌다. 어쨌든 배우는 연기로 승부를 봐야 한다. 한재우를 ‘사랑’으로 굴복시키는 게 분명 그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유준은 연기로, 커리어로 한재우를 완전히 눌러 버리는 게 차라리 더 통쾌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애초에 그는 배우 커리어와 인기를 얻기 위해 사영을 이용한 사람이 아닌가. 바로 그 지점에서 사영이 한재우와 본인의 위치를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치 자신의 복수를 계획하는 것처럼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사영의 이야기를 하도 곱씹다 보니 그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이입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유준은 쓸데없고 한심한 가정들을 거두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회귀니 뭐니 하는 사영의 허황된 이야기와 거리를 조금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
사영은 유준과 자신의 사진이 뜬 일로 시끄러워진 세상을 덮어 두고 창가에 서서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순식간에 호흡을 타고 안으로 흘러들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좋겠다며 유준이 둘의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을 때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걸 예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 입에 자신과 유준의 이름이 같이 오르내리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한 건 사실이었다.
제 이름이 한재우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언급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욕을 먹든 뭐하든, 사영은 그게 신기해 한참을 말없이 몇 줄의 기사 속에 담긴 ‘김유준과 윤사영’이라는 글자를 보고 또 보았다.
정말로 세상 밖으로 한 걸음씩 나가고 있다는 게 실감 됐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거기에서 오는 반동은 전부 사영이 견뎌야 할 몫이었다. 어차피 지금 사람들이 떠드는 말들은 죽기 전에도 들었던 말들이라 큰 타격은 없었다.
한때, 사람들의 말에 숨이 막혔던 날들이 있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고, 나서서 해명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처지에도 비관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사영을 슬프게 했던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재우의 태도였다.
사영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섣불리 인터뷰에 응하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을 해도 사영이 그런 말들에 상처받는다는 걸 전부 다 알았으면서도 한재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영을 위한 그 어떤 해명도 해 주지 않았고 그저 침묵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소문들을 사실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지만 방관했다.
이미 너무 늦은 때가 되어서야 사영은 사실 한재우가 그저 방관했던 것이 아니라 뒤에서 적극적으로 그 소문을 부추기고 퍼트렸다는 걸 알았다. 너무 늦게 알았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았다면 분명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너무나도 선명한 증거들이 그 자리에 버젓이 존재했는데.
사영은 솔직히 지금도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때는 도대체 얼마나 망가져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불쌍하고 한심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창가에 서 있었을까. 겨울바람이 사영의 체온을 조금씩 떨어트리는 것조차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생각이 깊어지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사영은 어깨를 크게 떨며 놀랐다. 유준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누군가 이 공간의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몸을 숨기고 있던 공간을 침범당한 것처럼 몸이 굳어 잠시간 움직일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결국 사영은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리고 나서야 겨우 몸을 움직여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이미 불쾌해 보이는 표정을 한 유준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사영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온 유준이 이내 사영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뭡니까?”
사영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소리를 못 들었….”
“감기 걸려서 앓아눕기라도 하게요? 오늘 날이 얼마나 추운데.”
“…네?”
“창문을 다 열어 놓고…!”
온갖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거기까지 말한 유준은 문이 활짝 열린 창문을 보고 혀를 한번 쯧, 차고는 걸어가 손수 창문을 닫았다. 사영은 눈을 깜빡거리며 유준의 행동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준이 화가 난 건 바로 문을 열지 않고 현관 앞에 세워 둔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그가 날씨 이야기를 하며 창문을 닫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창문을 닫은 유준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멀뚱한 얼굴의 사영을 보고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사영이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비쩍 말라서 감기라도 한번 걸리면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것처럼 생긴 사람이 이 찬바람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는 짐작도 하기 싫었다. 유준은 더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짧게 젓고는 주제를 돌렸다.
“나갈 준비는 됐습니까?”
“아, 네…. 여기까지 데리러 와 주셔서 고마워요.”
“말했다시피 지금 우리 사이 같은 분위기로는 한재우가 아니라 그 누구도 못 속여요. 그러니까 제발 사람 속 좀 뒤집지 말고.”
“…네.”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로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상대방의 눈에 덜 거슬릴 수 있을까.
이전 삶에서도 끝까지 성공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적당한 대응책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렇게 물었다간 또 유준의 화를 돋울 것만 같아 사영은 얌전히 대답만 했다.
유준의 식사 제안이 특별히 놀랍지는 않았다. 지난번에도 유준은 이 계획을 위해 서로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자연스러워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 연장선으로 생각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사영이 마음에 걸리는 건 따로 있었다. 미리 꺼내 둔 코트를 걸치고 머플러를 둘러매며 사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뭡니까.”
“오늘 같이 나가면… 또 기사가 나게 될까요?”
사영은 습관적으로 손바닥을 코트 위에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