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어쨌든 윤사영은 이 문자를 보내기 위해 고심했을 거다.
유준을 계속 생각하면서. 김유준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면서.
자신이 오늘 온종일 사영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듯이 그 역시 김유준을 떠올리며 복잡한 시간을 보냈겠지.
그걸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나 혼자 이토록 한심한 하루를 보낸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거짓말처럼 불편하던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내용이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는 나중 문제였다.
유준은 배부른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느긋하게 앉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를 보냈더니 대뜸 전화를 거는 자신 때문에 당황할 사영의 얼굴을 상상하자 기분이 한결 더 좋아졌다.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그의 무표정을 부술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 …여보세요?
이윽고 휴대폰 너머로 갑작스러운 연락 때문에 놀란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사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준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내일 뭐 합니까?”
침묵이 흘렀다. 그것조차도 나쁘지 않았다. 사영이 태연하지 않고 무심하지 않은 순간이 유준은 전부 다 마음에 들었다.
“안 들려요?”
메시지 하나에 기분이 다 풀려서 이러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어 유준은 괜히 까칠하게 물음을 덧붙였다. 그제야 너머에서 답이 돌아왔다.
- 아, 들려요. 죄송해요.
“내일 뭐 하냐고요.”
- 내일….
“…….”
- 내일 아무것도 안 하는데….
사영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는 듯 말이다.
사영이 그 대답을 부끄럽게 여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유준은 그 대답마저 흡족했다.
자신이 아니면 딱히 만날 사람이 없는 사영의 사정이 이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게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점심 같이 하죠.”
- 네?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말아요.”
- 아… 네. 죄송해요.
습관적으로 흘러나오는 사과는 여전히 귀에 거슬렸지만 지금은 그것을 하나하나 따지고 싶지 않았다. 대신 유준은 사영에게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반응을 이끌어 내는 법을 알아낸 것에 집중했다.
예상치 못하게, 막무가내로 접근할 때 그는 당황했다.
욕하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할 때는 태연하게 굴다가도 사소한 친절을 베풀거나 지금처럼 꼭 필요한 게 아닌 접근을 할 때면 허둥지둥하며 적절한 이유를 찾기 위해 애썼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한 시까지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 …네. 알겠습니다.
“끊어요.”
그리고 유준은 사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
사영이 과연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자신을 미친놈처럼 여긴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그 엿 같은 태도만 아니면 뭐든 좋았다.
“…….”
그러다가 유준은 문득, 사영의 반응이 전부 어디에서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를 떠올렸다.
욕을 먹고 무시당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건 그런 대접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거고 사영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한재우였을 것이다.
반대로, 친근하게 대하고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는 걸 어려워하며 낯설게 느끼는 것 역시 이전에 그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드물어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윤사영을 대하는 한재우의 태도에서 시작된 일일 테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언제 마음이 들떴냐는 듯 단숨에 기분이 나빠졌다. 윤사영이라는 사람에게 드리워져 있는 한재우의 그림자가 서서히 유준에게도 불쾌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결국 지금 사영이 가진 그 가면을 완전히 다 벗겨 내려면 그에게서 한재우를 완전히 몰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
어느새 유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눈동자가 깊어졌다.
복수에 성공한다면 그때는 정말 지금 사영을 잠식하고 있는 모든 그늘을 거둬 낼 수 있나. 복수를 한다고 해서 정말로 그토록 오랫동안 사영에게 들러붙어 있던 것들이 단번에 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감정은 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준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또다시 윤사영에 대한 상념으로 젖어 들었다.
당신이 가증스럽다고 말하던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상처가 되기는커녕 하나 특별할 게 없는 당연한 말이었을까 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쉬이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
“뭐 하는 새끼야, 이거?”
재우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운전하던 은성이 핸들을 쥔 채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침에 먼저 소식을 접한 은성은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예상해 두었으나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퇴원까지 꼭 김유준이 도와줘야 해?”
재우는 마치 이 일이 은성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재우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는 유준을 구해 준 사영의 퇴원을 김유준 본인이 직접 도왔다는 내용의 기사와 함께 사영을 손수 택시도 아닌 제 차에 태우는 유준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은성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윤사영 씨라는 게 알려지면서 보는 눈이 많아지니까 김유준 배우님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김유준이 문제가 아니라 윤사영 하는 짓이 수상스럽잖아!”
재우는 논지를 제대로 집지 못한 은성의 대답에 오히려 더 짜증이 났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음 하필 유준을 구한 게 사영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다소 찝찝한 면이 있어도 우연이겠지 하고 넘겼는데 막상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을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사영이 누군가에게 바이크를 몰고 유준에게 달려들도록 사주했을 거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하필이면 그 순간, 그 자리에 윤사영이 있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일부러 유준을 따라다니며 스토킹이라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 아침, 그 자리에 우연히 사영이 있었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뭐라도 눈치챈 건가….”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오히려 재우의 신경을 거스를 뿐이라는 걸 알게 된 은성은 대답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이런 때에 괜히 잘못 운전했다간 재우의 모든 짜증을 전부 뒤집어쓸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한재우는 온화하고 모두를 잘 챙겨 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은성은 늘 속이 메스꺼웠다.
“아무래도 이상해….”
은성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재우는 더 이상 은성에게 신경 쓰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뚜렷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아무래도 뭔가가 자꾸만 걸렸다.
재우는 사영에게 김유준에 대한 감정을 말한 적은 없었다. 물론 사영이 상처받을 걸 걱정했던 건 아니고, 그랬다가 사영이 역으로 더 제게 들러붙을까 봐 신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영이 정말로 몰랐을 거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영의 모든 관심은 언제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한재우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재우도 모르는 사이 무언가를 눈치챘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영이 오직 재우에게만 의지하고 집착한 건 한재우가 의도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그건 사영이 선택한 인생이었다. 재우는 그 일에 자신이 어떠한 책임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재우는 사영의 순종적인 면모가 소름 끼치게 싫어졌다.
“…이제 와 질투 작전이라도 쓰겠다는 건지 뭔지.”
중얼거린 재우는 피곤한 듯 다시 좌석에 몸을 깊이 기대며 여전히 휴대폰에 떠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영을 에스코트하는 유준의 태도가 얼마나 정중하고 배려 있는지가 사진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득 사영이 갑자기 순순히 이혼해 준 게 사실은 제 마음을 붙들고 싶어 시작한 쇼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의문스러웠던 부분들이 퍼즐을 맞추듯이 모두 맞춰졌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고 수월했던 이혼은 물론이고, 그토록 한재우에게 집착했던 사람이 이혼과 동시에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고 완전히 재우와 연을 끊어 버린 것과 갑자기 김유준의 근처에 나타난 것까지 말이다.
이혼으로 재우에게 예상 밖의 타격을 주고, 자신의 빈자리에 허전함을 느끼게 하고, 다른 남자에게 접근해 그동안은 인식하지 못했던 질투까지 불러일으켜 재우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그야말로 클리셰 중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였다.
짜증이 가득 서려 있던 재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솔직히 말해 이혼 후에도 계속 구질구질하게 연락해 올 거라고 여겼던 사영에게서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런 의도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윤사영 네가 그럼 그렇지….”
네가 그렇게 쉽게 나를 놔줄 리가 없지.
재우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뭘 하든 뻔히 보이는 사영의 속마음이 지겹고도 우스웠다.
우연인지 뭔지 하필이면 사영이 제 작전에 이용한 상대가 김유준이라는 게 좀 신경 쓰이긴 했으나 그 장단에 놀아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 재우가 신경 쓰는 건 사영이 아니라 김유준 쪽이었다.
재우의 짐작이 맞든 틀리든, 사영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 그는 재우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단 한 조각도 얻어 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재우는 휴대폰 화면을 꺼 버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김유준과 함께 작품에 들어갈 거고 그때가 되면 모든 건 재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테니 그깟 윤사영 따위는 조금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다.
한재우는 어두워진 시야로 떠오르는, 윤사영을 다정하게 부축하는 김유준의 손길 따위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오늘 있을 촬영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