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25화 (25/193)

#025

유준의 문제는, 전부 사영의 탓이라 치부해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유준은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한 것 같은 기분을 좀처럼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주의할게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두 마디의 문장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도대체 유준이 왜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낸 건지. 자신이 왜 갑자기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된 건지 따져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사과부터 내놓는 그 태도가 정말이지 사람을 미쳐 버리게 만들었다.

사영의 목적이 어떻게든 유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는 것이었다면 그 작전은 성공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런 거북스러움도 강렬한 감정이라면 그럴 테니 말이다.

“왜 사과를 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이던 유준이 또다시 참지 못하고 성질을 냈다.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쏟아 내지 않으면 이 답답함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는….”

복수 같은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순한 얼굴을 하고선. 가증스럽게.

유준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대충 던져 놓았던 휴대폰을 쥐고 알림을 확인했다. 액정에는 많은 사람이 보낸 다양한 메시지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지만 그중 사영의 것은 없었다.

여기다 또 사과의 말을 보내 놓았다면 그것대로 열불이 터졌겠지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은 것도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자신이 초대한 손님이, 심지어 앞으로 아주 많은 것을 도와줄 사람이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가 버렸는데 연락 한 통 하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절박한 척해 놓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동정과 연민을 호소하며 매달려 놓고. 그는 여전히 고약한 태도를 다 고치지 못하고 때때로 이렇게 무심한 듯 굴고 있다.

유준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포털 사이트 앱을 열었다. 활성화된 액정에는 유준이 오늘 사영을 만나기 전 보던 화면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검색창에는 ‘윤사영 한재우’라는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축탈출 한재우 축이혼!! 아직도 이혼소식이 감격스럽다 나느뉴ㅠㅠ 진짜 첫눈에 반한 죄로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악연이 드디어 끝났다니 ㅅㅂ 윤40 함께해서 ㅈ같았고 다신 만나지말자ㅗㅗ 내 배우 꽃길만 걸어ㅜㅜㅜㅜㅜ

검색 결과에 같이 노출되는 SNS의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검색 결과들은 어조가 조금 더 유하고 강하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도 한때 신드롬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정도로 사랑받았던 배우가 아닌가. 햇살 같고 봄 같고 꽃 같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이가 지금은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을 수가 있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치밀하게 사람의 이미지를 망쳐 왔으면 이렇게까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준은 불현듯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토록 싱그럽고 사랑스럽던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소문들이 따라붙었을까 의아했을 테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저마다 확신을 가지고 떠들어 댔겠지. 이게 정말 사실이 아니라면 윤사영은 왜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냐면서. 그것이 마치 대단한 추론이라도 되는 양.

유준은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결코 합치될 수 없는 사영에 대한 많은 말들과, 제 눈에 비친 그의 모습과, 그가 했던 말들이 어지럽게 얽혀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유준의 숨을 막았다.

결국 그날 내내 유준은 ‘죄송합니다. 주의할게요.’라고 대답하던 사영의 목소리와 끝까지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는 사영의 고집스러움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다시 말해 유준은 윤사영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아주 짜증스럽게도.

***

사영이 눈을 뜬 건 창밖이 완전 어두워지고 난 후였다.

누운 채로 눈을 깜빡이며 시간을 가늠해 보다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사영은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일어 잠시 머리를 짚고 눈을 감았다.

세계가 아주 빠르게 수축했다가 팽창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 만에 정상으로 돌아온 감각을 살피며 사영은 자신이 오늘 먹은 게 거의 없다는 걸 떠올렸다.

병원에서는 그래도 때마다 식사가 나와서 편했는데 이제 다시 혼자 끼니를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게 느껴졌다.

사영은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재우와 결혼한 후 사영은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등 일상에서 평범하게 하는 경험들에 대한 기쁨을 차근차근 잃어 갔다.

저택처럼 넓은 공간에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가 혼자 다 식어 버린 식사를 하는 경험은 사영에게 음식의 맛을,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래도 부상을 빨리 회복하고 오디션을 문제없이 준비하려면 너무 굶는 건 좋지 않았다. 피골이 상접한,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배우의 얼굴을 제작진이 좋아할 리 없었다.

간단하게 데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좀 사다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영은 다시 현기증이 일지 않도록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유준에 대해 떠올린 건 거실로 나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휴대폰을 발견했을 때였다. 저만치 밀려나 있던 기억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잠시 거실 한복판에 멈춰 서서 휴대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영은 이내 그것을 손에 쥐고 소파에 앉았다.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갔으니 유준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신이 꼴도 보기 싫을 테고, 용건이 생긴다고 한들 먼저 연락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영은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다.

이 관계는 철저히 김유준이 강자인 일방적인 관계였다. 사영이 실제로 잘못했든 그렇지 않든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건 윤사영이었다. 그게 맞았다.

이미 늦어 버린 건 아니겠지. 겨우 얻은 기회를 날려 버린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곧바로 전화해 무작정 사과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가 혹시라도 나를 돕지 않겠다고 이미 마음을 먹었다면 정말 곤란한데.

찰랑거리며 발목을 적시는 불안감 속에 휴대폰에서 유준의 번호를 찾은 사영이 순간 자조적으로 웃었다.

왜 자신은 언제니 이토록 일방적인 관계만을 맺게 되는 걸까. 왜 늘 버림받을까 봐 마음을 졸이는 건 자신의 몫일까.

결국 자기 자신의 무능력함을 다시 한번 곱씹을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사영은 기계적으로 액정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유준은 그답지 않게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운동을 너무 과하게 한 탓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도 운동 강도가 높은 편이었지만 오늘처럼 격렬하게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게 다 윤사영 때문이었다.

윤사영 때문에 불쾌해진 기분이, 윤사영이 연락하지 않는 바람에 도무지 나아지질 않았고, 윤사영을 생각할 때마다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해서 더 이상 그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트레이너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무리해서 강도를 높였다.

그 덕분에 유준에게 남은 건 녹초가 된 몸과 여전히 사영을 생각하고 있는 정신머리였다. 한마디로 제대로 삽질한 셈이었다. 촬영이 전부 끝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촬영 컨디션에도 영향을 끼칠 뻔했다.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던 유준은 한참 만에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원래는 영화를 한 편 정도 보고 자려고 했지만 오늘은 이대로 하루를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 영화를 틀어 봐야 집중도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상념이 있다면 자고 일어나는 것으로 리셋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협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준은 빛살같이 빠른 움직임으로 휴대폰을 낚아챘다. 스스로 채 인식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유도 없이 심장이 뛰었다.

유준에게 연락할 사람은 차고도 넘쳤다. 가깝게는 그의 매니저인 정민이 있고, 꼭 가까운 이가 아니라도 유준에게는 늘 별것 아닌 일로, 별것도 아닌 말을 걸어오며 어떻게든 유준과 연을 이어 가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니까 이 늦은 밤에 온 연락도 높은 확률로 정민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연락일 것임이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유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기대감을 느끼며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윤사영.

가장 첫머리에 보인 이름에 유준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다시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본 후 도착한 메시지의 주인이 윤사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유준은 한 손을 들어 제 입꼬리를 꾹꾹 내리누르며 메시지를 읽었다.

「제가 집으로 초대해 놓고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어떤 것을 실수했는지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알려 주시면 다음부터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정갈하게 적힌 글자들은 구구절절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뿐이었다. 이유도 모르면서 순순히 제 잘못이라고 시인하는 것도 한심했고 이유를 제게 알려 달라고 하는 것도 뻔뻔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메시지를 적어 내려가면서도 감정 하나 읽을 수 없는 무심한 표정이었을 걸 생각하면 여전히 못마땅한 감정이 드는 것도 같았다.

이상한 건, 그런데도 몇 번이나 거듭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어 내려가는 유준의 얼굴엔 어느새 다 그도 깨닫지 못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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