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집에 혼자 앉아서 그는 매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번 생은 오로지 복수 단 하나만이 중요해서. 오직 그것만이 의미가 있어서 집을, 그 자신을 돌보는 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라고 여겼을까.
유준은 초조한 사람처럼 손가락 끝으로 식탁을 톡, 톡 두드렸다. 복수를 위해 삶을 전부 내던진 것 같은 사영의 태도가 거슬리고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 못마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정신 나간 사람과는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인데 어쩌자고 자신은 그와 관계를 이어 가는 것도 모자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여기…. 원두가 한 종류밖에 없어서 그냥 내리긴 했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그사이 사영은 커피가 담긴 두 개의 잔 중에 얼음이 든 쪽을 먼저 들고 와 유준의 앞에 내려놓았다. 목발을 짚고 있었기에 두 개를 다 들고 올 수 없었다.
사영의 잔에서는 김이 났다. 그가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잔에 담긴 뜨거운 커피가 아슬아슬하게 찰랑였다. 그 광경도 유준은 거북스럽기 그지없었다.
도와 달라는 말 한마디면 되는 일이다. 커피 잔을 대신 옮겨 주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영은 고집스럽게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유준에게 한 마디 부탁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유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위태위태한 그의 움직임을 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이조차도 계획된 일인지 몰랐다. 유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키며 그를 경계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자신을 유혹하려 한다면 지금이 그 타이밍일 것 같았다.
그는 일부러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는 것으로 유준의 주의를 살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유준의 품에 안겨들 수 있었으며, 실수인 척, 원래 조절에 능숙하지 못한 척 페로몬을 흘릴 수도 있다.
알파, 오메가를 막론하고 그런 고전적이고도 유치한 방식을 쓰는 사람은 요즘 같은 시대에도 많았다.
유준은 대비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러트가 오지 않는 이상 타인의 페로몬에 쉽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사영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
그러나 뜨거운 커피 잔을 식탁 위에 무사히 올려놓고 의자에 힘겹게 앉는 순간까지 사영은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 발을 헛디뎌 가련하게 쓰러지거나 커피가 넘쳐 손을 데였다며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유준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하려는 거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시 의심을 더해 가던 유준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만약 사영이 지금 이 집에서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 마음먹었다면 이 커피에 뭔가를 탔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든 탓이다.
알파나 오메가의 이성과 자제력을 흐리게 하고 강제로 러트, 혹은 히트사이클을 끌어내는 약물은 이미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을 만큼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약물 중에는 복용한 지 한 시간만 지나도 검출이 힘든 종류도 있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영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유준이 자신을 안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패다.
껄끄러운 기분으로 입 안에 남은 커피 맛을 가늠하던 유준에게 사영이 물었다.
“…별로 입에 맞지 않나요?”
그렇게 묻는 눈동자에는 정말이지 한 치의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유준은 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모든 모순적인 감각들이 짜증스러워졌다.
지난밤 작품 속에서 보았던 생기 가득한 그 시절의 윤사영과 버석하게 마르고 야윈 지금의 윤사영,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욕망도 없어 보이는 윤사영과 복수를 위해 다른 모든 기회를 버리는 윤사영.
그 일관적이지 않은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얽혀 유준의 기분을 자꾸만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그…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
“여러 가지로… 제 말을 들어 주셔서요.”
그리고 무엇보다 유준을 가장 짜증스럽게 만드는 건 유준의 예상과는 다르게 어떠한 노골적인 몸짓도 없이 천진해 보이는 얼굴로 제게 감사 인사 따위를 하는 사영의 모습이었다.
유준은 들고 있던 잔을 신경질적으로 탁, 내려놓고 사영에게 말했다.
“윤사영 씨.”
“…네?”
갑작스러운 유준의 태도에 당황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영의 반응도 불쾌하긴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닳고 닳은 사람처럼 굴면 그러려니 했을 테다. 악의로 똘똘 뭉쳐 있거나, 유준을 제대로 이용하려 혈안이 되어 되도 않는 유혹이라도 해 왔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기분 나빴을 것 같았다.
“착하고 순진한 척하는 그런 거, 하지 말죠.”
사영이 멍한 표정으로 유준을 바라보았다. 바로 저런 점도 유준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 일에 엮인 사람 중 가장 음침한 목적을 가진 건 윤사영이다. 또한 사영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들 중 가장 쓰레기 같은 사람은 한재우였다.
그런데도 그를 보고 있으면 유준은 마치 그에게 까칠하게 구는 자신이 그 중 가장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벗어 버릴 수가 없었다.
유준은 그 원인이 어느 정도는 윤사영의 저 얼굴과 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치밀하게 복수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왜 자꾸 가련한 척을 해. 그런 거 너무 가증스럽잖아요.”
비단 오늘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 병원에서 사영의 얘기를 들었던 순간부터 유준은 줄곧 그런 생각을 해 왔다.
그는 길가의 한 떨기 들꽃처럼 굴었다.
누가 보아도 품에 안아 지켜 주고 싶은 분위기에는 사영의 외형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겠지만 유준은 그가 말하는 방식이나 태도 역시 그 못지않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연인 사이를 연기해 주겠다는 상대를 집으로 끌어들여 놓고 페로몬을 흘려 대는 대신 처연한 얼굴로 고맙다는 말이나 하는 그런 태도 말이다.
“…….”
사영은 잠시 말이 없이 유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준은 이번에야말로 그가 정말로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만약 화를 낸다면 지금 느끼는 이 찝찝하고도 더러운 기분이 조금쯤은 풀릴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한참 만에 벌어진 사영의 입에서는 기대했던 말 대신 막연히 예상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
“주의할게요.”
도대체 뭘 주의한다는 건지.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건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순종적인 저 태도는, 한재우가 오랫동안 그를 통제하고 제 기분에 따라 휘두른 결과인 건지 뭔지.
“아, 진짜 짜증 나네.”
“…….”
“됐습니다.”
결국 총체적으로 모든 것에 기분이 나빠진 유준은 튀어나오는 감정을 멋대로 내뱉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인사도 없이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자신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는지, 비참한 얼굴을 했는지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으므로.
유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소름 끼치는 그 집을 빠져나왔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지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서 유준은 그것을 전부 윤사영의 탓이라 여기기로 했다.
***
“…….”
순식간에 유준이 사라져 버린 공간에 사영은 잠시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솔직히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언가 실수를 했나? 사영은 유준과 함께 집에 들어온 이후 자신이 했던 행동을 차분하게 복기해 보았다.
사영은 커피를 내려 대접한 것 외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고, 말 역시 몇 마디 하지도 않았다. 사영이 뱉은 말이라고는 차가운 커피를 원하냐는 물음과 고맙다는 인사가 전부였다.
사영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앞자리의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특별히 그를 화나게 할 만한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가 화를 낸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유준은 그냥, 그냥 윤사영이 싫은 것이다.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싫고 짜증스러운 게 분명했다. 그러니 고맙다는 평범한 인사의 말 한마디조차 그토록 못마땅했으리라.
‘그냥 네가 싫어. 네 얼굴을 보는 거 자체가 짜증 난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
익숙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울렸다. 유준이 아닌 한재우의 목소리였지만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유준이 사영에게 느끼는 감정은 재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고,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해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테니 말이다.
답답하고, 한심하고, 좋게 봐 줄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인간.
사영은 이제 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었다. 다만 오늘의 일로 유준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하길 바랄 뿐.
‘제가 원래 다른 사람의 일에 오지랖을 부리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한마디만 하죠.’
그날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유준이 했던 말이 바람처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죽기 전의 유준은 사영을 가까이서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말에 특별한 의미를 두어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문득 한 번씩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준의 향한 작은 믿음의 근원이 되었던 말을 혼자 속으로 삼킨 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난 사영은 잔 두 개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커피를 전부 버리고 거실로 나왔다.
몸과 마음이 모두 너무 피곤해서 조금 쉬고 싶었다.
휑하게 비어 있는 거실을 건조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던 사영은 이내 몸을 돌려 이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을 향해 걸었다. 거기가 바로 사영의 침실이었다.
사영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애틋하게 여기며 소중히 간직해 왔던 ‘우리 집’이 있었다.
복수를 꿈꾸고 있으면서도 사랑했던 기억은 끈질기고, 상실은 여전히 마음 아파서.
사영은 지금까지 제대로 마음을 붙이지 못한 집의 넓은 공간을 전부 내버려 두고 가장 작은 방에 마련해 둔 작은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이 순간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꾸는 꿈이 아니길 바라며, 사영은 천천히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