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그 순간 유준은 그가 말한, 한겨울의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비참했고, 아팠으며, 고독했고,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넝마처럼 만신창이가 된 몸은 작은 몸부림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명도, 발버둥도 없이 남자는 다만 자신의 피 위로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며 죽었을 것이다. 그 죽음은 너무나도 고요하여 누군가의 기억조차 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준의 시선이 바닥을 보는 사영의 얼굴 위를 더듬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고요함은, 태연한 것처럼 보이는 그 모든 숨과, 눈빛과 말투와 행동 그 모든 것은. 사실은 그의 죽음과 닮아 있는 그런 간절함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기분이 몇 배는 더 더러워졌다. 유준은 괜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으려 재빨리 감정을 털어 냈다.
그는 사영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서서는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가 오늘 온 이유는….”
다행히 사영은 유준이 꺼낸 말에 바로 호응하며 고개를 들었다.
“당신 말대로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더 이상 나랑 무관한 일들이 아닐 테니까… 어쨌든 나도 당신에 대해 좀 더 알기는 해야 하잖아요.”
“아….”
“한재우가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겠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당신이랑 몇 년을 함께 산 사이고… 아무리 연기라지만 지금처럼 서로 불편해서야 제대로 손발이 맞겠습니까?”
한재우의 이름을 그와 묶어서 말하는 것에 망설임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준은 의식적으로 그 망설임을 무시했다.
어차피 그가 자처한 상황이고, 이런 말들에 흔들릴 정신 상태면 복수고 뭐고 지금 그만두는 것이 나았다. 다행인지 무언지, 사영은 별다른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 사람은 저를 잘 아니까요.”
‘그 사람’이라는 애매한 호칭이 유준의 귓가에 걸렸다. 그 세 음절에 담긴 감정의 크기가 어떠할지 유준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게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아 유준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이왕이면 제대로 판을 키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고.”
그 말을 하는 유준은 병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누구라도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 배우라고 꼽을 수밖에 없을 만큼 자신만만하고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사영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같은 기사라도 사진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주목도에서 차이가 크죠.”
“아….”
짧은 설명 뒤에야 사영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듣곤 탄성을 터트렸다. 기꺼이 사진을 제공해서 이슈를 더욱 키우겠다는 뜻이었다. 유준이 도와주겠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움을 간청하는 입장답게 조금 더 간절하고 절박하게 매달리라고 경고하던 유준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사영은 침대에 앉은 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다만 그 인사에 유준이 얼마나 기분 더러운 얼굴을 했는지, 고개를 숙인 사영은 미처 보지 못했다.
***
사영은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겨울의 풍경을 물끄러미 보려니 문득 자신이 지금 어느 시간의 선을 달리고 있는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사영의 기억은 아직도 죽음에 머물러 있는데, 정작 그 기억을 가진 사영은 여전히 숨을 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 괴리감의 무게는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은 짐작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도심 한복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던 창밖의 풍경은 어느새 한적해져 있었다.
의식적으로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지 않으려 애쓰며, 사영은 고개를 살짝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 중인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영은 지금 유준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택시 타고 혼자 가면 된다고 말한 사영을 굳이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한 건 유준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유준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때 늘 그런 태도로 임해 왔고 이번 일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어차피 위험을 감수하고 내린 선택이라면 최대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유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영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때와 어울리지 않는 걸 알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외형이었다.
한재우는 그의 어떤 점이 좋았을까. 사영은 그가 얌전하고, 순종적이며, 조용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사이가 틀어지고 나서는 대놓고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대들지 말라고 강요하던 날도 여럿이었다.
그래서 사영은 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의 마음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몸을 낮추고, 얌전히 굴었다. 그래야만 동정이나 연민을 받아서라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김유준은 어떻게 보아도 순종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절대로 타인에게 종속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한재우의 취향은 저런 타입이었는데 단지 사영의 마음을 얻어 내고 굴복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사영과 지내는 동안 취향이 변하게 된 것인지 짐작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집은 일부러 외곽에다 산 겁니까?”
사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태 말이 없던 유준이 별로 크게 궁금하진 않다는 말투로 물었다. 사영은 사념의 마법에서 막 풀려난 사람처럼 숨을 짧게 들이켜고는 곧 그를 본 적도 없는 척 앞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그냥 조용한 곳에 혼자 있고 싶어서요.”
“…….”
“이혼한 게 알려지고 나면 분명 시끄러워질 테니까… 될 수 있으면 사람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고 싶었거든요.”
사영은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그다지 크진 않지만 마당이 딸린 전원주택을 샀다. 그곳은 완벽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사영이 유리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유준은 그 말에 굳이 대답을 더하지 않았다. 기억해 두려고 신경을 썼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사영을 향한 안 좋은 말들이 지워지지도 않고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정작 사영은 이런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얼음 같은 얼굴 뒤에 진짜 어떤 감정이 숨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은 아팠을까. 사람이 없는 곳으로 숨어들고 싶었을 만큼 그 모든 것들이 버거웠을까.
아니면 무던해졌나. 죽기 전에도 이미 너무 많은 말들에 시달려서, 그래서 이 정도는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 깊어지는 걸 막으려 유준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다시 회사에 들어갈 생각입니까?”
“네?”
다행인지 무언지, 사영 역시 곧바로 유준의 주제에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사영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고 싶었다고 대답하면서도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란히 앞을 보고 앉아 있는 통에 그의 표정을 제대로 살필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끼며 유준이 말했다.
“다시 복귀하려는 거 아니에요?”
“으음… 그렇죠. 복귀이기는 하죠.”
“회사 없이 혼자 활동하려고요?”
유준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작품 계약을 진행하고 연기자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선 기본적인 도움들이 필요하단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사영의 개인적인 사정을 감안한다면 회사는 꼭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크고 힘 있는 회사가.
다시 말해 사영에게는 비호의적인 언론을 상대할 보호막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사영은 남의 일인 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꼭 혼자 하겠다고 계획한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랑 계약해 주겠다고 하는 회사가 있을까요?”
그 순간 유준은 사영의 무심함이 바닥난 자존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서 태연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는 삶과 그 자신에게 어떠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윤사영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만한 가치나 매력이 없는 사람이니까. 복수조차도 자기 힘으로는 할 수가 없어서 유준의 동정과 연민에 호소해야만 가능한 무능력한 존재니까.
한재우가 윤사영에게 심어 놓은 저주 같은 모욕의 말이 한 번의 삶을 죽고 다시 사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영에게 뿌리내려 피어 있음이 분명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영은 단지 한번 죽었다 되돌아 와 삶의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 먹은 것이지 치료를 받은 게 아니다. 기억 역시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사영의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병이 사라졌을 리 만무했다.
“그럼 오디션에 참여하기도 힘들 텐데….”
유준은 떠오르는 상념들을 뒤로 하고 무감각한 태도를 고수하며 입을 열었다. 그가 여전히 자기를 무가치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다고 한들 그건 유준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사영은 유준의 걱정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행히 예전에 있던 회사 대표님이 오디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
“예전에 몇 번… 복귀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 주셨던 적이 있는데 그땐 거절해 놓고 뻔뻔하게 다시 연락드렸죠. 한 번만 도와 달라고.”
핸들을 쥔 유준의 손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사영이 그 회사 대표라는 사람에게는 과연 어떠한 태도로 도움을 요청했을지 궁금했다. 유준에게 보였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까. 예전에 함께 일을 해 보았다고 하니 그보다 조금 더 친근하게 말을 붙였을까.
“…그 대표라는 사람한테도 설마 다 말했습니까?”
자신에게 털어놓았던 시간을 되돌아 왔느니 무어니 하는 미친 소리를. 특별하게 당신에게도 고백한다는 듯이 뱉어 내던 그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그 사람에게도 들려줬을까.
유준의 물음에 사영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유준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