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주차장에 차를 댄 유준은 시동도 끄지 않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공에 말을 내뱉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몇 번째, 유준은 같은 말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같이 영화를 찍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헛웃음이 날 만큼 기가 막혔다. 이런 계획을 세우다니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연기에서 손을 놓은 지 한참이나 지났다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한재우와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와 같은 영화에 출연하겠다니.
안 그래도 온갖 곳에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 마당에 이건 숫제 짚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겠다는 소리가 아니냔 말이다.
유준은 핸들을 쥔 손에 여전히 힘을 주고 생각에 잠겼다. 사영의 상황을 고려해 보자면 이해 못할 선택은 아니긴 했다.
그는 한재우에게 복수하길 원했고, 그 복수에 유준을 이용하려 한다. 그렇다면 한재우와 김유준 두 사람이 함께 연기를 하게 될 이번 작품에 참여하는 것만큼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진짜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새끼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한번 한재우라는 존재에 대한 감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면 볼수록 소름 끼치고 기분 나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사영과 이혼까지 했으니 대놓고 자신에게 집적거려 보겠다는 심산인 모양이다.
하필이면 그런 놈이 기대하던 작품에 묻은 것도 짜증 나는데 그 탓에 이제는 윤사영까지 끼어들게 생겼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또 없다.
“어떻게 배역을 딴다는 건지.”
한숨을 내쉰 유준은 그제야 시동을 끄고 또 한 번 중얼거렸다. 병실을 나서기 직전 멈춰 서서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 한번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한테 청탁이라도 넣으려는 생각이라면 그만둬요. 그딴 짓 딱 질색이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준은 단호한 태도로 선을 그었다.
그가 사영을 추천하면 당연히 일은 훨씬 더 수월해지겠지만 유준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평소 유준이 혐오하는 행태이기도 했지만 사영에게 그 정도로 신경을 써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네. 그런 부탁까지 드릴 만큼 염치없진 않아요. 역은 제가 어떻게 해서든 딸 테니까… 혹시 유준 씨의 의견을 물어 온다면 거부하지만 말아 주세요.’
그리고 사영은 돕지 않겠다는 유준의 말에도 달리 초조한 기색이 없이 그렇게 대답을 해 왔다.
사실은 연기를 그리워하고 있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연기에는 달리 애정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리워했던 게 아니었을까. 떠나 있는 동안 내도록 연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그보다도 한재우를 더 사랑해서, 자기 자신보다 그를 더 아껴서, 그래서 다만 참아 내고 있었던 걸까.
유준에게는 무의미한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사영에 대한 유준의 판단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속마음이 어쨌든 간에 그는 다른 목표를 위해 연기를 뒤로 미뤘고, 어떤 미사여구를 덧붙여도 결국 사영에게 연기란 그만큼의 의미밖에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준으로서는 이해하지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단우’의 이름을 말하던 사영의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그렇게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매달린 단 하나의 존재로부터 배신당한다는 게 어떠한 기분인지. 그렇게 세상과 철저히 유리된 시간을 홀로 버틴다는 게 어떠한 고통일지.
제아무리 다양한 역할을 제 것처럼 소화해 낸 유준이라고 해도 그 감정을 현실처럼 느낄 수는 없어서. 그래서.
“…….”
유준은 더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차에서 내렸다. 어찌 되었든 그건 과거 윤사영의 선택이고 그가 자초한 일이다. 어쩌면 동정조차도 그에게는 아까운 것인지도 몰랐다.
***
“네, 형. 무슨 일이세요?”
오랜만에 맞이한 휴가를 침대 위에서 만끽하던 정민은 갑자기 울린 휴대폰 전화의 발신자를 보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전화를 받았다.
쉬는 날에는 웬만해선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 전화까지 할 정도면 급하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해 높은 확률로 정민의 휴가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으로 대충 씻고 옷 입고 유준의 집까지 튀어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를 계산하며 침대 아래로 막 발을 내디딘 정민을 향해 유준이 입을 열었다.
- 어, 정민아. 쉬는데 미안하다.
“아니에요, 형. 지금 갈까요?”
- 아니, 아니야. 오라는 게 아니고 뭐 좀 물어 볼 게 있어서 전화한 거야.
정민은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고 침대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휴가를 사수했다는 기쁨과 유준에게 큰일이 생긴 게 아니라는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 네. 무슨 일인데요?”
- 다른 게 아니라 나 다음에 들어갈 영화 말이야….
“다음에? <하지>요?”
- 응, 그거. 그거 서단우 역할 오디션으로 뽑는다고 했었지?
“서단우? 아! 네, 맞아요.”
대답하며 정민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꺼내기엔 다소 뜬금없는 주제였고, 심지어 휴가 중인 정민에게 당장 전화를 걸면서까지 물어볼 만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애매한 불안감을 느끼며 ‘그건 왜요?’하고 묻는 정민에게 유준이 말했다.
- 그거 오디션이 언제인지 정해졌다고 했나?
“아니요. 아직 정확한 날짜가 정해진 건 아닌데 다음 달에 진행할 것 같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 으음….
휴대폰 너머로 침음과 함께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정민은 그제야 너머의 공기가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형 근데… 밖이세요?”
- 어? 아… 잠깐 나왔다가 지금 올라가는 중이야.
“이 아침부터 어딜….”
- 그냥 잠깐… 아무튼 그보다….
정민은 순간 유준이 말을 돌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따져 물을 타이밍을 놓쳤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 오디션 진행할 때, 혹시 나도 참관할 수 있는지 한번 알아봐 줘.
“네? 형이요?”
정민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우며 되물었다.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었으나 곧 ‘응.’ 하고 대답하는 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듣고서도 정민은 쉽게 믿기지가 않아 다시 물었다.
“서단우 캐스팅에… 신경 쓰시려고요?”
- 그냥 보기만 하겠다는 거야.
유준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정민은 여전히 그의 말이 낯설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민이 그동안 보아 왔던 유준은 배우가 감독과 작가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연기에 관해서는 촬영장에서든 어디든 거침없이 의견을 제시했지만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관여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특히나 캐스팅에 관한 부분은 언제나 감독 고유의 권한이라고 한발 물러나곤 했다.
그런 유준이 갑자기 캐스팅 오디션에 참여하겠다니. 아무리 단순 참관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성격을 아는 정민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확인하고 알려 드릴게요.”
- 응. 급한 건 아니니까 쉬는 건 제대로 쉬고 나서 해 주면 돼.
“그럴게요, 형. 그럼 쉬세요.”
- 그래. 너도 쉬어라.
정민은 허공을 향해 습관적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하곤 전화를 끊었다. 유준과 통화를 시작할 때 이미 잠은 다 깼건만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처럼 어딘가 정신이 멍했다.
정민의 시선이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 액정으로 향했다.
“급하지 않다면서 지금 전화를 하는 건 또 뭐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뭐 하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아침이었다.
***
“그… 괜찮으세요?”
깨진 액정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사영을 향해 아까부터 눈치를 보던 간병인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간병인은 염려와 호기심을 적절하게 섞은 솔직한 얼굴로 사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괜찮아요.”
“아휴, 하여간에 기자들은 뭘 이런 것까지 구구절절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니 기레기 소리를 듣지.”
사영은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저를 위로하려 애쓰는 간병인에게 살짝 웃어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포털 사이트의 연예 뉴스란이 떠 있는 액정으로 향했다.
오늘 드디어, 김유준을 구하고 대신 다친 인물이 사실은 일반인이 아니라 윤사영이었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사영은 글자들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제 이름 앞에 붙은 많은 수식어를 볼 수 있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배우. 한재우의 전남편. 한물간 스타. 무명이었던 한재우를 신데렐라로 만든 존재. 질투 때문에 한재우를 악독하게 괴롭히던 사람. 부정한.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이혼한.
한재우에게는 너무나도 부족했던 사람.
많은 단어가 사영의 눈동자에 맺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간간이 사영을 좋은 의미로 추억하거나, 아마도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정이 있을 거라고 두둔하는 말들도 있긴 했지만 대다수 기사 논조와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은 정확히 한재우가 의도한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