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7화 (17/193)

#017

놀랍게도, 진심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적어도 유준이 느끼기엔 그랬다.

어제 유준이 좆같은 태도는 그만두고 제대로 빌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들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하지만 그런 사영의 태도보다 더 짜증 나는 건, 진실성 하나 느껴지지 않은 그 말로 인해 멋대로 머릿속에 가득 찬 상상이었다.

유순한 얼굴과 가녀린 몸을 하고 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울고 애원하는 사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어제 윤사영의 얼굴을 한 드라마 캐릭터가 어느 여자 주인공에게 울며 매달리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았던 탓에 상상은 지나치게 선명하고 구체적이었다.

유준은 제 발밑에 꿇어앉아 나를 받아 달라고 간청하는 사영에 대한 상상을 지우려 애썼다. 다행히 뻔뻔한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사영의 실제 모습이 참으로 짜증스러워서, 심상이 더 깊어지고 적나라해지기 전에 끊어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엇이 죄송한지도 모르고, 사영은 유준이 기분 나쁜 티를 내자 곧바로 사과를 해 왔다. 짜증 나니까 말뿐인 그딴 사과는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유준이 다른 말을 뱉었다.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나 좀 들어보죠.”

“네….”

“우선, 윤사영 씨가 날 구했고 내 주재로 병원에서 머물고 있다는 건 알려져도 상관없습니까?”

사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답이 쉽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원치 않는다고 해도 결국엔 밝혀질 사실이지만, 이 일을 어떤 식으로 공개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사영이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가 결정된다.

이대로 물러설 거라면. 막상 한재우를 상대로 복수하려고 하니 겁이 나서든, 귀찮아서든, 내 인생이 아깝게 느껴져서든 아무튼 여기서 멈출 거라면 이 일을 그냥 우연이 겹친, 하나의 사소한 해프닝으로 넘기면 될 일이다.

만약 정말로 김유준까지 끌어들이는 요란한 복수를 강행할 거라면 이것은 한재우를 향한 경고의 첫머리가 될 터였다. 한번 적으면 지울 수 없는 종이에 펜을 대는 일이고, 다시 붙일 수 없는 유리병을 깨는 일이다.

그래서 유준은 기꺼이 사영에게 충분한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사영이 여기서 그냥 포기하고 물러서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결말이다.

그렇게 되면 유준 역시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 없이 이대로 돌아서서 전에 그랬던 것처럼 윤사영이라는 존재를 인생에서 지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사영이 대답했다.

“네, 상관없어요.”

“…….”

“이왕이면… 크고 요란하게 알려질수록 좋아요.”

사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더 격렬하게 나아가길 원했다. 유준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왠지 모르게 손끝이 저려 온 탓이다.

“그다음에는?”

유준이 곧바로 홀린 듯 물었다. 이렇게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는 걸 보니 구체적인 계획이 없을 리가 없었다.

과연 그가 세운 계획은 어떤 것일까. 삶과 죽음을 걸고 만들어 낸 길은 어떤 모양일까.

그리고 자신은 그 안에서 정확히 어떠한 역할을 맡아 어떤 연기를 하게 될까.

마치 새로운 작품을, 아주 실험적인, 그래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마주한 것처럼 유준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사영이 입을 열었다.

“하지(夏至).”

“…….”

“김유준 씨의 차기작이죠.”

유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 <하지>에 유준이 캐스팅됐단 소식은 지금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였다. 후에 주인공 역을 김유준이 맡는다는 깜짝 공개를 홍보의 메인 수단으로 삼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대외비라 하더라도 정말로 완벽하게 비밀이 지켜질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수년간 연예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던 윤사영 같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아낼 만큼 보안이 허술하진 않았다.

유준의 회사 사람 중에서도 공식적으로 이 사실을 아는 건 대표와 유준의 매니저 단둘뿐이었다.

윤사영이 미래로부터 되돌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믿지 않았기에 궁금하지도 않았던 미래가 불쑥 유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유준은 이번 작품에 유독 애정이 컸다. 존경하는 감독과 작가의 작품이고, 첫 사극 도전이었다.

사소하게는 유준이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말도 안 되는 흠집을 잡아 대는 이들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기도 했다.

성공했을까. 나는 이 작품으로 한층 더 성장했을까. 더 높은 자리에 올랐을까.

유준은 스스로 떳떳한 연기만 한다면 성적이나 대중의 평가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외골수는 절대로 아니었다. 유준은 그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드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 작품으로 좋은 성적을 얻어 내는 것까지도 중요하게 여겼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큰 명예를 얻으며, 더 많은 팬의 지지를 받는 것 역시 하나도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고, 그런 것들을 하찮거나 천박한 욕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유준은 연기로서 자신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길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준은 이번 작품이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어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결과가 어떠할지 궁금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

“…네. 맞습니다.”

유준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려다 말고 순순히 대답했다. 어차피 사영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구태여 물어 시간을 거듭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유준은 눈빛으로 ‘그래서?’하고 다음을 물었다. 사영은 습관처럼 느리게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입을 열었다.

“유준 씨가 맡은 ‘강무준’이라는 캐릭터의 라이벌인 ‘강무성’역에… 한재우가 캐스팅될 거예요.”

“…뭐?”

“어쩌면 유준 씨처럼 이미 비밀리에 확정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요.”

“무슨 개소리를…!”

유준은 순간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다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렸다. 전신에 열이 확 오르면서 빠르게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준은 분명 ‘강무성’ 역에 작가가 미리 염두에 둔 배우가 있다고 들었다. 그 배우가 누구인지도 알았다.

유준이 이 작품을 선택한 데에 영화에서 주인공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상대 배우에 대한 만족도 역시 한몫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 배우는 한재우가 아니었다.

“분명 이민규를 캐스팅할 거라고 했는데….”

유준은 미심쩍은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사영을 보며 말했다. 사영은 별다른 해명 없이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어째서 그 행동이 어떠한 설명이나 증거보다도 더 그의 말을 신뢰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후…. 그렇군요.”

유준은 한참 만에 사영의 말을 받아들였다. 한재우에 대한 자신의 불호를 배제한다면 나쁜 선택은 아니다. 연기력은 인정받지만 대중성이 떨어지는 이민규보다야 제작자 입장에선 더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한재우라는 인간 자체는 불쾌해도 그가 좋은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진 인기 역시 득이 되면 됐지, 실이 되진 않을 것이다.

만약 사영에게서 이 얘기를 먼저 듣지 못한 채 후에 이 소식을 맞닥뜨리게 되었다면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애써 장난스러운 태도로 미래의 자신에게 애도를 보낸 유준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요?”

기가 막히게 판이 짜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사영이 한재우에게 복수하기를 결정하고, 그 도구로 김유준을 이용하게 되었는데, 마침 두 사람이 같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환경이 어디 있겠느냔 말이다.

그래서 유준은 더더욱 궁금해졌다. 이렇게 근사하게 마련된 판에서 사영은 과연, 스스로 어떤 역할을 자처할지.

소리 없이 차오르는 유준의 기대감을 앞에 두고 사영이 말했다.

“그 영화에 ‘서단우’라는 역이 있는 걸로 알아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준은 숨을 참았다. ‘서단우’라면 영화 하지에서 강무성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역할로 주인공인 ‘강무준’과 그의 라이벌 ‘강무성’ 두 사람의 연정을 한 몸에 받으며 사건을 더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만드는 존재였다.

“설마….”

유준은 신음하듯 말을 꺼냈고 사영은 길가의 한 떨기 연약한 들꽃처럼 웃었다.

“네. 제가 그 역을 맡을 거예요.”

***

죽음으로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이전의 삶을 ‘지난 생’이라 표현할 수 있다면.

사영은 이른바 그 ‘지난 생’에서 영화 <하지>를 보았을 때 느낀 강렬한 충격을 아마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영화 속 ‘서단우’라는 캐릭터를 마주했던 그 순간의 파동을 말이다.

자신의 삶에서 연기보다 더 큰 가치를 가졌다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잠시 내려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연기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건 결코 아니었다.

재우가 조금 더 자리 잡고, 더 이상 자신 때문에 자존심이 다치지 않는 때가 오면 언제든 다시 연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이미 무수히 많은 기회가 지나갔을 거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었으며, 어쩌면 다시 시작하는 것조차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사영은 그날이 머지않아 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우와의 관계는 나아지기는커녕 결혼 생활이 지속될수록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영은 점차 한재우를 제외한 다른 욕망을 전부 거세해 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영화 <하지>는 사영에게 유달리 두려운 작품이었다.

한재우가 김유준과 함께 연기하고 싶어서 이 작품을 선택했다는 인터뷰를 공공연하게 할 때마다 사영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손톱을 뜯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인간의 감각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때는 아직 재우가 유준에게 어떠한 사심을 가졌는지 정확하게 모를 때였는데도 사영은 재우의 입에서 나오는 수많은 배우 중 유독 김유준의 이름에만 마음이 불안했으니 말이다.

이전까지는 재우의 모든 작품을 모니터링했던 사영은 드물게 그 영화만큼은 제 눈으로 보는 것을 망설이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그 영화에서 사영은 서단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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