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괜찮으세요?”
아침 식사를 앞에 놓고도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사영을 향해 간병인이 물었다. 그제야 오래된 꿈에서 깨어난 듯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온 사영이 말없이 간병인을 돌아보았다. 간병인이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아… 괜찮아요.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봐요.”
사영의 대답에 간병인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사영은 순간 눈앞의 간병인이 한재우가 자신의 이름에 뿌린 더러운 추문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서둘러 머릿속에서 그것을 지워 버렸다.
그가 속으로 자신을 가식적이고 추잡한 인물이라고 여긴다고 한들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사영에게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여전히 걱정 어린 표정을 한 채로 간병인이 말을 이었다.
“입맛이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조금 드셔 보세요. 그래야 이따가 치료도 받으시죠.”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사영은 무감하게 대답하며 숟가락을 드는 시늉을 했다. 그의 염려가 고맙기보다는 솔직히 조금 불편했다.
사영은 혹시나 재우가 영악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할까 봐 늘 아파도 꾹꾹 참기만 했다. 타인이 자신을 걱정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간병인이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테이블을 정리하는 걸 확인한 사영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으로 국그릇을 뒤적거렸다. 입 안이 쓰고 껄끄러워 도무지 무언가를 넣고 싶지 않았다.
늦은 새벽까지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을 때 사영은 꿈을 꾸었다. 오래전의 일이자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날들의 기억이 담긴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사영은 모진 폭언을 들으며 죄책감에 잠식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타자가 되어 버린 주제에 그때 자신이 어떠한 생각들을 했는지 너무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어서 눈을 뜨는 그 순간까지 숨이 막혔다. 겨우 잠든 두어 시간 동안 내도록 과거의 기억을 오가기만 했으니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간병인의 말대로 뭐라도 먹지 않으면 온종일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만 있을 게 뻔했다.
그렇게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시간이었기에 단 몇 숟갈이라도 뜨기 위해 사영이 먼저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을 때.
“안녕하세요!”
저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간병인이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제법 매너 있는 태도로 간병인의 인사를 받아준 이는 언제 왔는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김유준이었다.
어제 늦게 집에 돌아갔는데, 이렇게 다시 이른 아침부터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사영은 다소 놀란 얼굴로 묵례를 했다. 유준은 인사는커녕 마주 고갯짓하는 일조차 하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으로 간병인을 보며 말했다.
“잠깐 윤사영 씨랑 할 말이 있어서….”
“아, 네! 그럼 저는 잠깐 나가 있을 테니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간병인은 사영이 아닌 김유준에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를 고용한 사람은 사영이 아닌 유준이었으니 그가 유준의 말에 따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간병인은 요란스럽지 않으면서도 재빠르게 밖으로 나갔고 병실 안에는 금세 유준과 사영, 단둘이 남았다.
그제야 유준은 사영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식사하는 데 방해했네요, 제가.”
의외로 친근한 태도였다. 지난밤 짧게 감돌았던 살벌한 분위기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면에 숨겨진 의도가 무엇일지 파악하려 애쓰며 사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다 먹고 치우려는 참이었….”
자연스럽게 숟가락을 내려놓고 트레이를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으려던 사영의 손에서 트레이를 빼앗아 든 건 어느새 다가온 유준이었다. ‘아….’ 하고 입을 벌린 채 유준이 트레이를 저만치 먼 테이블 위에 옮겨놓는 걸 멍하니 보고 있던 사영이 이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유준은 선선히 고개를 숙이는 사영의 인사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영이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건 굳이 그릇을 유심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이 이른 아침부터 여기에 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죽겠는데 빌빌거리며 밥도 제대로 먹지 않은 꼴을 보자니 또 배알이 뒤틀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어요?”
사영이 굳이 그 사실을 짚어 묻자 짜증이 한층 더 깊어졌다. 이래저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유준은 환자가 식사를 이렇게 걸러도 되느냐고 묻는 대신 말없이 고개를 돌려 사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보던 사영이 천천히 이불을 걷더니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유준이 서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오려는 것 같았다.
“…왜 내려와?”
순간 당황한 유준이 저도 모르게 반말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움직임을 멈춘 사영이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유준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어제처럼 소파에서 대화를 원하시는 거 아닌가 해서….”
“으음….”
유준의 입술 사이에서 짧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사영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준은 어젯밤 다리를 다친 사영을 굳이 소파까지 불러 제 앞에 앉혔다. 우리 사이에서 누가 갑인지, 누가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명백하게 알려 주려는 의도였다.
지금 사영의 태도를 보자니 그 생각은 아주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유준은 입 안이 써 괜히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으니 만족스러워야 하는데. 그걸 위해 굳이 그토록 졸렬한 태도를 보였던 건데. 그런데도 막상 무례한 제 요구를 받아들인 사영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래도 저래도 다 꼴 보기 싫은 걸 보니 유준은 그냥 윤사영이라는 사람 자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사영의 부탁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모순이 발생하지만 유준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됐습니다. 그냥 거기 있어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짧게 한숨을 쉰 유준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영은 머뭇거리거나 되묻지도 않고 유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침대에 앉았다. 유준이 다시 어이없는 표정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소심한 건지 대범한 건지, 유순한 건지 반항적인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준은 찝찝한 감정을 느끼며 침대 쪽으로 걸어가 보호자용 의자를 당겨 앉았다.
사영은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늘어트린 채로 앉아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유준을 쳐다보았다. 모르고 본다면 유준의 말을 공손히 기다리는 학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데뷔한 지도 오래되었고 결혼하고도 시간이 꽤 흘렀으니 더 이상 어린 나이는 아닐진대 흰 피부와 유약한 인상 때문인지 그 모든 일을 겪고서도 그는 때 묻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치 유준이 어젯밤 보았던 오래전의 윤사영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 외형은 역설적이게도 더더욱 사영을 그때와 달라 보이게 만들었다. 그 간극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유준이 입을 열었다.
“윤사영 씨는 여기 병실에 틀어박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겠지만, 밖에는 이미 나 대신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이 일반인이 아닌 걸 눈치채고 캐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
“지금까지는 내 쪽에서 알아서 커버하고 있는데 내가 윤사영 씨를 도와주기로 한 이상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이 필요하겠죠.”
“네, 그렇겠네요.”
사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긴, 지금 대한민국에서 김유준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안달 내고 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여태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게 놀라운 일이긴 했다.
그나마 그가 뒤에서 신경을 쓴 덕분에 밝혀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유준이 지금처럼 병실에 드나들게 된다면 어디에서든 말이 흘러나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나요?”
이번에는 사영이 먼저 입을 열어 유준에게 물었다. 사영은 어쩌면 그가 어젯밤에 내린 결정을 밤새 후회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영에게 남은 건 땅에 떨어진 평판과 엉망이 된 커리어뿐이었다.
한재우라는, 이제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른 배우가 대척점에 서 있고, 사영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미친 소리를 연달아 늘어놓으며 유준에게는 하나 득 될 게 없는 동정을 바라고 있다.
김유준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런 자신과 진지하게 엮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이 그대로 말을 번복하고 다시는 제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유준은 사영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바뀌었다면?”
“…….”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그럴 겁니까?”
유준의 눈동자가 다시금 날카롭게 사영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진실을 바라는 것 같기도 했고, 사영을 시험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지난밤 유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부탁을 할 거면. …아니. 빌 거면 제대로 빌란 말이에요.’
정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안 도와줘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는 그만두라고 그가 경고했었다. 사영은 무릎 위의 두 손을 꽉 쥐며 대답했다.
“아니요.”
예상치 못한 단호한 대답에 유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사영은 말을 이었다.
“더 불쌍하게 매달릴 거예요. 저를 가엽게 여겨 달라고 무릎 꿇고, 울고, 애원할 거예요.”
그 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유준은 이내 어이없는 웃음을 한 번 터트리고는 말했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