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이해할 수 없었다. 유준의 의지는 분명했다.
거절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럴 마음도 있었는데. 그랬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내놓는 말들은 모조리 제 의도와는 반대되는 소리뿐이었다.
정말로 그를 동정이라도 하는 걸까. 한겨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죽어 간, 비참하게 버림받은 그 남자가 이런 선택을 내릴 정도로 불쌍한가. 그런가.
꼭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라 유준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유준은 사영의 얼굴을 조금 더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긍정적인 대답으로 인해 드러나는 감정을 찾고 싶어서. 아주 조금이라도 그 얼굴이 기쁨이나 안도로 물드는 걸 보고 싶어서.
“…고마워요.”
하지만 한참 만에 겨우 그런 인사 한마디를 내놓은 사영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했다. 선천적으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된 인형처럼 말이다.
이쯤 되자 유준은 일종의 오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윤사영의 그 오만한 얼굴을 깨트리고 싶었다.
그랬다. 유준이 생각할 때 이것은 오만함이다.
부탁을 한다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김유준을 한재우와 자신의 일에 엮으려 한다면 적어도 눈앞의 이 남자처럼 뻣뻣하고 당당해서는 안 된다고 유준은 생각했다.
사영이 제게 조금 더 매달리는 모습을. 애원하는 모습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모습을. 유준은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사영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는 투다. 무엇을 해도 해소되지 않는 불쾌감을 내리누르며 유준이 말을 이었다.
“이건 서로 간에 동등한 계약을 맺는 것 같은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윤사영 씨가 부탁한 것이고, 제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든 이 짓을 그만둘 수 있습니다.”
“네.”
대답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각적으로 흘러나왔다. 유준은 짧게 심호흡했다. 그가 자신의 성질을 돋우려 이러는 거라면 정말 제대로 하고 있었다. 티가 나게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며 유준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거 한 가지.”
유준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았다. 이 병실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유준의 뜻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모든 걸 수용하겠다는 태도의 사영을 향해 유준은 마지막 조건을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너 따위 나를 도와줘도 안 도와줘도 그만이라는 듯한 그 좆같은 태도는 좀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
“부탁을 할 거면. …아니. 빌 거면 제대로 빌란 말이에요.”
말을 마친 유준은 꼭 긴장한 사람처럼 주먹을 살짝 쥐었다. 사영과 마찬가지로 담담한 태도를 고수하고 싶었지만 저도 모르게 사영의 반응을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화를 낼까. 당황한 얼굴을 할까. 자존심이 상해 지금이라도 모든 제안을 없던 것으로 하고 싶어 하진 않을까.
그도 아니면 이런 대우를 받는 자신의 처지에 상심해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려나.
어느 쪽이어도 유준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좋았다.
사영은 잠시 말없이 유준을 쳐다만 보다가 곧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고민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행위였다. 이윽고 사영의 입이 열렸다.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뭐?”
조금도 예상치 못한 사영의 반응에 유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사영이 보일 반응에 대해 많은 가정을 했지만 설마 대놓고 무릎을 꿇을까 물어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일그러진 유준의 얼굴을 앞에 두고 사영은 말을 이었다.
“저는… 그만큼 간절한데.”
유준은 허, 하고 기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그것이 도발이거나 비꼼이었다면 지금처럼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준의 말이 기분 나빠서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 드려야 속이 시원하겠냐고, 그런 태도였다면 차라리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사영은 정말 그럴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유준의 도움을 받고 싶기 때문에 유준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전부 할 수 있다는 각오를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유준을 더더욱 신경 쓰이게 하는 부분이었다.
절박하고, 유순하고, 담담하고, 무심한. 도저히 함께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들이 한데 섞인 사영의 얼굴이 짜증스러웠다.
도대체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인상을 찌푸린 채로 유준이 답을 망설이는 사이 사영이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유준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사영은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천천히 꿇기 시작했다. 다친 다리에는 여전히 깁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아물어 가던 다리가 악화될 수도 있었다. 정말로 절박하지 않다면 이런 꼴로 무릎을 꿇겠다고 설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유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주 조금의 만족감도 느낄 수 없었다.
“읏…!”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유준이 사영의 앞으로 다가가 양어깨를 쥐고 그를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사영이 낮은 신음을 터트렸다.
유준의 힘에 의해 강제로 시선을 들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유준의 눈동자가 보였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는지, 사영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 유준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도, 사영은 몰랐다.
공허로 빚은 듯한 사영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유준은 이제야 그의 부탁을 받아들인 자신의 선택을 납득했다.
한재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윤사영의 복수가 성공하든 말든 그까짓 것은 유준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유준이 사영을 돕겠다고 말한 건 오로지 이 눈동자, 기분 나쁠 정도로 메말라 있는 이 눈동자 때문이었다. 사랑이든 복수든, 윤사영이 가지고 있다는 그 어떠한 감정과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윤사영 씨.”
유준은 그렇게 말하며 사영의 어깨를 놓아주곤 구겨진 환자복을 툭툭 건드려 정리해 주었다. 시비를 거는 것처럼 거친 손길이었다. 사영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화가 난 걸까 고민하며 선선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죠, 지금?”
“…….”
정곡을 찌르는 유준의 물음에 사영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사영에게는 이유가 중요하진 않았다. 중요한 건 유준이 화가 났다는 거고, 유준이 화가 났으면 자신은 사과를 해야 했다.
유준의 말대로 부탁하는 입장이니까. 빌어서라도 그의 도움을 얻어야만 하니까.
그가 화가 난 이유 같은 걸 몰라도 사영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응에 짧은 한숨을 툭 내쉰 유준이 이내 사영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아무래도 짧은 시간 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 보였다.
“일단 얼른 낫도록 해요. 그 꼴을 해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네.”
“오늘은 늦었으니까 자세한 계획은 다음에 듣도록 하죠.”
“네.”
사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얌전히 대답했다. 지나치게 큰 환자복 아래로 희고 마른 몸이 시선을 끌었다. 조금 전 유준이 어깨를 쥐었던 힘에 멍이 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약한 피부였다.
잠시 사영의 도드라진 뼈대를 보고 있던 유준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곤 곧장 몸을 돌렸다. 여기서 더 그를 보고 있어 봤자 제 가슴만 답답해질 게 뻔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리고….”
별다른 인사도 없이 병실을 나서는 유준의 등 뒤로 사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질 그의 말이 딱히 궁금하진 않았는데도 유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리고 막 병실 문을 연 그 순간, 사영의 목소리가 유준에게 닿았다.
“고마워요.”
어디선가 겨울 냄새가 나는 바람이 불어왔다. 올겨울은 왠지 모르게 유난하다고 생각하며, 유준은 대답 없이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
“선화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유준은 잔뜩 기분 나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 화면 속 남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저를 이용해요.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냥 옆에 있게만 해 줘요. 네?”
화면 속 남자는 참으로 가련한 얼굴을 한 채로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매달렸다. 그 남자는 윤사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유준은 소파에 더 몸을 깊이 기대며 뚫어져라 화면을 노려보았다. 유준이 보고 있는 건 사영의 데뷔작이자 그를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드라마였다.
사영은 이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도 아닌, 일명 ‘서브남’이라고 불리는 주조연 배역을 맡았다. 여자 주인공을 향한 일편단심 애정을 보이는 헌신적인 역할이었다.
거칠고 남자다운 매력을 보이는 남자 주인공에 비해 유약한 이미지인 사영이었으나 특유의 맑고 깨끗한 얼굴과 사랑스러움으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극이 후반부로 치달으면서는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이를 향한 애절한 연기력으로 대중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종국에는 남자 주인공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인기를 끌며 초반 지지부진했던 드라마의 성적까지 끌어올렸고 남자 주인공을 바꾸라는 항의가 빗발치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겼다.
“나는… 나는 절대 선화 씨를 아프게 하지 않아요.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
상처받은 것이 뻔히 보이는 얼굴로, 윤사영의 얼굴을 한 화면 속 남자는 애써 울음을 삼키며 웃었다. 누가 봐도 당장 안아 주고 싶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