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그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고, 결국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에게 밀려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걸 깨닫고 나서 저는….”
지금까지 이어 오던 말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였지만 유준은 사영이 지금껏 해 왔던 그 어떤 말보다 중요한 말들을 토해 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막혔다. 고통스러운 한기가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유준의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또다시 설원이다. 유준은 어느새 온기 하나 찾을 수 없는 새하얀 적막의 설원 속에 고립되었다.
멀리서 한 점이 말했다.
“집을 나와 그냥 걸었어요. 너무 울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어요…. 눈앞이 어지러웠는데… 그런데도 그냥 걸었어요. 조금이라도 한재우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어서….”
톡. 톡. 설원에 점이 번졌다.
“어떻게 하다가 차에 치인 건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정신없이 걷다가 차도로 나간 건지, 차에 뛰어든 건지 뭔지… 그냥 빛이 깜빡인다 싶더니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어요.”
번지는 점은 핏물이었다. 유준은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거기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그 설원에, 아니 어쩌면 검은 아스팔트인 곳에 번지는 붉은 피를 보고 있었다.
“그날 눈이 내렸는데….”
손끝이 에이듯이 시렸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이 사영인지 자신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눈앞을 적시는 피 위로 눈송이가 떨어졌는데… 귓가에는 마지막으로 들었던 한재우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서… 그 풍경이 너무 춥고 아팠던 게 기억나요.”
유준은 사영의 귓가에 맴돌았다던 목소리가 어떤 말을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분명 떠올리기 좋은 말은 아니었으리라.
인생의 마지막 기억이 모욕과 비참함으로 얼룩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유준은 알 수 없었다.
“유준 씨.”
그 순간, 사영이 유준을 불렀다.
창백한 설원과 아득한 어둠이, 그곳에 번져 가던 핏물이 일순간에 걷히고 유준은 다시 병실에 앉아서 제 앞에 앉아 시선을 똑바로 마주쳐 오는 사영을 보고 있었다.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뛰었다. 불편하고도 이질적인 박동이었다. 사영이 말했다.
“한심하게 보인다는 거 알아요. 이따위 하찮은 복수를 하느니 차라리 보란 듯이 그를 잊고 잘 살아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도 알아요.”
“…….”
“그래도… 마지막 날 견디기 힘들 만큼 춥고 아팠던 기억이 너무 선명해서요. 그게 잊히지가 않아서.”
유준은 그제야 이 따뜻한 병실에서 왜 한겨울의 시린 내음이 맴돌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윤사영이 곧 겨울이었다. 그는 겨울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심해도 좋으니까 한재우가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내가 그 순간 느꼈던 고통을 느끼길 바라요. 그러니까….”
이토록 아픈 말들을 내뱉는 순간에도 사영은 눈썹 하나 일그러트리지 않았다.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담담해서가 아니라 표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유준 씨.”
“…….”
“부탁드립니다. 저를 불쌍하게 여겨 주세요.”
사영의 죽음 위로 흩날리던 눈송이가 그 순간, 차갑게 얼어 버린 유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
재우는 모처럼 혼자 집에서 와인을 즐기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대체로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았다. 일종의 자축인 셈이었다.
차기작으로 공을 들이고 있던 영화 <하지(夏至)>의 출연 계약이 마침내 성사되었기 때문이었다.
감독이 원래 염두에 둔 배우가 있었던 모양인지 계약을 확정 짓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강경한 감독을 설득하느라 투자자며 어디며 얼마나 손을 써야 했는지 모른다.
솔직히 손을 쓰는 동안 자존심이 적잖이 상하긴 했다. 메인 남자 주인공도 아니고, 비중이 높다고 해 봤자 서브에 불과한 역이라 굳이 굽히고 들어갈 이유가 없는데 욕심이 나는 쪽이 이쪽이다 보니 소극적인 상대측 태도에도 강하게 나가질 못했다.
자신이 하겠다고 하면 두 손 두 발 다 들어 환영할 거라고 예상했던 재우로서는 기분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유준만 아니었어도 이딴 영화 눈길도 안 주는 건데.
정작 불만을 품은 곳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한재우의 짜증을 고스란히 감내했던 건 당연하게도 재우의 매니저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 역시 계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걸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재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와인 향을 음미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결국은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배역을 따냈고 앞으로의 일정들은 분명히 즐거울 것이다.
지금 가장 핫하다는 두 남배우가 뭉쳤고, 둘 다 첫 사극 도전이기도 하며, 재우의 취향은 아니었어도 시나리오가 탄탄한데다 명성 있는 감독까지. 어디로 보아도 실패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영화였다.
유준과 라이벌 역으로 함께하며 좋은 커리어까지 쌓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순간이다.
“…….”
하지만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재우의 눈빛은 방금과 다르게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 하나가 습관처럼 떠오른 탓이다.
‘정말 축하해요! 분명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음성을 떠올리기 위해 굳이 애쓸 필요도 없었다. 마치 지금 눈앞에 그가 있는 것처럼. 곁에 붙어서 정말로 제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선명한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윤사영의 목소리였다.
결혼 초기. 그러니까 아직 재우가 그에게 열렬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습을 꾸며내고 있었을 때.
오랫동안 무명으로 있던 재우가 하나둘 좋은 배역을 따낼 때마다 사영은 마치 그 자신의 행운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쁨으로 눈을 반짝거리며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곤 했다.
사랑스럽고도 감격스러운 얼굴이었다. 재우조차도 가끔은 진심으로 마주 웃어 주고 싶을 만큼.
하지만 윤사영의 그 얼굴은 재우에게 순수한 기쁨으로 머무르지는 못했다. 사영의 존재는 재우로 하여금 늘 타인이 저를 두고 하는 말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윤사영의 남편. 신데렐라. 가진 것도, 잘난 것도 하나 없는 주제에 남자 하나 잘 만나 팔자 핀 기둥서방.
하루아침에 그 시절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던 스타를 꼬여 낸 것도 모자라 그 덕에 무명을 벗어나 승승장구하는 한재우를 향한 시기와 질투는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히 인터넷상에서 떠드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현장에서 마주하는 동료 배우나 스태프들의 눈빛에서, 스쳐 지나가는 농담에서, 못 들은 척해야만 하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들에서 재우는 늘 인터넷의 악플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을 견뎌야만 했다.
아무리 그들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순전히 윤사영의 인기를 이용하고 싶어서 그에게 접근하고 그의 마음을 얻어 낸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같은 비난을 끊임없이 받는 건 결코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재우는 사영에게 제가 당하는 무시와 모욕의 울분을 쏟아 냈던 건 어느 정도 이해받을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쓰레기 같은 짓이라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걸 알면서도 한재우 곁에 계속 남기를 고집하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사영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모질고 나쁘게 굴어도 절절매며 매달려 오는 사영의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도록 만들었으니까.
재우는 이제 와 이 일의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만 짊어지는 건 다소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뭐, 이혼까지 한 마당이 더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이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재우는 불현듯 잔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 이 집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있던 사영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충동적인 발걸음이었다.
한집에 살긴 했지만 두 사람은 각방을 쓴 지 오래였다. 널 보기만 해도 속이 불편하다는 재우의 말에 사영은 기꺼이 재우와 동선이 겹칠 일이 없는 구석으로 방을 옮겼다.
재우는 이혼 후 공동명의였던 집을 자신에게 넘긴 사영이 집을 나갈 때조차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열어 본 적이 없는 방문을 열어 보았다. 낯선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그 순간 한여름 울창한 숲의 녹음과 같은 향이 아주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오메가인 사영의 향이었다.
사영이 나간 지 한참이 지났고 그사이 방을 청소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여전히 이 공간에는 그의 향이 남아 있었다.
마치 지긋지긋한 윤사영처럼.
“…질리네, 진짜.”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사람을 지겹게 만드는 존재라고. 재우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사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애초에 이 좋은 날 왜 갑자기 사영을 떠올린 건지가 의문이었다.
재우는 더 이상 제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할 사람의 이름과 얼굴, 음성, 그 모든 것을 떨쳐 내며 문을 닫았다.
윤사영. 그는 한재우의 인생에 더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
‘여전히 내 알 바는 아닌 것 같군요.’
유준은 분명히 그런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자신을 불쌍하게 봐 달라는 사영의 말을 들었을 때 말이다.
윤사영의 사정은 충분히 들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유치한 복수극을 시작했는지, 왜 굳이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하는지. 그래, 여전히 유준의 기준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이해는 했다 이 말이다.
그러나 그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과 그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유준에게는 여전히 자신에게 이득 하나 될 게 없을 그의 계획에 동참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처분을 담담하게 기다리는 사영의 얼굴을 마주한 채 내뱉은 유준의 대답은 머릿속으로 떠올린 대답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유준은 당황했다. 그래서 서둘러 자신의 대답을 번복하려고 했다. 유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속는 셈 치고 당신의 유치한 장단에 한번 맞춰 보죠.”
이어진 말들은 여전히 유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