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코끝으로 겨울의 향이 훅, 끼쳤다. 춥고 시린 냄새였다.
VIP만 머물 수 있는 최고급 병실이 추울 리가 없는데도 유준은 그 순간, 마치 설원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방향을 상실한 채 표류했다.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새하얀 눈밭에 시선이 머물 단 한 점이 있었다. 윤사영이었다.
사영을 인식하자마자 유준은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페로몬 향을 맡았다고 여긴 탓이었다.
태연하게만 보이던 그가 사실은 이런 식으로 저를 꾀어낼 함정을 판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준은 곧 자신의 추측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잠시 일렁였던 향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유준의 곁에는 그 어떤 종류의 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메가는 물론이고 알파나 베타에게까지 시도 때도 없이 온갖 유혹을 받곤 하는 유준이었다. 그 때문에 유준은 아닌 척 은근히 뿌려 놓은 오메가의 향도 늘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사영이 자신의 몸을 동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병실에 페로몬을 뿌려 두었다면, 삽시간에 제게서 이렇게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었다.
결국 유준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향을 두고 혼자 머저리처럼 반응했다는 소리였다.
그제야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린 사영의 표정이 보였다. 지금 이 병실에서 멋대로 페로몬을 흘리고 있는 건 오히려 유준이었다.
사영이 저를 유혹한다고 착각해서 순간적으로 방어를 위해 향을 피워 낸 탓이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유준의 결례를 두고 사영이 에둘러 불편함을 표현했다. 유준은 황급히 제 향을 갈무리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유준이 사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실수했어요.”
“네. 괜찮아요. 그보다….”
사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망설인다기보다는 다소 말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명백하게 의미하는 바가 달랐다.
망설이는 건 유준을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한다는 뜻이었지만, 말을 고른다는 건 다만 고심한다는 뜻이었다.
느리게, 사영이 다시 말을 뱉었다.
“촬영 끝난 거 축하해요.”
“아….”
유준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말이라 솔직히 조금 놀랐다. 사영이 곧바로 ‘이미 축하 많이 받으셨겠지만.’ 하고 말을 덧붙였다. 작지만 신중하고, 그리고 또다시 무심한 목소리였다.
애써 가라앉혔던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사영의 어깨를 틀어쥔 채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간절한 건 그쪽인 주제에 내 결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무릎을 꿇고 비는 극적인 상황을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구는 건 정말로 거슬렸다.
단순히 건방지다거나 하는 감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불편함이었다. 유준은 사영이 안개처럼,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흐릿한 게 신경 쓰였다.
유준은 사영의 축하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병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침대와는 거리가 좀 있는 곳이었다.
사영이 시선이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온 것을 확인한 유준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볍게 정리했다. 그는 사영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의도를 담아 고개를 까닥였다.
사영의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유준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해서라기보단 자신이 제대로 그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눈동자였다. 유준은 다른 움직임을 더하지 않고 사영의 눈동자를 느긋이 마주했다.
아마도 사영은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유준은 사영이 목발을 짚든 휠체어를 타든 상관없이 불편한 몸으로 제 앞까지 오기를 바랐다. 그 정도의 간절함은 보여 주어야만 대답을 내어 줄 생각이었다.
다친 사람에게는 분명히 무례한 처사였다. 애초에 유준은 남들에게 무작정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고, 친절하게 대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한들 윤사영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죽기 전’ 그의 삶이 비참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유준의 탓은 아니지 않은가.
사영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망설임은, 아니 망설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지조차도 불확실한 공백은 고작 그 정도였다.
스르륵, 이불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영은 손을 뻗어 목발을 손에 쥐고서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한 발을 디뎠다.
그 발걸음이 마치 자신의 가슴 어딘가를 꾹 누르는 것 같아 유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 기분을 풀기 위해 환자에게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꼴을 보고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그사이에도 사영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천천히 유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짜증도, 굴욕도, 그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었다.
복수를 위해 새로운 삶을 바치겠다는 사람치고는 무감한 그 얼굴이, 꼭 제 감정은 한재우에게만 허락됐다고 말하는 것 같아 묘하게 속이 끓었다.
그렇다고 한들 그게 김유준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하실 말이 있으면 하세요.”
어느새 소파 앞까지 다가온 사영은 유준의 맞은편에 힘겹게 앉아 짧게 숨을 고른 후 말했다. 커다란 환자복 아래로 도드라진 쇄골을 무의식적으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뗀 유준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만약 돕겠다고 한다면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됩니까?”
“…….”
“그 재수 없는 면상을 한 대 쳐 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다소 비꼬는 투였다. 하지만 사영은 그 말을 듣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리더니 대답했다.
“…그것도 좋겠네요.”
유준은 저도 모르게 허,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사영이 제 말을 긍정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인상은 기분 나쁠 정도로 순종적인 인형, 혹은 유령 같은 존재에 가까웠는데 아주 잠시였지만 사람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순간 유준으로서는 아주 불행히도, 눈앞의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 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궁금해졌다.
한재우를 사랑하기 전의 윤사영은. 사람답게 웃고 울던 날들의. 비참함이 아니라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애정을 품에 안고 살아가던 날들의 윤사영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이다.
유준의 생각을 모른 채로 사영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씀대로 그뿐이라면 굳이 유준 씨에게 부탁할 필요도 없겠죠. 저는….”
사영은 한 번 숨을 삼켰다. 그것이 유준의 앞에서 설명하는 게 긴장되어서인지, 아니면 아무리 그래도 한재우에게 복수를 말하는 건 여전히 어렵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저는 유준 씨가, 한재우가 유준 씨를 더욱 절박하게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재우가 유준 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 순간에.”
유준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영의 시선이 그 순간 제게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아챘다.
사영은 과거의 어느 날들을 보고 있었다. 한재우라는 사람을 절박하게 사랑하던 윤사영을. 그래서 한재우에게 사랑한다고 목 놓아 외치던 그때의 윤사영을, 사영은 보고 있었다.
형광등에 반사돼 빛나던 사영의 눈동자가 마치 안개가 덮인 것처럼 흐리게 보였다.
“그때 유준 씨가 한재우가 아닌… 저를 선택한… 척을 해 주면 좋겠어요.”
유준은 소파 팔걸이에 올려 둔 손가락 끝을 의식적으로 움직여 바닥을 톡, 톡 하고 두드렸다. 마치 그 모든 말들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다만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대한민국에서 연기력으로 내로라하는 배우인 걸 감안한다면 굉장히 생소한 기분이었다.
유준은 유난스럽게 숨을 내쉬지 않으려 신경 쓰며 입을 열었다.
“계약 연애 같은 거라도 하자는 말입니까?”
“아니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연애는… 여건이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하지 못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
“그냥… 그냥 한재우가 잠시만이라도 저처럼 아팠으면 좋겠어요. 그뿐이에요.”
차라리 한재우 보란 듯이 연애하는 척을 해 달라고 했으면 지금보다는 덜 찝찝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영이 그걸 기회로 삼아 자신을 어떻게 유혹해 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유준은 물었다. 반쯤은 충동적이었지만 진심으로 궁금한 점이기도 했다.
한재우를 패 주거나 죽이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를 다시는 재기할 수 없게 파멸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본인이 스스로 한재우를 버리는 것도 아닌 이런 복수가 정말로 필요한 것이냔 말이다.
“그 정도로 하나 마나 한 복수를 위해 보내는 시간이 아깝지 않아요? 할 거면 차라리 제대로…!”
“한재우를 죽이기라도 할까요?”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뱉어 내던 유준의 말을 사영이 막았다. 유준 역시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이긴 했지만 막상 사영의 음성으로 말이 되어 나오니 죽음이라는 말의 무게가 현실적인 감각이 되어 유준을 덮쳤다.
사영이 죽음을 아는 사람이라서. 이미 죽음을 겪어 본 사람이라서. 그래서 그가 말하는 죽음은 이다지도 날카롭고 서늘한 걸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유준은 어느새 사영의 주장을 진실로 전제하고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란은 더해져만 가는데 사영은 그것을 가라앉힐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한재우가 저를 직접 죽인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 역시… 그를 직접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
“저를 이용해 쌓아 올린 그의 커리어가 무너지는 걸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부수적으로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순간 유준은 이질감을 느꼈다. 사영의 말끝이 이전과는 달리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황한 유준이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사영의 음성이 한겨울의 된바람처럼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