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재우는 최근 아주 기분이 좋았다. 모든 일이 어쩜 이렇게 제 뜻대로 착착 풀려 가는지. 마치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던 윤사영이 드디어 떨어져 나간 것부터가 그랬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위자료를 많이 주게 되긴 했지만 큰 실랑이 없이 이혼한 것만으로도 이득이었다.
윤사영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 내는 건 쉽지만 그를 실제 유책 배우자로 만드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절대로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윤사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이 깊었는데 일이 아주 잘됐다.
그가 어째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건지 조금 의문이기는 했다. 그러나 재우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그간 재우가 그에게 한 짓을 고려해 보면 해답을 찾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골백번을 이혼하고도 남았다. 여태껏 버틴 윤사영이 지독했던 거다. 그러니 그가 버티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했다고 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었다.
설령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혼이 성립된 마당에 그 속내가 뭔지는 더 궁금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들이었다.
재우는 얼마 전 숍에 들렸을 때 우연히 스쳤던 김유준을 떠올렸다. 재우는 그에게 ‘그럼 다음에 뵙죠.’ 하고 아주 의미심장한 인사를 건넸다. 그 평범한 인사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 유준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기작의 강력한 라이벌 역할에 자신이 캐스팅되었다는 걸 알면 김유준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그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김유준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마주칠 때마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티를 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딱히 기분이 불쾌하지 않은 건 한재우가 유준의 바로 그런 점을 매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었다.
순종적인 건 딱 질색이다. 제 말 한마디에 고개를 숙이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할 테니 버리지만 말아 달라는 태도는 지긋지긋했다.
물론 사영을 그렇게 만든 건 재우였다. 윤사영이 없었다면 더 오랜 시간 동안 무명 배우였을 한재우는 의도적으로 그를 이용했으면서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영에게 더 무심하고 강압적으로 굴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재우는 그를 본래의 세상과 유리시키고 제게 더 의존하도록 만들었으며 감히 말 한마디 대꾸하지 못하도록 공들여 그의 정신을 갉아 냈다.
그러니 사영이 지겨울 정도로 고분고분했던 건 전부 한재우가 의도한 것이며, 또 한재우의 탓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태도를 꼭 사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재우는 한때 자신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던 주제에 지금은 제 발밑에 엎드려 매달리는 그가 우습고 한심했으나, 동시에 그런 그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자신이 떠올라 한층 더 비참해졌다. 그래서 한재우는 윤사영이 싫었다.
재우는 때때로 지금 자신이 유준에게 이렇게까지 몸이 달아 있는 게 단순히 그가 알파이고, 또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인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유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제게 먼저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지금 이렇게 공을 들이는 대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대되네, 아주….”
재우의 입가에 진심으로 즐거운 미소가 어렸다. 이런 짜릿함이 그리웠다.
아무리 사영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이상 밖에서 대놓고 허튼짓을 하기는 힘들었다. 사영의 눈치는 볼 필요가 없었어도 대중의 눈치는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간 ‘사랑꾼 이미지’를 제대로 쌓아 이득을 본 재우의 입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큰 타격을 입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식적으로 이혼했고, 이혼의 원인은 대중들이 알아서 윤사영에게서 찾고 있으며, 자신은 김유준과 차기작을 함께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렇게까지 순순히 일이 풀리니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령 정말로 김유준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이런 자극이 필요했을 뿐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한재우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재우는 이제야 겨우 얻은 윤사영이 없는 삶을 제대로 즐겨 볼 생각이었다.
***
“형,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 너도 고생했다.”
당연하다는 듯 되돌아오는 유준의 인사에 정민은 덩달아 뿌듯한 기분이 되어 입꼬리를 씰룩였다. 유준은 전부터 시나리오 보는 눈이 좋아 필모그래피를 잘 쌓기로 유명한 배우였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느낌이 좋았다.
정민은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키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음 작품 찍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까 그사이에 좀 쉬세요.”
“아, 그거… 상대 배역들도 아직 다 안 정해졌다고 했나?”
“네, 아직….”
정민의 대답을 들으며 유준은 좌석 등받이를 밀어 편안하게 몸을 눕혔다.
정민은 이번 작품에 특히 기대를 거는 것 같았지만 사실 유준이 더 기다리는 건 이다음에 찍게 될 작품이었다.
작가가 처음부터 유준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시나리오와 캐릭터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앞뒤 더 재지 않고 계약서에 도장부터 찍었다.
작품을 결정할 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여러 작품을 두고 고심하는 스타일의 유준으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상대 배역들도 좋은 배우들도 잘 채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유준이 막 눈을 감았을 때, 정민이 물었다.
“집으로 갈까요?”
유준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감은 눈앞에 번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유준은 지난 2주간 내도록 이런 상태였다.
촬영할 때 유준의 집중력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대단했다. 촬영 기간에 유준은 연기가 아닌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고 유준을 아는 이들은 모두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래서 유준은 최근의 자신이 정말로 낯설었다.
촬영 막바지에는 자칫 잘못하면 체력 저하로 인해 집중도가 떨어질 수도 있어서 각별히 신경을 쓰곤 한다.
자고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오로지 촬영에만 맞추며 연기를 위해 설계된 로봇처럼 생활해 정민의 걱정을 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유준의 삶에는 틈이 생겼다. 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고, 예상할 수 없었던 그런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 조용히 스며들어 자리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윤사영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마치 잊혀진 것처럼 존재감 없이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위가 고요해지고 유준이 혼자 생각을 할 수 있는 지금 같은 시간이 생기면 유령처럼 스르르 나와 유준의 머릿속을 온통 장악해 버리는 것이다.
잘 지내고 있는지. 복수를 위한 계획은 진행되고 있는지. 그가 여전히 자신을 가장 중요한 말로 생각하고 있는지.
유준은 제게는 하나 중요할 게 없는 일들을 매일 밤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더 초조해야 할 사람은 분명 윤사영인데 이상하게 휴대폰 벨이 울리길 기다리는 건 유준이었다.
대답 없이, 어떤 연락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유준의 태도에 혹시나 저의 제안이 거절당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여야 하는 건 분명 윤사영이다.
그런데 이러다가 자신에게 있던 선택권이 사라지는 건 아닌가 불안해하고 있는 건 오히려 유준이었다. 어딘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유준은 이따금 지나가는 말처럼 정민에게 사영의 동태를 물었다.
그는 얌전히 병원에서 다리를 치료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치료 때문이 아니면 병실 밖으로 좀처럼 나가는 일도 없고, 누군가가 면회를 온 적도 없단다.
유준은 시간을 거슬렀다는 그 미친 인간이 밤새 병실에 홀로 앉아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게 궁금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로 가자.”
“네?”
“…병원으로 가.”
한참 만에 흘러나온 유준의 목소리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정민이 이내 화들짝 놀라며 큰 소리로 물었다.
“병원이요? 어디 다치셨어요?”
“아니, 그런 거 아니….”
“아프신 거예요? 감기? 왜 미리 말 안 해 줬어요.”
“내가 아픈 게 아니고.”
내버려 두면 먼저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이라도 할 기세인 정민을 진정시키며 유준이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고… 윤사영 있는 병원으로 가자고.”
앞에서 얼빠진 목소리로 ‘윤사영이요…?’하고 되묻는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말해 유준 역시 자신에게 똑같이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으므로 굳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앞을 보지 않아도 기막힌 표정으로 룸미러를 통해 자신을 보고 있는 정민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어쨌든 유준은 사영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이는 어떤 쪽이든 간에 사영에게 대답을 해 주긴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까 유준은 단순히 마지막까지 미뤄 둔 그 대답을 하러 가는 것뿐이지 절대 사영을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그가 어떻게 이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병원으로 가서 사영에게 나는 당신의 허황된 계획에 동참할 생각이 없으니 복수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유준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인 대답을 전해 주고 오면 전부 다 끝날 일이다.
유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