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그것은 참으로 꺼림칙한 감각이었다. 사영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가 칼을 거꾸로 쥔 채 자기 자신을 찔러 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편하다 못해 불쾌했다.
지금 사영이 한 말은 다른 누구보다 윤사영 그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토록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방법 중 가장 처절한 방식이었다.
사영은 복수를 말하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그 말에 누구보다 아프게 상처 입을 사람은 윤사영이었다.
제 가슴이 피가 흐르는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래도 상관없는 건지. 사영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한재우가… 제가 겪은 것보다 몇 배로 비참한 고통에 몸부림치길 원해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죽었다가 살아나 과거로 돌아왔다는 기적을 얻고선 고작 한다는 일이 그토록 볼품없고 유치한 복수라니 기가 막힌 일이다.
유준은 정말이지 그를 비웃고 싶었다. 그 불쾌한 감각을 감추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사영에게 말했다.
“납득하기 어려운데.”
“…….”
“그런 식이라면 차라리 당신이 직접 한재우의 마음을 얻어 낸 후 차 버리는 쪽이 훨씬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사영의 복수는 근본적으로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다. 유준은 제가 무엇을 껄끄럽게 여기고 있는지 거듭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방금 말한 복수를 위해서라고 해도, 그렇다면 이렇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보단 차라리 나를 제대로 유혹하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일 텐데?”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정말 제대로 된 복수를 하고 싶다면 유준이 진심으로 사영을 사랑하게 만드는 게 나았다.
사람의 마음을 뜻대로 주무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이렇게까지 중요한 복수라면 그 정도의 각오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가진 패를 잘 이용해서 유준의 마음을 얻어 내고, 그것으로 한재우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고, 종국에는 유준까지 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복수가 완성된다. 유준이라면 당연히 이런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때, 잠자코 유준의 말을 듣고 있던 사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준 씨.”
“네.”
“저를 보세요.”
사영의 질문은 이상했다. 유준은 이미 사영을 보고 있었다. 유준이 그 말의 의미를 찾는 사이 사영은 말을 이었다.
“저는 수년 동안… 결혼까지 한 사람의 마음 하나를 얻지 못해 버림받았어요.”
“…….”
“지금 저는 한물간, 은퇴한 거나 다름없는 배우이고 숱한 소문을 떠안고 이혼한 사람이죠. 제가 얼마나 질투심이 넘치는 사람인지, 한재우의 성공을 시기하여 얼마나 그를 악독하게 괴롭히고 있는지 들어 본 적 없나요?”
말문이 막혔다. 사영에 대한 소문은 그런 것에 일절 관심이 없는 유준의 귀에도 종종 들어올 정도로 공공연했다.
사영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어렸다.
“그런 제가 무슨 수로 유준 씨의 마음을 얻어요?”
명치가 뻐근하게 아파 왔다. 유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한재우도 저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김유준 씨가 저 같은 걸 어떻게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겠어요?”
이 사람은 어딘가 망가졌다. 부서진 그의 조각들이 음성을 타고 유준의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유준은 그게 너무나도 불쾌해서, 기분 나빠서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만 싶었다.
“제게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능력 같은 건 없어요.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진 않죠. 그러니까 저는 그저…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유준 씨의 연민과 동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나 유준은 돌아가서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사영의 말을 들었다. 그 한심하고도 비참한 모든 말들을.
“원하는 대가는 무엇이라도 드릴 테니까… 제발 저를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 달라고.”
사영은 울지 않았다. 목소리를 떨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간절한 말들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하고 있었다.
“저를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매달리는 게 저의 최선이에요. 그러니까… 제 복수를 도와주세요, 유준 씨.”
유준은 그게 기분 나빴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바로 그 윤사영의 어울리지 않는 담담함 때문에 끝끝내 돌아서지 못했다.
***
사영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병실에는 한참 동안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유준이었다.
“…우선 다리부터 회복시키고 다시 이야기하죠.”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긴장감의 마지막 치고는 허무한 말이었다. 미미한 허탈감에 사영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고 유준은 말을 이었다.
“내게 부탁하는 거라면, 적어도 생각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말하는 유준의 목소리는 다소 오만하게 들리기도 했다. 사영은 그의 태도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셈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믿을 수 없는 복수에 휘말려 주는 일에는 당연히 심각한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결정이 서면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죠.”
“네. 조심해서 가세요.”
그때 유준은 자신이 아까부터 느끼던 이질감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깨달았다.
부탁을 하는 쪽은 사영이다. 둘 중에 아쉬운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윤사영일 것이다.
본인이 먼저 이 복수에 유준이 꼭 필요하다고 말한 이상 혹시라도 유준이 제안을 거부하면 어쩌나 마음을 졸여야 하는 건 분명 사영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사영에게서는 좀처럼 그런 기색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준이 승낙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혹시 저 사람이 지금 나를 놀리는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서려던 유준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윤사영 씨.”
“네.”
“만약 내가 거절하면….”
“…….”
“그래도 사영 씨는 한재우에게 복수할 겁니까?”
김유준이 없다고 복수가 불가능해지는 건 아니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이것이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그래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죽어 과거로 회귀한 거라면 가장 클래식한 복수의 방법은 상대의 마음을 얻어 낸 뒤 버리는 것이다.
이전 생에서 너 따위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사람이 눈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너를 사랑한다고, 제발 나를 용서해 달라고 빈다면 그보다 더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제대로 호응해 줄지 안 해 줄지 알 수 없는 제삼자에게 칼자루를 쥐여 주는 것보다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게 훨씬 적절한 방법이 아닌가.
그러니 유준이 이 계획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사영은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유준은 생각했다.
“…글쎄요.”
하지만 사영은 이번에도 애매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정말로 알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자신과 한배를 타지 않는 이는 한 톨도 인생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선언 같았다.
“가 보겠습니다.”
아무튼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며, 유준은 그제야 완전히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
만약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래서 이 우스운 복수혈전의 일원이 되고 나면. 그러면 저 가면과 같은 얼굴 뒤에 진짜로 어떤 표정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적나라하게 흔들리고 동요하는 윤사영의 얼굴을 상상해 보며 유준은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이유도 없이 손끝이 저렸다.
***
“크랭크업 축하 메시지 보내는 건 좀 그렇겠지?”
재우의 매니저인 은성은 그 질문을 듣자마자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누구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는 건지 이야기한 건 아니지만, 상대가 누군지 예상 못 할 만큼 그를 모르진 않았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은성은 여전히 재우와 사영이 이혼했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질 않는데 재우는 이미 사영을 전부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은성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아무리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부부로 산 세월이 있는데 이렇게 단숨에 존재를 지워 버리는 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를 일이다. 하다못해 그저 재우의 매니저로서 사영을 대한 게 고작인 은성도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데 말이다.
은성은 매번 자신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며 늘 재우 씨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해 오던 사영의 고운 얼굴을 떠올렸다가 급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괜히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걸 알면 재우에게 쓴소리만 들을 것이다.
은성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이목이 많이 집중되어 있으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나도 나지만 그쪽까지 괜히 구설수에 오르면 곤란하니까.”
재우는 유준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혼하자마자 스캔들이 터지면 상처받을 윤사영에 대한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은성은 저 역시 그 이름 세 글자는 생각나지도 않는다는 듯 표정을 꾸미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여태 참아 왔던 사영이 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건지, 도대체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던 건지. 은성조차 궁금한 것들이 한재우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윤사영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언론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혼의 원인을 윤사영에게서 찾고 있는 이 시점에 무슨 행동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우는 마치 그 모든 소문이 사실이라는 양, 그러나 마지막 애정으로 사영을 위해 입을 다물어 주겠다는 양 침묵할 뿐이었다.
어떤 침묵은 곧 적극적인 동조가 되기도 한다는 걸 모르지도 않을 거면서.
주제넘은 말을 해 제 연예인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은성의 앞에서 재우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 영화 건은 잘되고 있지?”
“네? 아, 네네! 지금 구체적인 조건 마무리 조율 중이니까 곧 계약서에 사인까지 끝날 거예요.”
“그전까지는 김유준 귀에 안 들어가도록 조심하라고 다시 한번 일러 놔.”
“네!”
열정적으로 대답하는 은성에게서 시선을 돌린 한재우의 입가엔 미미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