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7화 (7/193)

#007

왜 하필 나일까. 그런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죽었다 다시 살아난 후 복수를 꿈꾼다는 사람이 왜 하필이면 자신을 찾아온 걸까.

유준과 사영은 우연히 한 번 마주친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연이 없는 관계였다.

혹시 그의 ‘죽기 전’ 삶에서, 실제가 아닐 게 분명한 그 망상 속에서 그와 엮이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것도 아니면.

한재우가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윤사영도 알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자신까지도 사영의 복수의 대상이라 이런 식으로 덫을 놓으려 하는 걸까.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씁쓸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한재우와 윤사영이 결혼했을 당시 연예계에서는 무명 배우와 결혼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며, 사영이 너무 아깝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결혼 후 재우가 윤사영의 남편으로 주목받아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던 것과 다르게 사영은 두문불출하며 대중의 관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이 결혼이 명백하게 누구에게 이득이 되었는지는 너무나도 빤한 이야기였다.

대중들은 카메라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이 사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필하는 재우의 모습에 쉽게 열광했다.

업계에서는 이따금 더 지극하고 헌신적인 건 사실 윤사영이라는 소문이 아주 소소하게 돌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소한 소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헌신적이었던 사람이 재우가 아니라 사영이었다면 어떨까.

오로지 윤사영만 바라보는 한재우를 사영이 점점 질투하고 시기해 악독하게 굴었다는 소문이 아니라 사영이 재우를 위해 자신을 낮추고, 헌신하며,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그 소문이 정말로 사실이었다면.

사영이 혹시나 재우의 이름에 먹칠이라도 할까 봐 제 이름에 묻는 오물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 양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배우자에게 헌신했는데 그 결과가 단물만 다 빨리고 버림받는 것이고, 반석 위에 올라선 배우자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치근덕거리는 상황에 빠지기까지 했다면 누구라도 처절한 복수를 꿈꾸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한재우는 물론이고 그가 호감을 품은 사람까지 함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픈 감정이 든다 해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물론 유준은 재우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었을뿐더러 그의 관심 따위 오히려 불쾌하기만 했지만 배신당한 사람이 그런 것까지 전부 다 살피기는 힘들었으리라.

유준은 거실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걸어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유리창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우물이 자꾸만 마음을 끌어당겨서, 유준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바라만 보았다.

***

화장실에서 예상치 못하게 유준을 마주쳤을 때, 사영은 솔직히 절망했다. 이 파티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 중 유준은 사영이 가장 마주치지 싶지 않던 사람이었다.

다행인 건 그는 이미 세면대에서 손을 다 씻고 막 나가려던 참인 것처럼 보인다는 거였다.

‘안녕하세요.’

대충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려던 사영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 온 건 유준이었다. 사영은 당황한 채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며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쥐고 있는 힘껏 쥐어짜는 것 같았다.

사영과는 전혀 선이 다른 잘생긴 얼굴, 단단한 근육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체격, 누구의 앞에서도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까지.

어딜 보아도 사영과는 비슷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사영은 몸을 움츠렸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자신이 한재우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이유라도 되는 것 같아 주눅이 들었다.

‘윤사영 씨.’

그 순간, 유준이 사영의 이름을 불렀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영이 화들짝 놀라 ‘네?’하고 대답했다.

‘제가 원래 다른 사람의 일에 오지랖을 부리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그날 유준은 사영에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했다.

그때의 사영은 유준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했지만 그건 사영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겼을 만큼 특별한 순간이었던지라.

유준이 자신은 갖지 못한 재우의 마음을 앗아 가 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사영은 끝끝내 김유준을 미워하는 일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죽은 후에도 유준에게까지 복수를 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의 유준에게는 남아 있지 않은, 그날의 기억이었다.

***

사영은 간병인이 깎아 준 사과를 아삭아삭 깨물어 먹으며 TV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정수민 마약 스캔들’ 소식을 보고 있었다.

100% 확신하진 못했던 예측이 맞아 다행스러울 법도 하건만 화면을 응시하는 사영의 눈동자는 무감할 뿐이다.

사영은 어쩌면 제 감정이 목숨 대신 죽음을 맞이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죽기 전 사영은 늘 오만가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내면은 늘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슬픔으로 오열했다.

혹시 죽었어야 할 윤사영을 대신해 죽은 건 깊어지고 깊어진 그 감정이 만들어 낸 사람 형태의 덩어리였던 것이 아닐까. 그 덕분에 사영은 이렇게 목숨을 부지해 그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다만 기억하고만 있는 존재가 된 건지도 몰랐다.

“…감정을 잃어버리긴.”

하지만 사영은 곧장 자신을 비웃었다. 감정이 죽었다니, 이처럼 우스운 허세가 또 어디 있나.

정말로 감정이 죽었다면 복수 따위를 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어야 했다. 홀가분하게 새로운 삶을, 새로운 형태로 살아갔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기에 남아 구질구질한 수작이나 부리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자신은 이전 생과 하나 다를 바 없이 감정에 휘둘리는 멍청한 존재일 뿐이었다.

아니면, 정말로 죽은 건 윤사영이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자신이야말로 고통의 미련이 만들어 낸 감정의 덩어리일 수도 있다. 사람의 형태를 한, 미련 가득한 망령이나 다름없는.

그때,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마지막 사과 조각이 사영의 입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혀끝으로 퍼지는 달큰한 과즙을 느끼며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밤에 보죠」

짧은 메시지의 주인은 김유준이었다. 사영은 깨진 액정 탓에 갈라져 보이는 유준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영의 말이 선지자의 예언처럼 들어맞은 오늘의 뉴스를 보며 이 남자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일로 그가 자신을 완전히 믿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연예인의 스캔들 따위는 적당한 인맥만 있으면 얼마든지 미리 알 수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사영은 유준이 무슨 얼굴로 이 메시지를 보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한 자락의 믿음을 얻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오히려 더 큰 의심을 샀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사영은 결과에 맞춰 대응하면 그만이었다.

만약 그가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면 이번에는 어떤 대단한 예언을 하는 것이 좋을까.

「네」

한재우 말고는 관심 있는 게 없어서 그 외의 것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애매한 기억의 서랍을 뒤적이며 사영은 짧은 답장을 보냈다.

부서진 마음으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았던 것처럼, 깨진 액정의 휴대폰은 별다른 문제 없이 사영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사실은 그 깨진 조각조각들이 얼마나 서글프게 울고 있었는지, 이제 와서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너 혹시 정수민 소문 들은 거 있었냐?”

짧은 사영의 메시지를 확인한 유준이 새 핫팩을 챙겨 오는 매니저 정민에게 물었다. 정민은 형이 웬일로 다른 배우 스캔들에 관심을 다 가지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수민 소문은 뒤로도 좋은 소리밖에 못 들었는데 진짜 미쳤죠. 완전 놀랐잖아요.”

“흐음….”

“근데 형이 웬일로 그런 걸 다 물어요?”

평소 유준은 정민이 오며 가며 가볍게 흘리는 가십에도 통 반응이 없던 사람이었다.

뒷담화나 루머를 싫어한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준이 다른 배우에게 신경을 쓰는 건 상대 배역으로 만나 함께 작품을 만들어야 할 때뿐이었다.

“아니, 그냥.”

정민은 특별한 이유 없이 대충 얼버무리는 유준을 보다가 곧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 난리 난 거잖아요. 와,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나?”

“네가 뒤통수 맞았냐?”

“뭐, 그건 아니지만… 그 이미지 덕분에 광고도 다 신뢰감을 주는 것만 하고 있는데 난리 나겠어요, 진짜.”

이번에는 유준이 먼저 말을 꺼낸 만큼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정민이 주절주절 말을 덧붙였다. 유준은 고새 관심이 떨어졌는지 듣는 둥 마는 둥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휴식 시간이라지만 촬영장에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유준으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정말 죽을 때가 된 것은 아니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유준의 모습에 정민이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준은 여전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일부러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민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형!”

유준은 정민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부르고 나서야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정민은 무시당했던 물음을 다시 뱉었다.

“형 오늘 좀 이상한데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일은 무슨.”

그러나 유준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하곤 다시 시선을 내려 상념에 잠길 뿐이었다.

혹시 윤사영 일 때문인가. 정민의 머릿속에 그 이름이 번뜩 떠올랐다.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했지만 유준 역시 계속 찝찝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기 핫팩 새 거요.”

하지만 이런 분위기의 유준은 캐묻는다고 대답해 주지 않는지라. 결국 정민은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에 그 부부는 뭐 이혼을 하고서도 이렇게 둘이 똑같이 사람을 거슬리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정민은 애꿎은 시계만 들여다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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