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6화 (6/193)

#006

한재우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재우는 자신의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영의 앞에서 점점 더 솔직해졌다.

그에게 필요한 건 사영의 진심 따위가 아니라 그저 무명 배우였던 한재우가 주목받을 수 있도록 장작이 되어 줄 사영의 인기뿐이었다.

그걸 처음 깨달았을 때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시원하게 뺨이라도 올려붙이고 돌아섰어야 했는데.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사영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토록 비참하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을까.

‘제발 순진한 척 좀 그만하시죠, 윤사영 씨. 나만 나쁜 새끼 만드는 그 표정, 볼 때마다 진짜 진절머리 나니까.’

벼려진 칼날같이 날카로운 재우의 비웃음이, 모진 말들이 사영의 가슴을 가르고 들어와 심장을 파고들었다. 다시 떠올리기 힘들 만큼 끔찍한 아픔이었다.

사이가 멀어지고 나서도 사람들 앞에서 가식적인 애정을 보여 주는 재우의 행동에 상처받았던 건 매한가지였지만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말들 앞에서 느낀 고통에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사영을 아프게 만들었던 건,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버려지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처음부터 온통 거짓이었을 게 분명한데도 제게로 쏟아지던 그의 다정한 눈빛과 손길, 그 모든 것들을 움켜쥔 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간절함이었다.

재우와 완전히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어서.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부부의 이름으로 묶여 있으면 언젠가는 그도 자신의 진심을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사영은 매일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아픔을 견디고 또 견뎠다.

흔히들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사영의 사랑은 아니었다. 그 모진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랑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다만 하찮고 나약한 인간의 발버둥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나약해질 수 있다는 걸 사영은 직접 경험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윤사영의 남편 한재우. 운 좋게 윤사영의 이름을 등에 업고 벼락스타가 된 무명 배우 한재우. 아무리 내가 원했던 거라고 하지만 그런 소리를 오래 듣고 있다 보면 말이야…. 기분이 진짜 더럽거든.’

도대체 자신은 어째서 그토록 맹목적으로 그를 사랑했던 걸까. 무엇을 근거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가.

‘사영아. 너도 나도 이제 할 만큼 했잖아. 구질구질하게 굴지 좀 말자.’

그래도 괜찮다고. 여전히 나는 저 사람의 하나뿐인 배우자고 그 자리는 아무도 빼앗지 못할 거라고. 도대체 과거의 자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을 버텼던 걸까.

사랑, 그까짓 게 도대체 뭐라고.

“…….”

사영은 깊은 늪에서 벗어나듯 천천히 눈을 떴다. 악몽을 꾼 건지, 단순히 지난날을. 아니,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미래의 어느 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건지 모호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긴 했지만 다친 몸으로 유준과 대화한 게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영은 전신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중력을 느끼며 가까스로 눕혔던 몸을 일으켰다. 암막 커튼이 쳐진 병실은 마치 한밤중인 것처럼 깜깜해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잠들기 전, 유준이 보냈다던 간병인과 짧게 인사를 나눈 기억이 돌아왔다. 커튼은 그가 내려놓은 모양이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사영은 곧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휴대폰을 쥐었다. 바이크에 부딪혀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액정이 깨지긴 했지만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휴대폰을 활성화하자 어머니에게서 몇 통의 부재중 전화 알림과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재우와 이혼한 후 사영은 어머니에게서 연락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는 사영이 갓난쟁이일 때 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홀로 갖은 고생을 하며 사영을 키워 준,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언제나 사영의 의사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 주던 어머니는 갑자기 이혼하겠다는 아들의 말에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어떤 선택을 해도 엄마는 늘 네 편이라고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사영이 얼마나 재우를 좋아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던 어머니는 사영이 이혼한 후 잠시만이라도 아들과 함께 있고 싶어 했지만 사영은 곧바로 집을 구해 그곳으로 짐을 옮겼다. 그때도 어머니는 많은 걱정과 아쉬움을 조용히 삼키기만 했다.

사영은 불현듯, 하나뿐인 아들을 장례식에서 마주해야 했을 어머니를 떠올렸다.

원래 살던 세계가 어떻게 됐는지 사영은 알 수 없었다.

사영이 죽는 순간에서 세계가 영영 멈춰 버렸는지, 아니면 사영의 삶을 따라 세상도 전부 과거로 되돌아왔는지, 그도 아니면 사영이 없는 채로. 죽은 채로. 그 세상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영은 아직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그를 마주하면 상복을 입고 먼저 간 하나뿐인 자식의 빈소에 앉아 사람들을 맞이해야 했을 자신의, 이전 생의 어머니가 떠올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엄마♡’라고 애교스럽게 저장해 놓은 연락처 이름 아래로 몇 개의 메시지가 사영을 기다리며 늘어서 있었다.

「왜 통화가 안 돼?」

「메시지 보면 바로 전화 줘 사영아」

「사영아 시간 되면 저녁 먹으러 와」

「보고 싶네 우리 아들」

글자들 아래에서는 자그마한 아기 토끼를 끌어안고 뽀뽀를 퍼붓는 엄마 토끼 이모티콘이 요란하게 반짝였다.

안타깝지만 저녁은 함께할 수 없었다. 사영은 자신이 다친 것을 어머니께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미 걱정이 많으신데 더 충격을 드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늘 사영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이니 당분간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하면 충분히 이해해 줄 터였다.

금이 간 액정을 따라 부서진 엄마의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영이 다시 고개를 들어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병실의 어둠으로 시선을 던졌다.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한재우는 단지 윤사영 하나만을 망가트린 게 아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도록 만든 책임은 아들인 자신에게도 있었지만 한재우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영을 끝끝내 사랑할 수 없었다면 적어도 최소한의 존중은 해 주었어야 했다.

사영을 이용하기로 한 것도, 결혼을 결심한 것도 전부 한재우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그렇게 사영의 이름을, 사영이 가진 배경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그 모든 이득을 만끽했다면 적어도 자신에게 이용당한 사영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보였어야 했다.

사람을 외딴섬에 가두듯 세상과 격리하고,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도록 교묘하게 정신을 망가트리며, 비열하게 뒤에서 공작을 펼친 것도 모자라 눈앞에서 사영의 사랑을 모욕하고, 멸시하고, 끝내는 쓰레기처럼 버려 버리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됐다.

무릎을 꿇고 빌기라도 하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고. 이제라도 그 사람 앞에 진심으로 서고 싶다고. 너에게는 정말로 미안해서 할 말이 없다고 그렇게 거짓 눈물이라도 흘리지.

재우가 그런 흉내라도 내 주었다면 자신이 그렇게까지 넋이 나가 차가 오는 줄도 모르고 길을 헤매는 정신 나간 짓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런 허무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을 거다.

한재우는 그가 해야 했던 일 중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고,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사영의 사랑에 모든 이유를 전부 다 떠넘겨 버렸다.

멍청하게 사랑에 빠진 사람이 모든 책임을 전부 감당해야 마땅하다는 듯.

사영은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한재우의 사랑에 모든 것을 다 돌려줄 예정이었다. 윤사영의 사랑이 윤사영 자신을 전부 망쳐 버렸듯 이번에는 한재우의 사랑이, 그를 전부 망치는 이유가 될 거였다.

***

“하, 진짜….”

한참 전부터 잠들기 위해 애쓰던 유준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침 일찍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는데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촬영이 막바지로 접어들어 안 그래도 컨디션 조절이 중요한 시점인데 잠을 이루지 못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뭔 미친 새끼한테 걸려서….”

그리고 그 짜증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괜한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든 윤사영에게로 향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상하게 눈을 감으면 자꾸만 병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분 나쁘게 인간 같지 않던. 유령이나 안개처럼 흐릿해 당장이라도 허공에 흩어져 사라질 것만 같던 모습이 어둠이 드리워진 시야 너머로 어른거렸다.

차라리 죽었다 살아났느니 뭐니 하는 미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면 하도 정신 나간 소리를 들어 그런가 보다 치겠는데, 말없이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던 얼굴만 연신 떠오르니 영 마음이 찝찝해 무시가 되질 않았다.

연상 작용처럼 윤사영의 남편이었던 한재우가 떠오르자 기분은 한층 더 더러워졌다.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애매하게 기분 나쁜 시선으로 저를 훑어보던 기억에 욕을 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그가 알파라서 불쾌한 게 아니었다. 한재우라는 사람에게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느껴졌다.

결국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침대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킨 유준은 주방으로 가 생수 한 병을 꺼내 급하게 마셨다. 반 통을 멈추지 않고 비워 내자 단번에 속이 차가워졌지만 답답한 가슴이 해소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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