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4화 (4/193)

#004

병실에 적막이 흘렀다. 유준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말없이 사영을 응시했다.

입술 끝이 조금 떨리는 것을 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영은 말을 이었다.

“오늘로부터 2년 후에, 제가 죽었어요.”

“…….”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2년 전인 지금으로 돌아와 있더라고요.”

“저기요, 윤사영 씨.”

“덕분에 유준 씨가 오늘 그 자리에서 사고를 당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저는 유준 씨를 구하려고 시간을 맞추어 거기 간 거예요. 일부러.”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음을 안다. 사영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을 가지고 안전하게 유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영은 가장 위험한 방법을 택했다. 유준이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며 무시해 버리면 절대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는 외길을.

이유를 말하자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사영은 자신을 감추는 일에 신물이 났다. 한재우와 함께한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사영은 늘 그림자처럼 살았다.

재우는 어디서든, 어떻게든 사영이 주목받는 상황을 싫어했고, 사영은 혹시라도 그의 말을 어기고 ‘나대다가’ 재우에게 더 외면받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사영은 일상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 없는 척, 조용한 척, 이 삶이 만족스러운 척을 하며 살았다.

다시 그런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복수를 원한다고 한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있는 일을 없는 척하고, 자신의 모습을 꾸며 내며 유준의 앞에 서고 싶진 않았다.

“유준 씨.”

“네.”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게 조금만 시간을 줘요. 증명할 수 있어요.”

“그걸 굳이 나한테 증명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이어진 유준의 질문은 사영이 이 길을 선택한 두 번째 이유와도 맞닿아 있었다.

유준의 의문은 정당했다. 설령 윤사영이 정말로 미치지 않았고, 그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유준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사영의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오히려 감추는 편이 더 유리했다. 우연히 구해 낸 척 대가를 받아 내고, 유준의 은인 자리를 꿰차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런데 굳이 유준에게 증명까지 해 보이겠다고 나서며 가진 패를 전부 공개한 건 그래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유준의 질문에 사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유준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그리고 그 복수에 유준 씨가 필요해요.”

사영이 원하는 만큼 한재우를 비참하게 만들려면 유준이 반드시 필요했다. 물론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유준 모르게 그를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사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재우는 손수 사영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사람이었지만 김유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영에게 잘못한 게 없었다.

유준은 그저 너무 잘난 남자였고, 그래서 우연히 한재우의 눈에 들었을 뿐이다.

사영에게 이혼을 요구했을 즈음의 한재우는 대놓고 김유준에게 가진 호감을 드러내고 다녔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재우의 일방적인 구애에 불과했다.

만약 유준이 한재우의 구애에 조금이나마 흔들렸다면 사영은 훨씬 더 비참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을 모르는 척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일은 한재우와 자신의 악연을 푸는 일이고, 유준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 김유준을 이용할 거라면,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선택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사영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상대의 거짓에 속아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이 일에 관여할 수 있도록.

사영은 모든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준에게 말했다.

“김유준 씨가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뜻으로, 부디 나를 도와 달라고.

***

“김유준은 안 다친 게 확실해?”

방금 매니저로부터 유준의 사고 소식을 들은 재우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물었다.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사 보니까 지나가던 행인이 뛰어들어 구해 주고 대신 다쳤다고 하던데요?”

“다행이네.”

재우의 얼굴에 그제야 안도의 기운이 어렸다. 재우가 누군가를 이토록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드문 일이라 매니저는 괜히 그 얼굴을 몰래 힐끔거렸다.

배우자였던 사람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보지 못했던 얼굴이다. 이제는 다 의미 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아직 촬영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치면 큰일이지.”

재우는 매니저가 사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혹시 그가 다쳐 입원했다면 병문안을 가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가 다치지 않은 게 더 나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커피 향을 잠시 음미하던 재우가 문득 다시 물었다.

“그런데, 김유준을 구한 사람은 누구래? 많이 다쳤대?”

매니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얘기가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냥 일반인인 것 같던데… 김유준 배우가 VIP 병실에 입원시켰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말고는 아직 별다른 정보는 없어요.”

“대처 잘했네.”

현재 한국 최고의 스타를 구하고 대신 다친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런저런 논란에 휘말릴 수 있으니 부상 여부와 상관없이 최상의 배려를 해 주는 게 맞았다.

재우는 매니저에게 이만 가 보라고 손을 젓고는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댔다. 얼마 전까지는 느낄 수 없었던 느긋한 공기가 부드럽게 주위를 감쌌다.

지긋지긋하게 들러붙던 윤사영이 마침내 떨어져 나갔다.

아무리 비참하게 모욕을 주고 무시를 일삼아도 구질구질하게 붙어 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는 놀라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매니저는 사영이 갑자기 이혼을 요구한 게 아무래도 수상쩍다고 했다. 그가 혹시라도 순순히 물러나는 척 다른 꿍꿍이를 감추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치려는 속셈 아니냐고 말이다. 재우 역시 그런 의심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꿍꿍이가 있어 봤자, 이제 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입을 털어 댄들 재우에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어 놓은 ‘물증’들이 있었고, 또 그 물증에 더더욱 신빙성을 실어 줄 인맥이 있었다.

그의 폭로에 인터넷 커뮤니티와 게시판 등은 한동안 시끄러울 수 있겠지만 판도를 바꿀 만큼 대단한 영향력은 미치지 못할 거라는 게 한재우의 생각이었다.

근거 없는 오만이 아니다. 막연히 윤사영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해도 사영은 한때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던 배우였다. 게다가 이 바닥에는 그와의 결혼 이후 승승장구한 자신을 경계하고 시기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윤사영이 폭로한답시고 나선다면 그의 손을 잡아 줄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다.

다만, 그래도 한재우가 이토록 자신만만한 건 바로 그런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온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영이 무슨 수를 써도 큰 탈이 없도록 하려고, 자신이 수습할 수 있는 선 안에서의 발버둥으로 끝나게 하려고 재우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그토록 오래 이어 왔고, 그를 사랑하는 척했다.

윤사영의 존재감을 죽이고, 그의 목소리를 지우며,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보잘것없도록 만들기 위해 말이다.

이제 와 윤사영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재우는 큰 어려움 없이 그 해프닝을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사영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순순히 물러났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다.

조용한 거실에 재우의 느긋한 콧노래가 울려 퍼졌다. 한재우는 이제 ‘공식적으로’ 혼자가 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고민은 과연 이혼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유준이 자신의 마음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한재우의 인생에는 김유준만이 중요했다.

‘재우 씨를 좋아해요.’

거짓된 애정 공세에 넘어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한재우의 손에 넘기고서도 행복하게 웃던 멍청한 윤사영의 얼굴 같은 건, 더는 떠올리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

“내가 왜 당신을 도와야 하죠?”

유준이 물었다. 그리고 사영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시 질문을 바꿨다.

“아니, 그 전에.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난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었다. 아무래도 사고가 날 때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아니면 사고가 나기도 전에 이미 미쳐있었던가.

하지만 사영은 마치 유준이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믿기 힘드실 거 알아요. 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증명할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주제에 침착한 태도가 거슬렸다. 유준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일주일 정도 후에, 정수민 배우의 마약 스캔들이 터질 거예요.”

“정수민?”

“네.”

유준의 표정이 짧게 일그러졌다. 정수민이라면 유준과 같은 소속사에 있는 배우로 유준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데다 충성도 높은 팬덤을 구축하여 현재 잘나가고 있는 배우였다.

특히 그는 늘 반듯하고 예의 바른 이미지로 대중적인 호감을 산 배우였다. 단지 표면적인 이미지뿐만 그러한 게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도 행실이 깔끔하여 평판이 좋았다. 유준은 가볍게라도 그에 관한 나쁜 소문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연애도 아니고 마약 스캔들이라니. 그야말로 전혀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정수민이 마약을 한다고?”

“네. 파파라치 전문 연예지가 터트릴 거고, 머지않아 사실로 밝혀지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당신은 죽기 전 미래에서 직접 봤기 때문에 알고 있다?”

“네.”

사영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은 ‘미치겠네.’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한번 기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일주일 뒤라면 꽤나 정확한 날짜였다. 게다가 내용도 아주 구체적이었다. 두루뭉술한 예언 같은 게 아니고 즉각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실하게 판별할 수가 있는 내용이었다.

일주일 만에 사실 여부가 탄로 날 이야길 굳이 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라서 스스로 이게 진짜라고 믿고 있거나, 아니면 정말로 사영이 겪은 미래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인지 지켜볼지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유준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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