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아마 김유준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사영은 이전 생에 유준과 단둘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한 방송사에서 특별 방송을 노리고 연 연말 파티였을 것이다.
그때 이미 김유준을 향한 한재우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던 사영은 드물게 파트너로 동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처음엔 어딜 가나 사영을 품에서 떼어 놓지 않던 재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공적인 자리에 사영을 대동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 배우 한재우의 이름이 윤사영의 이름을 넘어서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사영은 그런 변화를 예민하게 눈치챘지만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 한재우는 꽤 오랫동안 윤사영의 이름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명 배우였던 이가 인기 스타의 배우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단박에 주목받았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신데렐라’라는 별칭이 배우로서 반가웠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그를 위해 기꺼이 더 깊은 그늘로 숨어들었다. 최대한 대중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히기를 원했다.
차근차근 자신의 이름에서 벗어나 어엿한 배우로, 대스타로 성장해 나가는 재우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사영의 바람이기도 했다.
사영이 그를 위해 점점 더 구석으로 몸을 숨기는 동안 한재우가 주변 사람들에게 사영이 점점 자신의 커리어를 질투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를 덜 상처 입힐 수 있겠냐는 고민을 은근슬쩍 털어놓았다는 것을, 사영은 정말로 몰랐다.
어쨌든 그날은 그런 사영이 모처럼 제 뜻을 관철해 그와 함께 파티에 참석한 몇 안 되는 날이었다. 불쾌해하는 재우의 옆에 기어코 따라붙어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유가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김유준이었다.
“덕분에 제가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지난 상념에 빠져든 사영을 깨운 건 유준이었다. 흐릿해졌던 사영의 눈동자가 그제야 선명한 빛을 띠며 현실로 돌아왔다.
사영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유준을 바라보았다. 깍듯한 감사를 전하면서도 유준의 눈에는 사영을 향한 불신이 어려 있었다.
유준은 원한다면 그 시선을 능숙하게 감출 수 있는 남자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일부러 사영에게 자신의 의심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었다. 아마도 사영의 반응을 살피려는 의도일 것이다.
사영은 유준의 행동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 대신 다친 사람 앞인데 너무 무례한 태도가 아니냐고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사영은 유준의 반응을 이해했다.
유준은 어린 나이에 아역으로 데뷔해 이 바닥에서 이십 년도 넘게 구른 사람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로는 줄곧 정상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지켜 왔던 사람이기도 했다.
온갖 시기와 질투, 음해와 이중성이 난무하는 연예계에서 버틴다는 건 그 자체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가운데에서 유준은 마냥 웃는 얼굴로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조차 쉽게 믿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껴 왔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상황에서 사영에게 당신이 나를 구했다며 순진한 얼굴로 감동할 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말이었다.
“유준 씨.”
“네.”
“저 누군지 아시죠?”
그래서 사영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그의 의심을 곧장 찌르고 들어갔다. 짧은 순간에 유준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펴졌다. 사영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네. 압니다.”
금세 당황한 표정을 지운 유준이 마찬가지로 순순히 대답했다. 사영은 작게 심호흡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선택한 길이고, 신중하게 고른 방법이기도 했지만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쉽게 예측할 수가 없었다.
과연 이 일에 유준을 끌어들이는 것이 옳은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의혹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사영은 담담하게 준비한 말을 꺼냈다.
“제가 오늘 그 자리에서 김유준 씨를 구한 게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이번에는 천하의 김유준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정민과 마찬가지로 유준 역시 오늘 벌어진 일이 계획된 게 아닌지 의심하긴 했으나 그 점을 상대가 먼저 입 밖으로 꺼낼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그 자리에서 저를 구한 게 정말로, 우연이었습니까?
그 질문을 뱉을 사람은 사영이 아닌 유준이었다.
유준은 입을 다물고 사영을 응시했다.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사영은 고요히 앉아서 유준이 얼마든지 시선으로 자신을 난도질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떠올릴 수 있었던 김유준에게 접근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중에서 이 선택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사영은 조금 더 안전하게, 순진함과 무해함을 가장하여 유준과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유준이 조금 더 어렸거나, 무르거나, 순수한 사람이었다면 사영도 지금처럼 과격한 방법은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서른도 넘은 지금의 유준이다. 이미 연예계에 수십 년을 몸담으며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가증스럽게 온갖 척을 하며 접근하는 사람을 어디 한두 번 겪었을까.
아무리 배우였었다고 해도 악의적으로 남을 속이는 일에 능숙하지 못한 사영이 연기를 해서 속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시간을 거슬러 살아났다고 한들, 그게 사영에게 원래는 없던 특별한 힘이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우연이 아니라면, 윤사영 씨가 꾸며낸 일입니까?”
이윽고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준이 되물었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금세 평정을 찾은 듯했다.
그렇다는 건 유준 역시 이미 어느 정도는 이 일이 사영이 꾸민 게 아닐지 의심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제가 꾸며낸 것까진 아니지만….”
사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영은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힘을 꾸며내 거짓으로 말하기보단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사영이 가진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힘은 그가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것. 즉,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오늘 당신에게 사고가 날 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네요.”
유준은 이번에는 감정을 감추지 않고 곧장 얼굴을 찌푸렸다. 미친 건가? 하는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영은 솔직히 그가 내비치는 노골적인 감정에 공감했다. 자신이 제정신이라면 기적처럼 주어진 기회를 이런 식으로 낭비하진 않을 것이다.
“혹시 머리도 다친 겁니까?”
“이마가 조금 찢어지긴 했지만 뇌에는 이상이 없다고 들었어요.”
“정신 나간 것 같은 소리를 했는데, 방금.”
점점 거칠어지는 유준의 말투가 재밌어서 사영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을 터트렸다. 늘, 누구의 앞에서든 단정하게 말을 고르고 고르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재우는 원래부터 이런 타입이 이상형이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했어도 끝끝내 마음을 얻어 낼 수 없었던 걸까.
불필요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영은 의식적으로 그 생각들을 밀어내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더 정신 나간 소리도 들어 보실래요?”
“내가 굳이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오늘 제게 진 신세를 갚는 셈 치고?”
사영은 듣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유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준은 사영을 사적으로 전혀 몰랐다. 과거 한 번 마주친 걸 제외한다면 유준은 몇 개의 작품 속 캐릭터로만 사영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유준은 지금 사영의 모습에서 무언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꼭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채 불편하게 움직이는 걸 보는 것만 같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이의 태도를 가늠한다는 게 얼마나 우습고 무의미한 일인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런 기분을 떨쳐 내기가 힘들었다.
유준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는 옅은 개암빛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껄끄럽게 자극했다.
유준은 몸을 움직여 병실 테이블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며 팔짱을 꼈다. 더는 은인을 대하듯 꾸며 냈던 태도를 이어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양 턱짓을 하며 유준이 말했다.
“일단 들어 보죠.”
사영의 갈색빛 눈동자가 조용히 움직여 그런 유준을 응시했다. 그 눈동자는 꼭 본질을 알 수 없는 깊은 심해와 같은 느낌이라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유준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영은 한동안 말없이 제 앞에 앉은 그를 보기만 했다.
유준은 오만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린 듯이 잘생긴 얼굴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 사랑에 빠졌다 말하는 사람들의 맹목적인 애정을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름답고 완벽하다는 말을 인간으로 형상화시킨다면 눈앞의 이 남자의 모습일 것 같았다. 그가 아닌 다른 형태로는 구현할 수 없었다.
유준은 이미 남들을 까마득하게 초월한 왕좌에 앉은 지배자 같았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 지난 생에서 그를 떠올릴 때마다 느꼈던 좌절감과 열등감, 질투와 부러움과 같은 감정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사영을 집어삼켰다.
사영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저 남자를 사영은 죽는 순간까지 얼마나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했던가. 그의 모든 것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왜 자신은 그가 아닌지, 왜 자신은 그가 될 수 없는지. 얼마나 많은 날을 절망해 왔나.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을 살아도 괴로운 기억은 질기도록 사영을 옭아맸다.
사영은 콱 막힌 숨을 가까스로 내쉬며 진정했다. 아무래도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조금 더 섬세하게 익혀야 할 것 같았다. 김유준을 볼 때마다 동요하는 건 앞으로의 계획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괜찮을 것이다. 이번 생에는 바로 이 남자를 이용해 한재우에게 복수를 할 테니 지난 생에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사영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천천히 유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는 사실…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이에요.”
이번 생에서 윤사영은, 유준을 질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