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혼해요.”
사영은 남편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사영은 자신이 먼저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영이 온 생을 바쳐 사랑했던 남편, 한재우는 이혼을 통보받고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영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 만큼 재우 역시 사영이 먼저 이혼을 말할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재우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영은 재우가 느끼는 당황스러움의 기저에 깔린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혼’에 충격을 받은 게 아니다. 어차피 재우는 이미 한참 전부터 사영과 이혼을 꿈꾸고 있었다.
다만, 그 단어가 자기 입이 아닌 윤사영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는 게 충격이겠지.
한재우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한심하게 매달리기만 하던 윤사영이 먼저 이혼하자고 말한 게 놀라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게 화가 나서.
그래서 한재우는 지금 사영의 앞에서 저토록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이 우습기보다는 오히려 서러웠다. 사영은 울음 대신 한숨을 짧게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혼하자구요. 어차피 당신도 바라던 바잖아요.”
“…….”
“내가 정말… 정말로 그냥 괜찮은 줄 알았어요?”
되묻는 문장의 음절 사이사이에서 홀로 삼켜 내기만 했던 지난 기억들이 피처럼 번졌다.
재우의 노골적인 멸시와 무정함을 겪으면서도. 도저히 결혼한 상대를 대하는 태도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만큼 무례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사영은 재우와 자신 사이에 여전히 사랑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가 보이는 모든 기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조금이라도 티를 내면. 한재우는 처음부터 윤사영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상처받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러면 정말로 그가 자신을 떠날까 봐 겁이 났다. 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싫으니 이대로 그냥 끝내자고 말할까 봐 두려웠다.
재우가 처음부터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다가왔다는 사실에서 오는 아픔보다 그에게 버림받는 아픔을 견디는 게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사영은 한재우가 자신을 모욕하고, 배신하고, 함부로 대하는 걸 태연한 척 감당해 왔다.
사영이 죽었던 바로 그날까지도.
“…그래. 뭐, 안 그래도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먼저 말해 주니 고맙네.”
한재우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얼굴에는 예의 그 여유가 돌아왔고 선선히 고맙다고 말하는 입매에는 미소가 어렸다.
사영이 먼저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예상치 못해 당황한 거지, 재우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다소 이른 감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재우는 사영과의 이혼을 위해 오래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 왔다.
그는 더 이상 윤사영의 인기에 기대 주목받던 무명 배우 한재우가 아니었다. 이미 판의 흐름은 한재우에게 더 유리했다.
사영은 자리에 앉아서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의, 남편의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아주 조금 기대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잔인하게 버림받아 놓고도, 그 고통을 끌어안은 채 죽음을 겪기까지 해 놓고도 사영의 마음에는 아직 다 버리지 못한 미련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과거로 되돌아왔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으로 시간이 되돌려졌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내가 달라지면,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를 대하면. 그러면 되돌려 받은 두 번째 삶에서는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버림받지 않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사영이 이혼을 요구했음에도 재우에게서 미련이나 후회의 감정은 단 한 톨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반갑고 후련한 얼굴을 하는 그를 마주 보며 사영은 이혼을 요구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팰 만큼 꽉 쥐고 있던 주먹을 간신히 풀어내고 사영은 자리에서 먼저 몸을 일으켰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두 다리가 후들거려도 버텼다.
지금의 한재우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사영의 머릿속에는 죽기 전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비참하고 구차하게 매달렸는지, 그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앞에서 다시 또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서로 의견이 같으니 수월하겠네요. 자세한 것들은 변호사를 통해 얘기하도록 해요.”
“…….”
“먼저 가 볼게요.”
‘진짜 이제 네가 지긋지긋하다, 윤사영.’
‘제발 내 인생에서 그만 사라져 주면 안 돼?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아?’
카페를 가로지르는 사영의 걸음을 따라 죽기 전 재우에게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들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었던가.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워서. 비참하고 두려워서.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 같단 생각을 했었나. 물론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기억이다.
카페 문을 열고 나오니 한낮의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사영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섰다. 눈이 부신 감각과 통증을 구분해 내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카페의 유리 벽 너머로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재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웃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뜻밖의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희희낙락한 얼굴이었다.
실제 그러한지, 아니면 사영의 자격지심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실제로 어떻든,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사영은 다시 앞을 보고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마도 드디어 지긋지긋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아무리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써도 떨어지지 않던 사영이 알아서 나가떨어졌으니 이제 모든 고생은 끝난 것이라고.
사영도 이대로 끝을 맞이할 수 있었다. 기적처럼 얻은 두 번째 삶이고 새로운 기회였다.
사영은 제 일생을 좀먹던 한재우를 향한 감정을 마침내 떨쳐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 행복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다만 문제는, 사영은 절대로 그를 이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영이 그 모든 고통을 묵묵히 감내했던 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보상받을 날이 올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재우를 믿었다. 비록 그가 속삭이던 사랑이 전부 진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결혼까지 한 이상 그에게도 조금쯤은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내가 더 잘하면.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더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봐 줄 거라고. 그렇게 믿으며 견뎌 왔다.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런데 끝이 어떠했나. 그런 자신에게 되돌아왔던 건 무엇인가. 아무리 사랑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한재우에게 윤사영을 향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중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가 있었을까.
사영은 두 주먹을 다시 꽉 쥐었다.
그는 이대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 한재우 따위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그 어떠한 의미도 되지 못하게 밀어 버리고, 보란 듯이 더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여기면서 한 번 망가진 삶을 돌보아 행복해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영은 그 방향을 택하지 않기로 했다. 끝끝내 보상받지 못한 마음이 주는 고통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싶었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영은 제가 얻은 두 번째 기회를 사용하여 한재우에게 고통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이 환상을 보는 것이든, 평행한 우주에 온 것이든, 정말로 시간을 되돌아온 것이든 무엇이든. 이 세계의 한재우에게 윤사영이 겪은 고통이 무엇인지 철저히 알게 할 것이다.
그것이 회귀자인 윤사영의 선택이었다.
#001
그토록 오래 외면해 왔던 것이 무색하게 이혼은 식은 죽을 떠먹는 것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재우와 사영, 두 사람의 이혼이 여태 성사되지 않았던 건 오로지 윤사영 한 사람의 고독한 분투 때문이었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재우는 놀랄 정도로 모든 일을 아주 빠르게 진행했다. 조율이 필요한 일은 전부 사영의 편의와 일정에 전적으로 맞춰 주었다. 혹시라도 사영의 마음이 바뀔까 봐 서두르는 모양새가 지나치게 적나라했다.
7년 가까운 결혼 생활 중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무한한 배려에 웃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사영은 자신이 죽지 않았다면 이후에 진행되었을 이혼의 과정을 상상해 보았다.
한재우는 지금과 다를 바 없이 서둘렀을 테지만 자신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썼을 테다.
회귀하지 않았다면 벌어졌을 죽음 이후의 날들과 현재를 매일 무의미하게 저울질해 보며 사영은 강제로 단절된 미련을 거들떠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크게 애쓸 필요는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도 고작해야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던 한재우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던 그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숱한 나날들 속에 한재우가 진실로 자신에게 주었던 애정은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 비참한 기억이 윤사영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죽는 바람에 직접 보진 못했지만 사영은 그가 자신의 장례식에서조차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물론 그는 훌륭한 연기자였으니 누가 보아도 가슴 아플 눈물 연기를 펼쳤을 것이다. 그걸로 많은 이들의 동정을 샀겠지. 그러나 그 눈물 속에는 아주 작은 진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나치게 거창했을 사영의 장례식은 윤사영을 위한 게 아니며, 어디까지나 한재우의 면피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을 게 분명했다.
사영과 맺은 부부라는 관계가 한재우에게는 고작 그 정도의 의미였다.
사영은 완벽히 정리된 이혼 서류를 손에 꽉 쥔 채 공원을 걸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햇살이 따사로웠다.
온몸으로 느끼는 태양의 온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겨울의 바람이 잘 실감 나질 않았다.
이깟 이혼 따위,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 보니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2년이라는 세월을 되돌아온 지금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별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영에게는 지금 손에 들린 이혼 서류가 시간을 거슬러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회귀는 사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야말로 사고처럼 맞닥뜨린 일이지만, 이혼은 사영의 의지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영이 어떤 마음으로 한재우를 사랑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가 먼저 이혼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윤사영 스스로도 그랬다.
“…….”
사영은 공원 한쪽 구석 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멀리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다른 차원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다시 눈을 뜬 뒤, 재우를 제외하고서도 많은 사람과 만났고 법적인 문제까지 전부 해결했지만 사영은 자신이 사실은 유령이 되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두 번째 삶에서도 한재우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오래된 사랑은 지독한 마약과도 같아서 혼자 힘으로는 좀처럼 중독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든 법이었다.
남들 눈에는 미련과 집착, 그 이상이 되지 못했을 감정이라도 사영은 늘 진심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온갖 무시와 외면을 당해 왔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끝끝내 포기할 수 없던 마음이다.
재우에게 이혼을 통보받던 그 순간에도 사영은 다른 무엇보다 그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슬프고 아팠다.
그러니 이번에는 전과 다른 모습으로, 이전 생에서 알게 된 많은 정보를 토대로,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얻어 내려 노력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토록 원하던 한재우의 사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사영이라고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미안한데 나는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한 적이 없어.’
‘이제는 이용 가치조차 없는데… 내가 왜 너랑 계속 같이 살아야 해?’
‘너를 위해서도 이제 이런 연기는 다 집어치우자.’
‘나는 윤사영 너를 보면! 답답해서 숨이 막힌다고!!’
그러나 눈을 감으면 자꾸만 그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숨이 꺼져 가는 순간에 떠올릴 수 있던 한재우의 목소리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끔찍하게 아팠다. 수천 개의 바늘이 혈관 속을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아예 바람이 났던 거라면 덜 비참했을 텐데.
그가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사유는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게 되었단 점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실이 사영을 더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상대는 알파였고 한재우를 제대로 상대해 주지도 않는 이였다. 그저 재우 혼자 애가 닳아 치근덕거리는 수준에 불과했다.
요즈음엔 알파와 알파 간의 연애가 예전처럼 터부시되지는 않는다지만 같은 알파에게 끌리는 알파는 여전히 소수였다. 그런데도 한재우는 그를 위해, 그의 앞에 당당히 서서 제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윤사영을 버린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한재우를 위해 그림자가 되었던 사람을.
그 과정은 또 얼마나 집요하고 악랄했던가.
사영에게 이혼을 통보하기 한참 전부터 한재우는 많은 준비를 했다.
사영이 결혼한 이후 은퇴한 배우로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갈 동안 그는 능력 있고, 다정하고, 자상하고, 더없이 남편을 사랑하는 배우로 버젓이 자리매김했다.
뒤로는 그가 가진 모든 인맥과 자금을 동원해 루머를 퍼트렸다. 한재우를 신데렐라로 만든 스타 윤사영이 사실은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고, 부정하며, 남편에게 추잡한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최악의 배우자가 되는 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설령 한재우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는 게 밝혀진다고 한들, 오죽했으면 그토록 가정에 헌신적이던 한재우가 오메가인 배우자를 두고 알파에게 끌렸겠냐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아주 쉽게 그를 연민했을 것이다.
만약 그 순간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과연 사영이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버텨낼 수 있었을까.
재우에게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모든 사람이 결혼생활 파탄의 원인은 윤사영에게 있다고 떠드는 일을 과연 견뎌 낼 수 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사영이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주었다. 손에 쥐고 있던 서류가 바스락,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사영은 그제야 깊어진 상념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지난 생에서는 절대로 받아들고 싶지 않았던 종이 쪼가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이유가. 다시 한번 한재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은 되돌려졌고 이 세상의 누구도 사영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윤사영, 그 자신만큼은 스스로가 어떤 지옥을 경험했는지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냥 잊을 수 없다. 잊고 싶지 않았다. 그저 참고, 인내하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삶은 한 번으로 족했다.
한재우에게도 자신이 겪은 고통을 그대로 겪게 해 줄 생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받으며 모욕을 겪는다는 게 어떤 건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를 바라보는 게 얼마나 가슴 찢어지게 아픈 일인지.
이번 생에서는 더더욱 아무것도 모를 그에게 사영은 확실히 알려 줄 계획이었다.
사영에게 시간을 되돌려준 존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모든 일을 설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영은 그 자신의 새로운 삶의 운명을 이렇게 결정하기로 했다.
첫 번째 삶이 사랑이었다면, 두 번째 삶은 복수가 될 것이다.
***
“정민아, 차 좀 잠깐 세워 줘.”
뒷좌석에 앉아 대본을 보며 연신 하품을 하던 유준이 창밖의 카페를 발견하고 말했다. 혹시나 방해될까 조용히 운전 중이었던 매니저 정민이 룸미러로 유준을 건너보며 물었다.
“여기? 왜요?”
“나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오늘따라 잠이 안 깨네.”
유준의 대답에 정민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잠시 자신의 배우를 쳐다보았다.
영화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체력적으로 한계가 찾아오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액션 신이 많은데다 야간이나 새벽 촬영 또한 유독 잦은 일정이라 더더욱 힘에 부칠 것이다.
길가에 차를 붙여 세운 정민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얼른 사 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잠깐만.”
유준은 그런 정민을 말리며 대본을 내려놓고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마스크를 썼다. 정민이 의아한 얼굴을 했을 때 유준은 이미 차 문을 열고 있었다.
“잠도 깰 겸 내가 다녀올게.”
“어… 괜찮겠어요?”
“어차피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바로 앞이니까 괜찮을 거야. 너도 마실 거지?”
정민은 멋쩍은 표정을 하면서도 풀었던 벨트를 다시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은 한적한 주변을 슬쩍 살펴보더니 재빨리 차에서 내려 카페를 향해 걸었다.
“아침부터 대배우가 커피도 직접 사다 주고 박정민 많이 컸다.”
유준이 들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타박할 게 뻔한 소리를 중얼거리며 정민은 짧게 기지개를 켰다.
김유준은 어떻게 보아도 사근사근하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제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방면으로 후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가장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매니저인 정민은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부족한 것 없이 챙김을 받고 있었다. 같은 직종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떻게 소문을 들은 건지 김유준의 매니저 자리를 노리는 인간들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오래오래 같이 가야지. 정민은 그런 다짐을 마음에 품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걸 보니 오늘 하루도 일진이 괜찮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