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 (외전 完)
유범이를 카 시트에 앉혀 주고 운전석에 오른 형은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빌딩들이 즐비한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푸릇한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방향을 틀었다.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와 달리 울퉁불퉁 자갈이 있는 땅에 차가 덜컹덜컹 흔들리자 유범이가 꺄르륵 웃으며 좋아했다. 우리 아들은 뭐든 긍정적이고 밝아서 다행이었다.
“와, 진짜 좋다.”
차에서 내리니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팔을 활짝 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유범이도 나를 따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자기 딴에 활짝 폈을 손이 너무 작아 귀여움에 웃음이 나왔다.
“형수님, 오셨어요?”
“준석 아저씨!”
마지막으로 운언동 저택을 지키던 준석 아저씨까지 출가를 하니 예전만큼 자주 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준석 아저씨 외에도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윤설아 선생님을 통해 우리가 이곳으로 글램핑을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우리 도련님도 안녕하셨어요? 더 멋있어졌네요.”
“웅! 유버미도 잘 지내써! 밥도 디게 많이 먹어써!”
아는 사람이 잔뜩 있다는 사실에 유범이의 얼굴도 상기되었다. 아저씨들의 애정 어린 인사를 듬뿍 받던 유범이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아이를 안고 있는 윤설아 선생님을 발견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파, 애기 보고 시퍼여. 유버미 가도 돼?”
“대신 조심히 잘 다녀오고. 아기 만질 때는 살살. 알겠지?”
“웅!”
유범이는 정연이의 선물을 챙겨 온 가방을 메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텐트를 향해 작은 발을 열심히 움직였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자 새삼 유범이가 훌쩍 커 버린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씁쓸해진 입안을 훑고 있을 때, 뒤에서 형이 나를 끌어안았다. 턱 끝으로 내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장난을 치는 걸 보니 내 기분을 눈치채고 달래주려는 모양이었다.
“유범이는?”
“정연이 보러 갔어요. 형, 여기 아저씨들도 왔어요.”
“그래, 그래 보이는군.”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주변을 둘러보는 형의 눈빛이 건조했다. 아저씨들은 형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기 바빠 보였다. 싸늘해진 분위기에 나는 일부러 형의 손을 잡아당기며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 사람이 많으면 더 재밌고 좋죠. 유범이도 잘 봐 주실 거고. 그래야 형이랑 더 놀 수 있으니까….”
내 말에 형은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모처럼 평화롭게 쉴 수 있어서 난 너무 좋기만 했다. 형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미 각자 분담을 마친 듯 텐트를 정리하는 무리와 식사를 준비하는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내가 도와주려고 해도 앉아 있으라는 말에 차라리 그게 도와주는 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원아, 잘 지냈어?”
따뜻하게 데워진 텐트 안에서 바깥을 구경하던 내 옆에 설아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지난 몇 달간은 선생님도, 나도 바빠서 못 봤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선생님의 얼굴이 좋아 보였다. 한눈에 봐도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네,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
“나는 잘 지냈지.”
뒤늦게나마 집안의 허락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의 얼굴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우리 유범이가 괜히 정연이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바로 맞은편에 있는 텐트 안으로 정연이에게 토끼 인형을 쥐여 주며 놀아주고 있는 유범이가 보였다. 정연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모습을 보니 정말 둘째를 가져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동생을 좋아하는데 아이에게 가장 친한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기도 했다. 어차피 한 명 더 낳을 계획이기도 했고 시기만 더 당겨지는 거니까….
사실 저번에 형과 있었던 관계에서 노팅이 있고 바로 임신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 아직은 때가 아닌가, 했는데. 동생을 좋아하는 유범이를 보자 다시금 둘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야, 우리 정연이 너무 예뻐해 줘서 나야 고맙지.”
“그럼 다행인데….”
“유원이 너는 아직 둘째 생각 없어?”
내 고민을 눈치챘는지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다음으로 나를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답게 선생님은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요즘 좀 고민이긴 해요. 근데 학교는 졸업하고 낳고 싶기도 하고…. 좀 복잡하네요.”
집으로 돌아가서 형과 진지하게 상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식사 준비가 끝이 났다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자 테이블에 쫙 펼쳐져 있는 고기와 해산물에 침이 저절로 꿀꺽 넘어갔다. 이렇게 야외에서, 게다가 숯불로 구운 고기와 해산물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
“맞습니다. 먼저 드십시오 형수님. 도련님은 제가 돌봐드리겠습니다. 저는 아까 먼저 먹었더니 배가 불러서요.”
“아, 그럼 부탁할게요. 감사해요, 아저씨.”
유범이를 대신 봐 주겠다는 동훈 아저씨 덕분에 형의 옆에 앉아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고기를 열심히 집어 먹고 있는데 형이 손가락 두 개를 붙여놓은 것 같은 크기의 새우 껍질을 까서 내게 건네주었다.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네에, 마이써요.”
엄청 뜨거울 텐데 쉬지 않고 껍질을 까주는 모습에 괜히 고맙고 미안하고 그랬다. 그리고 고기를 굽다가 묻었는지 잘생긴 얼굴에 새까만 재가 묻어 있었다. 재가 아니라 김인가? 잘생김.
“푸흣. 형, 여기 얼굴에 까만 거 묻었어요.”
“그래?”
“네, 여기.”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곤 형의 얼굴에 묻어 있는 재를 닦아주었다. 그러다 막 구워진 소시지를 테이블에 내려놓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쳐 민망했다. 시선을 피하려 얼른 소시지를 입에 넣는데 이상하게 누린내가 느껴졌다.
“으…”
“왜 그래. 뭐가 이상해?”
“네? 아니요 괜찮… 웁.”
열심히 구워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 숨을 참고 먹으려 했는데 소시지에서 흘러나온 육즙이 속을 비틀어 놓았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을 틀어막았다.
“우윽-”
“유원아!”
“파파!”
…어쩐지 이 익숙한 장면은 뭐지. 분명 맛있고 내가 환장하는 소시지인데 묘하게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눈을 찡그리고 계속해서 몸을 들썩이자 맞은편에 앉아 동훈 아저씨가 주는 고기를 열심히 받아먹던 유범이도 왕방울만 해진 눈을 하고 내게 달려왔다.
“파파, 갠차나?”
형을 따라 하는 것인지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눈을 마주하는 유범이의 모습을 보자 언젠가 꿈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설마… 그게 태몽이었나? 꿈에서 봤던 그 작은 솜뭉치를 떠올리니 가슴이 막 두근두근했다.
“형…. 나….”
고개를 들어 형을 마주하자 형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피식, 하고 옅은 웃음을 흘려 보냈다. 형은 나를 품에 꽉 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병원부터 갈까?”
다정한 목소리로 나만 들을 수 있게 속삭이는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도 이미 예상한 것처럼 그렇게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어쩐지 최근 들어 유범이가 입기엔 너무 작은 옷과 신발을 하나둘씩 사서 모으는가 싶었다.
“오늘은 말고요. 내일… 같이 가요”
이번엔 혼자 가지 않아도 됐다. 형과 함께 처음으로 아이의 존재를 확인하는 상상을 하니 비틀렸던 속도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그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속이 금세 안정되었다. 내가 배를 천천히 문지르며 형을 올려다보자 그가 자신이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내 품에 둘러 주었다.
“고맙고 사랑해, 차유원.”
형의 사랑 고백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매일같이 듣는 사랑 고백이었지만 매 순간마다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걸 보니 나는 형을 너무 사랑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걸 알았지만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형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그를 껴안자 맞닿은 가슴 위로 형의 심장으로부터 힘차게 뛰는 울림이 전해졌다. 나와 다르지 않은 그의 심장 소리에 행복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때, 유범이가 우리를 향해 힘차게 달려오며 크게 소리쳤다.
“파파! 유버미도 가치!”
씩씩한 발걸음으로 우리 사이에 뛰어든 유범이는 해맑은 얼굴을 하고 형과 내 목을 끌어안았다. 행복한 미소와 함께 아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자 유범이가 큰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얼굴로 우리에게 물었다.
“파파, 유버미도 동생 생겨요?”
아마 누군가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것 같았다. 아이는 얼른 대답해 달라는 듯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유범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동생이 생기면 정말 잘해 줄 거라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자 꿈에서 유범이와 함께 있던 작은 솜뭉치가 떠올랐다.
“아마도 솜뭉치 같은 예쁜 동생이 생길지도 모르지?”
역시 그 꿈에서의 일은 아마도 가까운 미래의 모습인 게 분명했다. 앞으로가 점점 더 기대되는 마음에 내 심장은 설렘을 가득 품고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분홍빛을 가득 머금은 벚꽃 잎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4월의 봄날이었다.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