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135화 (134/136)

외전 19

“그땐 어떤 아이가 나올까 엄청 궁금했는데, 제가 낳았지만 우리 유범이는 너무 착하고 예쁜 거 같아요.”

“파파, 나 예뻐?”

김밥을 다 먹고 샤인 머스캣을 집어먹던 유범이가 물었다. 아이가 말할 때마다 상큼한 과일 향이 퍼지고 아이의 웃음소리가 우리에게 전해졌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유범이가 호랑이 다음으로 보고 싶어 했던 판다와 기린을 보러 다녔다. 동물원 자체가 워낙 넓어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 것도 일이었다.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자 형은 나와 유범이를 벤치로 데려가 앉혀 주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마실 거 사 올게.”

“빠빠, 유버미는 쪼꼬!”

“그래.”

형은 유범이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쓸어내리고 음료를 파는 부스로 향했다. 웬만하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제 늦게까지 그… 걸 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려니 몸에 병이 난 것 같았다. 온몸이 쑤시고 걸을 힘도 없었다.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형이 유범이랑 더 돌아다녀 줬으면 좋겠는데….

새로운 동물을 볼 때마다 초롱초롱 눈이 빛나는 아이를 보니 차마 빨리 집에 가자고는 못 하겠다.

“파파, 벌레 앙! 물려써?”

“응?”

벌레? 아이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숙이자 늘어난 목도리 안으로 형이 만들어 놓았던 울혈이 눈에 보였다. 다급히 목도리를 다시 매고 유범이에게는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야, 아빠가 긁어서 그래. 하하…. 아,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아직 어리고 순수해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봤더라면 민망한 상황일 뻔했다. 맨날 관계를 가질 때면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바쁜 형이었다. 이미 각인까지 해서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페로몬 향을 못 맡을 텐데. 페로몬 샤워까지 흠뻑 하는 것도 형의 집착이 불러온 결과였다.

“저기 이써! 우웅? 근데 왜 다른 데루 가는 고지? 유버미가 찾아오까?”

“유범아!”

멀리서 형을 닮은 남자를 보고 벌떡 일어나는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조금 더 잘 보고 있어야 했는데. 형이라고 오해한 남자를 향해 뛰어가던 아이가 넘어졌다.

“조심해야지.”

그 순간,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넘어지려던 유범이를 잡아 주었다. 무릎을 굽히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눈을 맞추는 사람은 이준이 형이었다.

“감다함미다….”

“이준이 형….”

“오랜만이네, 유원아.”

여기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형을 이용만 하고 얼렁뚱땅 떠난 것이 미안해서 형에게 연락도 해 보고 일부러 똑같은 재수 학원까지 다녔었지만 형을 만날 순 없었다.

“형,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연락은 왜 안 하고, 아니 그것보다….”

“하하, 미안해.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그래도 원하는 공부 계속하면서 잘 지냈어.”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형이 언제 올지 몰랐다. 예전에 이준이 형만 보고도 엄청나게 질투하며 화를 냈던지라 신경이 아예 안 쓰일 순 없었다.

“후우….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아, 유범이 인사해야지. 파파 친구야.”

“안녕하세여, 유버미에요. 4살.”

“그래, 안녕. 엄청 귀엽게 생겼네.”

“아냐, 유버미는 빠빠 닮아서 잘생겨써!”

그래, 얼굴만 형을 닮은 게 아니라 이럴 때면 성격도 형을 좀… 이 아니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민망함은 내 몫일까.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자 이준이 형도 작게 웃음을 터뜨리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왔어요? 데이트하러 온 거예요?”

“응, 예전에 말했던 우리 할머니랑. 날씨가 조금 풀렸기도 하고, 답답해하시는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하는 형의 손엔 분홍색의 작은 핸드백이 들려 있었다. 아마 이 근처가 화장실이라 지나가다 우연히 나를 발견하고 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마침 형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금방 가겠다며 전화를 끊은 형은 아쉬운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만간 연락할게. 그동안에 어떻게 지냈는지 나도 궁금하다.”

이준 형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간략하게 적힌 명함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제가 맛있는 밥 사 드릴게요. 그때 약속했잖아요.”

“그래.”

다시 무릎을 굽힌 형은 유범이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떴다. 형이 새로 알려 준 연락처를 되새기고 있을 때 몇 걸음 가다가 고개를 돌린 이준이 형이 나를 불렀다.

“권태범 씨한테 고맙다고 인사 전해 줘.”

“네?”

“덕분에 하고 싶었던 공부 계속할 수 있었다고.”

형이 하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도 형은 밝은 얼굴을 하고 다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마실 것을 사러 갔던 형이 돌아왔다.

“앉아서 쉬고 있으라니까 왜 일어나 있어.”

게다가 유범이를 품에 안고 있는 나를 본 형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 정도는 괜찮은데 형에게 나는 아직도 어린애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형이 더 걱정하기 전에 다시 벤치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형은 내 무릎에 올라가려는 유범이를 자신이 데려간 뒤 아이가 좋아하는 코코아를 먹여 주었다. 이제 곧 봄이긴 했지만 여전히 쌀쌀한 날씨에 얼어붙었던 몸이 따뜻한 차를 마시자 온기가 돌았다.

유범이도 피곤했는지 어느새 형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우연히 시작된 평화로운 시간에 천천히 차를 마시다 조금 전에 우연히 이준이 형을 만나 생긴 의문을 말했다.

“형, 이준이 형한테 뭐 도와준 거 있어요?”

“글쎄. 걔는 왜? ”

“아니, 조금 전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형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라는 말을 해서요.”

상황을 설명했음에도 의미 모를 얼굴을 한 형이 수상해 보였다. 내게 알려 주기 싫은 것보다 내가 이준이 형을 떠올리는 게 싫은 모양이었지만 궁금한 건 못 참았다. 계속해서 알려 달라고 재촉하자 형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꺼냈다.

“성적도 좋고 본인 의지도 강해서 태호재단 통해서 성적 우수생으로 장학금 지원하고 있었어.”

“언제부터….”

“내가 실례한 것도 있고, 그래도 유원이 너 잘 도와준 것도 있고 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놀라자 형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이준이 형이 내 도망을 도와준 걸 알았나?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지? 게다가 실례한 거라니.

형의 성격을 봐서 이준이 형을 쫓아가 때려…. 하아….

“혹시, 집을 지원해 주는 건 어려울까요?”

어쩌다 아저씨들에게서 들은 말로는 내가 도망쳤을 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이준이 형이라는 걸 알고 그의 자취방을 쳐들어갔다고 했었다. 현관문을 부수고 집 안을 뒤지고. 지금 그때의 일을 다시 생각하니 이준이 형에게 미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집은 본인 명의로 된 게 있어서 안 되고, 사법연수원 전액 장학금이랑 생활비 지원해 줬으니 걱정 없을 거야. 뭐, 백병원 원장이랑도 말 끝냈고.”

아버님이 내 명의로 이것저것 물려주신 것이 있어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인데 내가 걱정할 필요 없이 일 처리를 끝낸 형이었다. 괜한 오해 때문에 나도 그렇고, 어찌 됐던 간에 형도… 이준이 형한테 민폐를 끼쳤으니 이렇게나마 보상하는 게 맞았다.

“다음에 제가 도망간다고 막 그러지 마세요.”

“또 도망가게?”

“자꾸 이러면요.”

“내가 잘해야겠네.”

이미 너무 잘하고 있어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유자차를 내려놓고 형의 손을 잡았다. 손은 오늘 하루 종일 나와 유범이를 데리고 다니느라 추위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덕분에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형.”

“나도 즐거웠어. 유범이도 재밌었어?”

“응! 유버미 오늘 세상에서 젤루 행보케!”

***

“유원아, 일어나야지.”

“으응….”

요즘 따라 잠이 많아졌다. 잠깐 급한 메일만 확인한다고 서재에 들어간 형을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새 잠이 들어 버렸다. 졸린 눈을 비비자 형이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요즘 잠이 많아졌네….”

“네?”

“아니야. 일단, 가자.”

오늘은 윤설아 선생님네 가족들과 함께 글램핑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설아 선생님도 결혼하고 바로 아이를 가지셨는데 유범이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였다. 복숭아를 의인화한 것처럼 하얗고 예쁜 아이는 유범이가 보고 동생 타령을 하게 만들기도 한 아이였다.

“파파, 빨리, 빨리!”

형의 옆에 서서 호랑이 가방을 멘 유범이도 그런 나를 재촉했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이 아침부터 미리 다 챙겨 놓아서 내가 준비할 건 없었다. 정말 일어나서 씻고 준비만 하면 됐었다. 형이 유범이의 아침을 챙기는 동안 후다닥 씻고나와 그가 만들어놓은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자, 이제 출발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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