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
“유버미 올려 조!”
“안 돼, 유원 아빠 지금 힘들어.”
“왜?”
순진한 아이의 물음에 내 얼굴이 화륵 붉어졌다. 아, 지금 옷은 제대로 챙겨 입었… 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불 안으로 고개를 숙이니 옷은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살짝살짝 티가 나는 붉은 반점들까진 가릴 순 없었지만 이 정도라면 아이는 잘 모를 수도 있을 거였다.
“저 괘, 괜찮아요. 유범이 아빠한테 와.”
“빠빠 빨리!”
괜찮다는 내 말에 팔을 번쩍 든 유범이 태범을 향해 그것 보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어린아이치고 꽤 매서운 눈빛에 웃음이 날 뻔한 것을 참고 유범이를 품에 안았다.
“헤헤, 파파!”
어제 하루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막 태어난 아기처럼 어리광을 부리는 유범이가 귀여웠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유범이한테도 몹쓸 모습을 보였다. 아빠로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생각에 시무룩할 때쯤 유범이가 뺨에 입을 맞추었다.
“파파, 어제 유범이 꿈에 왔었지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아이의 상상력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졌다. 유범이가 전해 주는 꿈 이야기는 늘 순수하고 귀여웠다. 아이의 통통한 뺨을 톡톡 건드리고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어제 슈웅이 같이 타구 어흥이 보러 가써여, 구고 파파 맞찌요?”
“슈웅이? 자동차 말하는 거야?”
“웅웅. 슈웅이, 슈웅이!”
유범이가 엉덩이를 들썩거릴 때마다 허리에 통증이 진하게 전해졌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하자 유범이를 번쩍 든 형이 아이에게 목말을 태워 주었다. 높은 곳에 올라갔음에도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린 유범이는 발을 동동 구르고 눈을 휘며 웃었다.
“음, 형 오늘 회사 안 가죠?”
되도록 주말에 회사에 가지 않으려는 형이었다. 이번 주에 출장도 없고 회사에 간다는 말도 없었으니 오늘도 웬만하면 집에 있을 거였다. 내 생각대로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조금 힘들긴 하지만, 유범이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유범아, 오늘 동물원 갈까?”
“진따? 유버미 얼른 가고 시퍼!”
내 말에 엉덩이를 들썩이고 재촉하는 아이의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아직 추운 날씨긴 하지만 갑작스러운 동물원 나들이가 정해졌다. 서둘러 도시락을 만들고 최대한 따뜻한 옷을 챙겨 입어 밖으로 나왔다.
“우리 유범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호랑이 맞지요~?”
“파파가 조아하는 동물도 어흥이 마찌요~?”
운전을 하는 형이 유범이와 내 대화에 픽, 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3월로 날짜 앞자리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치곤 따뜻한 날씨라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모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눈치 싸움에 성공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입구에 보이는 귀여운 마스코트 인형에 유범이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안아 달라고 하지도 않고 후다닥 입구를 향해 뛰어가는 아이의 뒤를 쫓아 열심히 달려갔다. 나보다 빨리 아이의 손을 낚아챈 형이 단호한 얼굴로 아이의 앞에 앉아 입을 열었다.
“권유범. 사람 많은 곳에서는 아빠 손 잘 잡아야 한다고 했지.”
“웅….”
“자, 얼른 손잡아.”
삐죽 입을 내밀면서도 형의 손을 꽉 잡는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놀란 것도 잠시, 얌전히 말을 듣는 유범이가 기특했다.
이젠 아저씨들을 하나둘씩 출가를 시키긴 했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을 보고 자란 아이는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번 말을 하면 잘 듣는 유범이니 걱정은 한시름 내려놓고 아이의 반대쪽 손을 잡았다.
“우리 유범이, 파파 손 꼭 붙잡고 호랑이부터 보러 갈까?”
“응응! 조아!”
아이는 양손에 형과 내 손을 꼭 잡고 씩씩하게 걸어갔다. 호랑이가 있는 사파리 투어를 보러 가는 길에 하얀 호랑이 모양 머리띠도 끼고, 무지개 색깔 솜사탕도 한 손에 든 유범이는 세상 행복해 보였다. 솜사탕에 밀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형은 유범이와 같은 호랑이 머리띠를 했는데 몹시 귀여웠다.
“푸흣.”
“파파, 왜 우서?”
“빠빠가 머리띠 쓴 게 너무 웃겨서.”
“큭, 마자, 유버미도 아까 웃겨써. 긍데 입뚤 꾹 깨물면서 참아써.”
내 말에 동의하듯 아이도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이 우리를 덮치듯 꽉 끌어안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힘을 주었다.
“누가 아빠 놀리래.”
“풋, 이거 놔요, 형!”
“윽, 빠빠! 유버미 숨 막혀!”
아이는 색소에 잔뜩 파래진 혀를 내밀고 헥헥,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에 웃음이 지어지는데 형이 한 번 더 힘을 주어 나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윽, 자, 잘못했어요. 이거 놔줘!”
“둘 다 사랑한다고 외치면 놔줄게.”
“여기서요?”
“빠빠, 유버미가 따랑해!”
유범이가 나를 배신하고 혼자 형에게 사랑 고백을 외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한 번씩 쳐다보았지만 형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유범이를 놓아주었다. 나는?
한 손은 유범이의 손을 꽉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나를 꽉 껴안자 우리의 모양새는 더 이상해져 갔다. 아이를 혼자 두고 주책맞게 애정 표현을 나누는 부부 같은 모습에 내 얼굴은 빠르게 달아올랐다. 어쩔 수 없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재빨리 말했다.
“사, 사랑해요!”
“잘 안 들리는데.”
우성 알파가 이것도 안 들린다고? 정말 말도 안 돼! 억울한 마음은 한가득이었지만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나와 형을 보는 유범이의 눈빛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을 버티지 못해 재빨리 소리쳤다.
“여보, 사랑해요!”
창피함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분위기에 잘 포장되어 수줍은 사랑 고백이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앞으로도 예쁜 사랑 하라고 박수까지 쳐 주는 바람에 더더욱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를 악물고 형을 노려보자 그는 이 상황이 재미있기만 한 듯 유범이를 목말 태우고 나를 잡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만 보는 것 같아 목도리를 얼굴을 가리곤 형을 따라갔다.
“권유범으로 11시 예약했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김해원 가이드라고 합니다. 예약 확인 되셨고,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출발하기 전에 운 좋게 예약한 사파리 투어였다. 양쪽 창문에 철창이 달려 있는 전용차를 보자 조금 겁이 났지만, 신이 난 아이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가장 먼저 유범이가 제일 보고 싶어 했던 새하얀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 빠빠 등에 있는 고야! 어흥이!”
“유범이 말대로 진짜 그러네?”
“웅! 빠빠 등도 어흥해, 어흥!”
유범이가 갑자기 코를 찡그리고 어흥, 하고 호랑이 흉내를 낸 덕에 가이드를 포함한 어른들은 절로 웃음을 터트렸다.
창문을 살짝 내리고 긴 막대기를 이용해 고기를 건네주자 무료한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던 백호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크흥!”
“히윽!”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까 이빨도 크고 사나운 얼굴에 숨을 들이마셨다. 유범이는 많이 안 놀랐으려나? 창문이 있는 쪽에 앉아 형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가 놀라서 울음을 터뜨리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백호를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눈을 반짝이던 유범이는 단호하게 백호에게 말했다.
“어흥이 얌전히 이써! 구래야 간식 줄 꼬야!”
역시, 아직 어린아이지만 형을 쏙 빼다 닮은 유범이는 용감하기 짝이 없었다.
***
“진따 진따 재밌어써! 유버미 또 가고 시퍼!”
흥분해서 상기된 얼굴을 한 유범이가 침을 흘렸다. 손수건으로 아이의 침을 닦고 따뜻한 물을 입가에 갖다 댔다.
“알겠어, 다음에 또 오자. 일단 물부터 마시고.”
꼴깍 소리와 함께 또다시 쫑알쫑알 아까 본 동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아이를 보니 왜 이제야 유범이를 데리고 왔는지 늦은 후회가 들었다. 신나 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일어나자 자리를 찾은 형이 우리를 보고 손짓했다.
“배고프겠다. 유범이 이리 주고 얼른 먹어.”
“괜찮아요, 같이 먹으면 돼요. 유범이 유부 초밥 먹을래, 김밥 먹을래?”
“요고!”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두툼한 새우튀김이 들어가 있는 김밥을 향해 있었다. 형이 건네주는 젓가락을 들고 김밥을 집어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유범이용으로 따로 싸 주셨는지 아이의 입에 넣기 딱 적당한 크기였다.
“마이써!”
옛날엔 내 입에 들어가는 게 먼저였고, 내가 편한 게 최고였는데 형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다른 사람이 더 먼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조금 어른스러워진 것도 같았다. 입 주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유범이의 입가를 닦아 주고 고개를 들자 형이 유부 초밥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유범이에게, 형은 내게 열심히 밥을 먹여 주며 어느 정도 배가 찼을 때 주방장 아저씨의 솜씨와 다른 김밥 도시락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내가 싼 김밥을 먹고 있었던 것인지 형 앞에 놓인 도시락 통에 옛날 생각이 났다.
“옛날 생각 나요. 형 회사에 도시락 싸 들고 갔던 날. 그렇게 옛날은 아닌가?”
“유범이가 호빵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옛날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