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
유원은 제 안에 쏟아지는 강한 물줄기를 느끼며 머릿속 깊이 넣어 둔 기억의 조각을 꺼내 들었다. 작은 파편으로 흩날리던 기억이 점차 하나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기억은 언제인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형…. 어, 언제부터…. 흐”
사정을 끝낸 성기가 천천히 크기를 줄여 갔다. 유원은 하나둘씩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태범의 뺨을 매만졌다. 형과 있었던 그 첫날밤을 시작으로 더 오래된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그 끝엔 할머니의 가게 앞에서 그와 처음 만났던 아주 추운 겨울날이 있었다. 나를 꼬맹이라고 부르던 지금보다 앳된 형의 얼굴이 지금의 형과 겹쳐 보였다.
그동안 이 모든 것을 혼자 끌어안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면서 나를 다시 찾아오고, 나를 구원해 주고,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일까. 대체 내가 뭐라고 형은 지옥 속에 구르면서 나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그렇게 애써 주었던 것일까. 형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형은, 계속…. 흑, 계속 제 옆에 있었어요?”
비가 쏟아지던 검정고시 시험 날 제게 우산을 건네주던 사람, 가끔 편의점에 들러 따뜻한 음료를 두고 가던 사람, 길을 가다 도둑맞을 뻔한 가방을 찾아 준 사람.
제 인생에 있어 귀인이라 여겼던 이들이 전부 다 같은 사람이었다. 유원은 눈물로 얼룩진 흐릿한 시야로 겨우 태범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기엔 너무나도 힘든 현실에 스스로 기억을 지워 내고 도피하고 있을 때, 형은 그런 자신을 지켜 주고 있었다.
“형…. 사랑해요. 너무 사랑해요.”
“유원아.”
“내가 너무 미안해요. 혼자 외롭게 해서, 혼자 기억하게 해서 내가 너무 미안해요.”
“괜찮아. 그것도 너여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던 사람도 차유원이어서 다 괜찮았어.”
태범은 유원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에게 입 맞추었다. 눈물에 젖은 입 안에서 짭짤한 맛이 났지만, 유원의 것이라 모든 것이 달콤했다. 태범은 제 품에 안겨 가냘프게 떠는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네 모든 걸 사랑해, 유원아.”
유원은 따뜻한 그의 품에서 눈물을 토해 내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이러다가 히트 사이클과 러트 사이클이 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서로의 페로몬을 양껏 느끼며 서로의 몸을 깊이 탐했다.
또 한 번 태범의 성기가 안에서 부푸는 것을 느낀 유원이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깊은 곳에 쏟아지는 태범의 것을 완전히 느낀 유원은 열띤 얼굴로 사랑을 내뱉었다.
“사랑해요, 태범이 형.”
너무 사랑해 마지않는 형의 품을 꽉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계속해서 사랑을 속삭였다.
***
“어, 호빵아!”
“크항!”
유범이를 가졌을 때 꿈에 종종 나오던 하얀 백호가 내 앞에 나타났다. 호빵이가 열심히 큰 만큼 팔뚝만 한 길이의 작은 백호도 어느새 몸집이 꽤나 커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꿈에 찾아온 호빵이를 번쩍 안고 부드러운 털에 입을 맞추었다. 핑크색 젤리 같은 배를 문지르고 호빵이를 꽉 껴안자 유범이도 기분이 좋은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동안 꿈에 찾아오지도 않고. 보고 싶었어.”
“뀨웅?”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이제는 양손으로 들어야만 번쩍 들 수 있는 호빵이를 안아 배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호빵이는 앞발로 배를 톡톡 건드리더니 아랫배를 핥았다. 장난을 치고 싶은 건가? 간지러운 마음에 몸을 비틀고 웃음을 터뜨리자 호빵이가 그 위에 철퍼덕 누워 가슴에 턱을 기댔다.
“아, 귀여워. 진짜 귀여워.”
부드럽고 말랑한 호빵 같은 엉덩이를 토닥거리고 말랑한 볼살을 문지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호빵이가 사라지고 없었다. 벌써 꿈이 깨 버린 건가,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울적해진 기분에 입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멀리서 호빵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잉, 끼잉, 하고 애달프게 우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빵아, 여기 있어? 호빵아, 유범아!”
마침내 작은 공간이 드러나고 그 안에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호빵이가 보였다. 새근새근 잠이 든 모습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얼른 호빵이를 안아 들었다.
“어…. 이 솜뭉치는 뭐지…?”
호빵이를 품에 안자 아이가 누워 있던 자리에 호빵이보다 훨씬 더 작은 솜뭉치가 있었다. 뭔가 싶어 살펴보는데 솜뭉치가 스르륵 풀리더니 세 개의 작고 검은 콩이 눈에 들어왔다. 더 작은 호랑이였다. 마치 호빵이를 처음 발견했을 때와 같은 기분에 마음이 이상했다.
“뀨우흥…?”
호빵이와 무척이나 닮았지만 더 부드럽고 작은 소리에 내 귀가 쫑긋하고 작은 솜뭉치에게 향했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는 대로 손을 뻗자 작은 솜뭉치가 내 손가락을 핥더니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아이의 움직임은 더 활발해졌다.
“호빵아?”
어느새 깼는지, 호빵이가 앞발로 내 배를 긁으며 내려 달라는 듯 낑낑거렸다. 바닥에 내려 주자 바로 작은 솜뭉치에게 달려가 함께 뛰어다니며 장난치고 놀기 바빴다. 그 깜찍하고 귀여운 광경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두 작은 백호들이 나를 향해 힘껏 뛰어오는 게 아닌가.
“어… 어, 위험, 읏!”
질끈 감은 눈을 떠 보니 아까와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원래의 운언동 집은 어디로 가고 넓지만 새하얀 인테리어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엔 아이의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었고 주방 안쪽에서 꺄르륵, 하고 행복하게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들어가자 얼굴에 하얀 가루를 잔뜩 묻히고 있는 유범이를 번쩍 안아 든 형이 보였다.
“형?”
“권유범, 파파 오면 이제 아주 혼났어.”
“그래도, 유아가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유범이는 혼나도 괜찮아!”
조그만 손으로 형을 밀어내고 발버둥 치는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다. 분명 유범이가 맞는데,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모습이었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자 형이 고개를 돌렸고, 그 틈을 타 바닥으로 내려온 유범이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권유범.”
“유아야, 오빠랑 도망가자!”
유범이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바닥에 앉아 아이와 마찬가지로 하얀 가루를 온몸에 묻힌 작은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 아.
유범이가 형을 쏙 빼닮았다면, 여자아이는 나를 쏙 빼닮아 있었다. 새까만 머리칼을 빼고는 살짝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며, 옅은 갈색 눈동자, 눈, 코, 입까지.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권유범, 권유아!”
뒤에서 두 아이를 쫓아 달려오던 형이 나를 발견했고, 뒤늦게 아이들이 나를 보았다. 나와 형을 쏙 빼닮은 아이들의 얼굴에는 달콤한 슈거 파우더와 초콜릿이 잔뜩 묻어 있었다.
“파파!”
“파파!”
장난기를 머금은 얼굴로 나를 향해 뛰어오는 아이들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벌렸다. 쏙, 하고 품에 안기는 아이들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가 퍼졌다. 형이 졌다는 얼굴로 고개를 살랑살랑 가로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파파 때문에 봐주는 거야.”
“아라떠!”
“웅!”
형은 내 입술에 작은 버드 키스를 하고 아이들을 양손에 번쩍 안았다. 형의 품에 안겨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에, 나는 행복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유원아. 일어나야지.”
“으… 응…?”
나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뜨자 형을 똑 닮은 두 명의 아이들은 어디로 가고 잘생긴 남편의 얼굴만 시야에 가득 찼다. 형은 내 볼을 톡, 치더니 술이 덜 깼냐며 웃었다. 내가 대답도 못 하고 어리둥절해서 눈만 깜빡이자 형은 내 손에 꿀물을 들려 주었다.
“속 쓰리겠다. 얼른 마셔.”
“아이들은요?”
“아이들?”
해가 떠오르는 새벽까지 이어진 정사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풀썩 넘어진 나를 보곤 형이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다가왔다.
“괜찮아?”
“네, 괜찮은데. 어….”
꿈? 꿈인가? 포만감에 찬 미소를 지은 채 내 허리를 끌어안는 형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사진은 재작년 호빵이의 돌잔치 때 찍은 사진과 형과 나의 결혼식 사진, 셋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뿐이었다. 분명 꿈속에서 솜뭉치처럼 작고 보드라운 여자아이를 봤었는데.
“유아는….”
“유아?”
형이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형의 반응을 보니 그냥 꿈인 게 맞나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은 화목한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파파!”
드르륵 소리와 함께 유범이의 방과 연결된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노란 옷을 입은 유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부터 생기 넘치는 얼굴로 쪼르륵 달려온 아이는 형의 바지를 쭉 잡아당겨 뭔가를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