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
평소보다 수능을 잘 치르긴 했지만 한국대는 무리였다.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슨 뻔뻔함으로 내가 한국대생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는 탓에 이불에 발차기를 종종 했다.
“유원 오빠!”
“어, 그래. 안녕 해수야.”
그래도 모두가 도와준 덕분에 당당히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나는 오늘 처음으로 개강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형도 맞춰서 휴가를 써서 그나마 한국에서 가까운 동남아로 휴가를 갔었다. 아직 어리지만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던 유범이가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나올 때,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 오빠도 개총 간다고 하던데. 진짜예요?”
“응. 해수, 너도 가?”
“당연하죠! 와, 근데 오빠가 술자리 나오는 거 처음 봐요. 맨날 바빠서 집에 간다고 했었잖아요.”
그동안 유범이가 조금 아팠다. 약을 먹여도 열이 내리지 않고 끙끙 앓는 탓에 아이의 곁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중에 할머니한테 부모의 관심이 필요한 아이가 가끔 몸이 아픈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지금까지 내 욕심으로 유범이와 형한테 소홀했던 것 같아 학교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도 했다.
“오늘은 집에 허락받았어. 너무 늦게까지는 안 되지만.”
우선은 학교에 다녀 보고 천천히 생각하자는 형의 말이 아니었다면 정말 대학 생활을 일찌감치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몇 살인데 통금이 있냐고 놀란 얼굴로 물어보는 해수의 말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학교에서 그 누구도 내가 결혼을 하고 아기까지 있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어쨌든 개강 총회까지 조금 시간이 남았으니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넘어가면 되겠지.
“오빠, 그럼 6시에 학교 정문에서 만나요! 같이 가요.”
“그래. 이따 보자.”
각종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사이 이미 무리가 지어져 있었다. 혼자 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았으나 가끔 곤란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를 챙겨 준 사람은 해수였다. 오리엔테이션 이후 만들어진 단톡방의 존재조차 모르던 나를 초대해 준다거나, 이미 무리가 지어져 어디에 껴야 할지 모르는 애매한 순간에 같이 조별 과제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해 주었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하나둘 쌓이고 나니 해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점차 커졌다.
“밥이라도 한 끼 사 줘야겠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해수의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띠리링-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어? 동준 아저씨네. 무슨 일이지?”
아저씨들 중 가방끈이 제일 길다는 이유로 유범이의 유모가 된 동준 아저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혹시 유범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놀란 마음으로 급히 확인하자 화면 가득 빵빵한 볼을 들이밀고 있는 유범이의 모습이 보였다.
-파파!
“우리 아기, 아직 안 잤어?”
시간을 보아하니 낮잠을 잘 시간이었는데 유범이의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했다. 동준 아저씨와 재밌게 놀기라도 했나….
-유버미가 파파 줄라구 쿠키 해떠!
역시나, 삐뚤빼뚤한 모양의 쿠키가 화면을 채웠다. 이걸 보여 주려고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입 주변도 과자 부스러기로 가득했다.
“유범이 또 쪼꼬 많이 먹었어?”
-으… 흥….
불리할 때 나오는 유범이 특유의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신난 얼굴로 자신이 만든 쿠키를 자랑하던 것도 잠시, 형을 닮은 외모에서 유일하게 나를 닮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피하는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대신 태범 아빠 오기 전에 얼른 치카치카 하자. 알겠지?”
-웅! 유버미 치카치카 잘할끄야!
“정말?”
그때, 통통한 볼로 열심히 고개를 끄떡이는 유범이의 뒤로 형이 보였다. 형은 아이를 번쩍 안아 들더니 배 방귀를 불었다. 화면이 거실 천장을 비추었고 아이가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우버미, 히, 힌드러!
-그럼 뽀뽀.
-웅.
동준 아저씨가 핸드폰을 주워 형과 아이를 비춰 준 덕분에 사랑스러운 모습을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쪽, 하고 유범이가 형의 뺨에 입을 맞추어 그의 얼굴이 아이의 침으로 번들거렸다.
-유범이, 아저씨랑 치카치카 하고 오자.
-우웅.
“유범이 안녕, 파파랑도 이따 보자~”
-웅, 빠빠 이따 바~
오늘 낮잠을 못 자서인지 한참 동안 간지러움에 웃음을 터뜨리던 유범이가 눈을 비볐다. 형은 눈치껏 유범이를 동준 아저씨한테 맡기고 대신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유범이와 똑 닮은 얼굴이 아이 대신 화면에 등장했다.
“형, 오늘은 일찍 끝났네요?”
-응, 오늘 외부 미팅이 있어서 끝나고 바로 퇴근했어.
“다행이다. 안 그래도 조금 걱정이었는데.”
수능을 끝내고 매일같이 붙어 있던 탓에 오랜만에 아이를 두고 집을 나온 게 걱정됐었다. 개강 총회까지 2시간이 조금 모자란 탓에 집에 다녀오기도 촉박하고, 첫 주부터 교양 과제도 있어서 도서관에 온 거였는데 막상 아이를 보니 걱정되긴 했었다. 그런데 형이 일찍 왔으니 마음 편히 있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형이 부드럽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괜찮으니까 재밌게 놀다 와. 대학 생활도 즐겨 봐야지.
“그래도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라 어색해요…. 술도 잘 못 먹고.”
-그러게. 술 못 마시는 건 걱정된다. 오늘 적당히 먹고. 이따 형이 데리러 갈까?
아이를 낳은 뒤 처음 먹은 와인 한 잔에 완전히 취했었다. 그렇게 술을 못 마실 줄은 몰랐는데 내가 생각해도 충격이었다. 요즘 대학은 옛날처럼 술 강요가 없다고는 하나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분위기만 느끼고 동기들의 얼굴도 볼 겸 참여하는 자리니 11시 전에는 출발해야겠지.
“큭크, 금방 들어갈 거예요.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우리 호빵이만 부탁할게요.”
-알겠어. 도착하면 메시지 남기고. 끝나면 바로 전화해.
“알겠어요. 사랑해요, 형.”
-나도 사랑해.
화면에 입을 맞춘 뒤 누가 볼까 서둘러 주머니 속에 핸드폰을 넣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전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 많이 변한 일상이었다. 그게 다 형 덕분이고, 선물처럼 찾아온 유범이 덕분이겠지.
통화를 하고 나니 개강 총회도 생각이 안 날 정도로 형과 아이가 보고 싶어졌다. 이미 참석하겠다고 말한 뒤라 빠질 순 없었지만 대신 정말 일찍 들어가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
“아… 어지러워어….”
“헐, 오빠. 괜찮아요?”
세상이 온통 해롱해롱, 어지러웠다.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에 한 잔, 두 잔 홀짝이다가 언제 취했는지도 모르게 내 앞에 빈 술병이 한가득 쌓였다. 물론 나 혼자 마신 건 아니었지만 이미 내 주량을 훌쩍 뛰어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으응… 어지러어….”
“어떡해. 유원 오빠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하는데 자꾸만 몸이 흔들렸다. 차라리 벽에 기대는 게 나을 것 같아 몸을 일으키자 빈속에 마셨던 술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우욱-”
“오, 오빠!”
나를 부축하는 사람들의 손을 밀어내고 다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좋지 않은 화장실 상태에 또다시 구역질이 나오려던 것도 잠시, 모든 정신을 끌어모아 속을 다스렸다. 열기와 온갖 사람들의 체취와 섞인 음식 냄새에 속이 안 좋아졌다. 이대로는 큰일을 치를 것 같았다. 간신히 속을 가라앉히고 테이블로 돌아오자 이름과 간단한 인사말을 나눴던 동기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성준 오빠가 숙취 해소제 사 왔어요. 일단 이거라도 먹어요.”
“응… 고마워. 하…. 나 근데 머리가 좀 아파서 이제 가 봐….”
“신입생? 잠깐 나랑 바람 쐴래? 혹시 담배 해?”
어깨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인지 모르는 얼굴의 남자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슬쩍 눈을 돌려 해수를 보자 입 모양으로 ‘선배, 선배’ 하고 반복하며 알려 주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와서인지, 아니면 10살 많은 선배보다 1살 많은 선배가 더 무섭다고 할 때의 그 선배여서 그런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뇨, 안 합니다.”
“그래? 그럼 그냥 옆에 있어. 뭐 해, 나가자.”
“아, 네….”
말이 짧은 그였지만, 늦게 대학에 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속이 뜨겁고 열이 나서 옷을 벗었는데 밖에 나오자 서늘한 날씨에 닭살이 돋았다.
“추워? 덮을래?”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담배 연기가 전해졌다. 미간이 자연스럽게 일그러진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가 건네는 옷을 거절했다. 그러자 남자는 느끼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얼굴을 때리면 다리 사이를 세게 때리려고 했는데 그가 내 귓불을 슬쩍 만지며 웃었다.
“귀엽다, 몸이 하얘서 그런가. 잘 빨개지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