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
“죄송하지만 저 편의점에서 소화제 하나만 사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속이 너무 좋지 않아서….”
준석은 태범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와 동시에 아랫배를 붙잡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멈춰 선 차에 뒤에 있던 차가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창식이 큰맘 먹고 샀다던 검은색 외제차였다. 일반적인 경적보다 작고 조심스럽게 울려 퍼지는 소리였지만 약 기운에 취한 태범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차에서 내렸다.
“후우…”
어느덧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태범은 지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
곧장 상비약 코너로 향하던 태범의 걸음이 멈칫 굳었다.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태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계산대에 서 있는 남자, 아니 유원을 바라보았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여전히 착하고 온순한 얼굴로 큰 눈을 깜빡거리는 유원의 모습에 태범은 숨을 멈추었다. 유원과 마주친 두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태범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다 먼저 시선을 피했다.
“괜찮습니다….”
“네,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유원이 시선을 돌리고 나서야 태범은 그를 바라보았다. 물건을 정리하는 유원의 모습에 태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언젠간 유원을 만나게 된다면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은 유원을 보게 될 거라고. 그래서 기억을 잃은 유원과 마주치게 된다면 자신 또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야겠다고,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저도 모르는 순간 상처를 받았다.
“안녕히 가세요!”
그저 친절한 얼굴로 저를 대하며 쉽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너무나 아팠다. 자신은 여전히 가슴이 끓도록 유원을 사랑하는데,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유원의 모습이 쓰라리도록 아팠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편의점을 나온 태범은 조용히 차에 올라 숨을 터뜨렸다. 태범의 얼굴을 확인한 준석은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한 방울씩 쏟아지는 비가 태범의 마음을 대변하는 밤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태범은 직접 차를 몰아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이 보이는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운 그는 늦은 새벽까지 일을 하는 유원을 눈에 담았다. 수많은 손님을 상대하면서도 밝게 웃는 얼굴로 일하고, 틈틈이 공부를 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밝아 보여서 다행이네….”
역시 유원이는 밝은 얼굴이 잘 어울렸다. 그때처럼 슬퍼하고 생기를 잃은 모습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태범은 하늘에 붉은 해가 천천히 떠오를 때까지 유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금은 이 시간마저도 그에겐 너무 소중했다.
그날 이후로도 태범은 가끔, 사실은 거의 매일 유원이 일하는 편의점을 찾았다. 처음엔 그냥 잘 지내는지, 조금만 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쌀쌀해진 날씨에 아픈 곳은 없는지. 등등 정말 잠깐만 그를 보려고 했던 것인데 이제는 거의 태범의 일과가 되어 버렸다. 태범은 아예 돈을 주고 구매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유원을 바라보았다.
“스토커도 아니고….”
픽, 오랜만에 태범의 입가에 미소가 물들었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참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잊겠다고, 보내 주겠다고 해 놓고 이렇게 매번 찾아와서 몰래 지켜보다니. 금세 미소를 지워 낸 그는 눈을 감았다.
“딱 오늘까지만… 오늘까지만 보고 가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혼잣말을 되뇐 그는 다시 유원의 모습을 응시했다. 밥도 먹지 않고 얼마 동안이나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태범의 눈에 수상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쩐지 익숙한 모양의 문신 또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데에 한몫을 하기도 했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남자가 유원의 손목을 움켜쥐는 순간 태범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린 태범은 얼굴을 가릴 만한 것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가면 하나가 들어왔다.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생김새의 가면이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장 가면을 쓰고 편의점으로 향한 태범은 놀란 얼굴을 한 유원과 그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놔.”
“뭐야? 이 호랑이는.”
“셋.”
유원은 당황한 것 같긴 했지만 다행히 태범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는 다시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
“윽!! 아, 아파, 으악, 아파!”
남자의 두툼한 손목이 잔뜩 일그러져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칼을 떨어트렸다. 태범은 유원이 놀라지 않게 칼을 발로 밀어내 저 멀리 치웠다.
“경찰 부르세요.”
“아, 네, 네…! 감사합니다.”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꾸벅 숙인 유원은 책상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눌러 경찰을 불렀다. 태범은 아프다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목을 가볍게 내리쳐서 조용히 잠재우고 뒤늦게 도착한 경찰에게 남자를 넘겼다.
“서로 가실까요.”
“네.”
“저 학생은-”
“저만 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태범은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는 유원을 보고 경찰에게 말했다. 태범이 건넨 명함을 내려다본 경찰은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남자를 경찰차에 밀어 넣었다.
“저기….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래.”
“아, 저….”
태범은 머뭇거리는 얼굴로 제게 포도 주스 하나를 건네는 유원을 올려다보았다. 민망한 것인지 귓불을 붉히는 얼굴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유원은 비록 기억을 잃었지만 그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태범은 유원이 건네는 포도 주스를 손에 쥐고 그의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잘 마실게, 꼬맹이.”
***
“본사와 연락했고 명의만 돌리되, 점주와 모든 아르바이트생은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알바생 시급, 더 올려 주고.”
“알겠습니다.”
“수고했어.”
준석은 갑작스러운 태범의 편의점 인수에 놀란 것도 잠시, 뒤늦게 알게 된 내막에 얌전히 그를 도왔다. 처음엔 편의점 하나를 인수해야겠다는 그의 말에 편의점 사업을 구상하는 건가 했지만, 그 끝엔 유원이 있었다.
태범이 말한 대로 알바생들의 시급도 넉넉하게 주고,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유원의 학비도 지원해 주었다. 준석은 아는 척을 할지, 말지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오늘이 검정고시 시험이라고 합니다.”
물론 주어는 생략되었다. 그러나 준석도, 태범도 그 사람이 유원이라는 걸 알았다. 준석은 지난 늦은 밤, 혼자 저택을 빠져나가는 태범의 모습을 기억하곤 그에게 작은 종이쪽지를 건넸다.
“지금 가시면 딱 맞게 끝났을 겁니다. 잘 보셨는지 궁금하실 거 같아서.”
태범은 유원이 시험을 치르는 학교가 적힌 메모지를 바라보다 이내 급히 재킷을 챙겨 입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준석이 건네준 쪽지에 적힌 한 중학교로 향하던 태범은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오늘 일기예보에 없던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다.
학교 근처에 다다라 차를 멈춰 세운 태범은 멀리서 쏟아지는 비를 피해 작은 천막 아래에 서 있는 유원을 발견했다. 후, 하고 숨을 내쉰 태범은 글로브 박스를 열어 핫 팩을 꺼냈다.
차에서 내리자 지나가는 여우비처럼 축축하게 내리던 비가 거센 물줄기를 쏟아 내고 있었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모습에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유원에게 향했다.
“우산.”
“…네?”
“쓰고 가라고. 난 있으니까.”
태범은 추위에 몸을 작게 떠는 유원에게 핫 팩을 건네주고 그의 손에 억지로 우산을 들려 주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선 태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고했어, 유원아.”
빗소리에 전해지지 않을 말을 내뱉는 태범의 발걸음이 쓸쓸했다. 그는 비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씁쓸해진 입 안을 훑었다. 유원을 혼자 두고 오는 것이 아닌 옆자리에 그를 태우고 그가 좋아하는 저녁을 먹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혼잣말이 아닌 그동안 수고했다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그에게 말을 건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태범은 아쉬움만 남은 그 자리를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끝내 제 욕심인 줄 알면서도.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과 함께 하나둘 교문을 빠져나오는 학생들 사이로 유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태범은 그때와 다른 행복한 현실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에 유원의 코트에 물방울이 작게 맺혔다. 급히 그에게 달려간 태범은 유원에게 우산을 씌워 주며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수고했어, 유원아.”
“저 이제 완전히 끝났어요.”
“잘 본 거 같아?”
“조금? 헤헤…. 그래도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그날의 기억과 달리 뺨을 붉게 물들이고 웃는 유원의 미소에 태범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던 응어리가 녹아내렸다. 태범은 유원의 손을 꽉 잡고 입을 맞추었다.
“가자, 우리 집으로.”
태범은 매일매일 유원과 함께하는 시간에 감사하고 소중한 마음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얼굴로 그저 해방감에 웃음을 터뜨리는 유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이 미소를 영원히 지켜 주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