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
“형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태범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유원이 자살 시도와 함께 완전히 기억을 잃었다는 소리를 들은 지 몇 달이 지난 때였다. 매일같이 술과 무리한 회사 일을 반복하던 태범은 우성 알파임에도 몸이 빠르게 망가져 갔다. 눈을 뜨자 알싸한 소독 냄새가 느껴지는 탓에 태범은 미간을 찌푸렸다.
“형님!”
곧장 링거를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태범을 준석이 다급하게 말렸다. 페로몬이 일정하지 않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며칠은 병원에 입원하는 게 좋다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다. 그러나 태범은 준석을 밀어내고 병원복을 갈아입은 뒤 병실을 빠져나왔다. 준석은 기어코 직접 차를 운전하려는 태범을 말리곤 운전대를 잡았다.
백미러를 통해서 본 태범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이럴 거면 다시 유원을 찾아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유원에게 다시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던 태범의 말을 떠올린 준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
착잡한 심정으로 멈춘 신호를 기다리던 준석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유원이었다. 태범의 고개도 그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유원을 떠나보낸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태범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고 그가 갈피를 잃은 아이와 같은 얼굴을 했다.
“형님!”
태범은 곧장 차에서 내려 유원이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분명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유원이 제 눈앞에 있었는데. 차에서 내리자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태범은 거센 빗줄기를 맞으며 허탈하게 서 있었다.
뒤늦게 차에서 내린 준석이 우산을 들고 태범에게 다가갔다. 이미 한차례 쓰러진 그가 걱정되었다.
“이만 돌아가시죠.”
미련이 남은 얼굴로 유원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태범의 모습에 준석의 한숨이 깊어져 갔다.
차로 돌아와 운언동으로 향하던 준석은 백미러를 통해 머리를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태범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짓이겼다.
오랜 시간 동생으로서, 부하로서 그의 곁에서 함께했던 준석은 이처럼 힘들어하는 태범의 모습을 지켜만 보는 것이 힘들었다. 사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힘들어했던 태범이었지만, 자신이 보기엔 태범은 그때보다 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쉬십시오.”
집으로 돌아온 태범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자 조금 전 유원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갔다. 밝게 웃던 유원이와 슬픈 얼굴로 저를 붙잡던 그의 모습,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던 유원의 모습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하아, 하아.”
너무 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몸을 일으킨 태범은 물도 없이 두통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욕실로 향했다. 옷을 입은 채로 찬물을 뒤집어쓰고 나서야 유원에 대한 생각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일 뿐이었다. 거울 너머, 파랗게 질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 태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유원이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가 없는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유원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유원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죄책감에 죽어 가던 유원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유원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이 고통받는 게 나았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향하고 싶었던 태범은 이를 악물었다.
“유원아… 유원….”
“형, 괜찮아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뜬 태범은 제 앞에 있는 유원의 모습에 숨을 멈추었다. 그러자 유원이… 아니, 유원의 모습을 한 환영이 울음을 터뜨리며 태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다정한 손길에 태범은 그를 따라 울고 싶어졌다.
“유원아.”
“누가, 흐윽, 이렇게 아프래요…. 흐흑.”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는 상황에 태범은 제 앞에 있는 유원이 모두 허상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유원은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잔인할 만큼 그리웠던 손길에, 태범은 그때마다 쉽게 무너져 내리곤 했다.
“형, 아프지 마요….”
이렇게 아직도 눈을 감으면 네가 생생한데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태범은 유원의 숨결도, 그의 체취도, 사소한 작은 버릇까지도 모두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도 손을 뻗어 유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유원아.”
약해진 마음을 비집고 제게 다가온 유원을 향해 태범이 자신의 진심을 인정했다. 유원이 없이는 안 됐다. 그가 없는 삶은 지옥과 마찬가지였다. 태범은 유원이 사라질까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원아….”
야속한 유원은 언제나 그랬듯이, 늘 그랬듯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태범은 유원의 허상 대신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을 바라보았다. 제 손이 그려 낸 그림자를 내려다본 태범은 손에 제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 냈다.
차라리 그를 따라 모든 기억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태범은 지독하리만큼 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기억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움에 지친 숨을 토해 냈다.
“보고 싶어, 유원아….”
***
“형님.”
피로 엉망이 된 태범에게 걱정스러운 얼굴의 준석이 손수건을 건넸다. 피를 닦아 낸 태범은 무감정한 얼굴로 앞만 응시했다.
“다음은 어디야.”
“나머지는 애들한테-”
“박준석.”
준석은 태범의 차가운 목소리에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제야 태범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올랐다. 태범은 벌써 몇 달째 스스로를 혹사하여 사소한 현장까지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어제는 정말 죽을 위기까지 갔던 태범이었다. 준석은 태범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했다.
운언동에 도착한 준석은 많은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든 태범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같이 약과 술에 의존해 겨우 잠이 든 태범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묵묵히 그를 바라보던 준석은 결심한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통화음이 흘러간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저 준석입니다. 잠시 뵈었으면 합니다.”
-태범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냐.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과 함께 권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범의 수술로 그간에 있었던 모든 일을 알게 된 권 회장이었다.
-건너오거라.
“네.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준석은 조용해진 집 안을 천천히 빠져나와 다시 회사로 향했다. 붉게 내려앉은 노을을 따라 회사에 도착한 준석은 회장실과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가 회장실에 도착하자 비서가 곧장 문을 열어 주었다. 회장실로 들어간 준석은 소파에 앉아 있는 권 회장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준석의 행동에도 권 회장은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후…. 할 말이 뭔데 이러는 것이냐.”
“회장님. 형님을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준석은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다. 그리고 회장님께 해서는 안 될 말이란 것도. 하지만 더 이상은 그저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이러다가 태범까지 죽어 버릴까 봐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무서웠다.
“…후우….”
권 회장은 오랜 시간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 들었다. 그가 불을 붙이고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요즘 태범의 상황을 권 회장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미친놈처럼 직접 현장을 오고 가며 화풀이라도 하듯 제 몸을 함부로 쓰는 하나뿐인 제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형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많이 아파하고 계십니다.”
“그것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권 회장은 씁쓸한 입맛에 입술을 훑어 내리며 대답했다. 젊은 부부가 먹고살기 바빠 잠도 못 자고 일을 나가다 일어난 사고였다. 사고의 결과는 끔찍했지만 원인은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미 부모를 잃어 상심할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가 부모 없이도 잘 자랄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해 주고 조금이나마 생활비까지 지원해 주었다.
“죽을까 봐. 저러다 형님 돌아가실까 봐 무섭습니다.”
“…….”
“죄송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
하지만 태범이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아이가 그 아이였다니. 권 회장은 어두운 얼굴로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어떤 선택이 모두를 위한 것인지 그 어떤 때보다도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태범 또한 잃고 싶지 않았다. 권 회장은 눈을 감고 우연히 길에서 봤던 태범과 유원이 함께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
“형님.”
태범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피곤한 눈을 떴다. 매일 흠뻑 젖는 피 냄새에 코끝이 마비되는 느낌이라 약을 먹고 한숨 자던 차였다. 저를 깨우는 소리에 집에 도착한 것이라 생각한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형님 그, 그게 아니라….”
태범의 눈에 창문 너머로 24시간 밝게 불이 켜져 있는 편의점 하나가 들어왔다. 뭐지. 느릿하게 회전하는 머리에 한쪽 눈을 찡그린 태범은 고개를 돌려 준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