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
“끝나는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오늘 모의고사라 좀 일찍 끝나요.”
오늘은 수능을 보기 전 마지막으로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었다. 사설 시험이긴 했지만 이다음에 보는 시험은 수능이라는 생각 때문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조수석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한 손에는 빼곡하게 적은 깜지가 들려 있었다.
“잘됐네, 유범이랑 저녁 먹고 들어가자.”
“좋아요, 유범이 나한테 완전 삐쳤어.”
그동안 수능 준비 때문에 많이 놀아 주지 못해 토라진 유범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입시를 준비하면서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유범이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얼른 수능을 끝내고 아이와 함께 있고 싶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형이 내 옷을 꼼꼼하게 입혀 주곤 훤히 드러난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 주었다. 형의 페로몬 향이 짙게 스며든 목도리는 평소 그가 매고 다니던 것이었다. 폐부로 깊게 차오르는 페로몬 향에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형,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
형이 둘러 준 목도리 덕분에 그와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분 좋은 착각에 배시시 웃음을 터트리며 학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 유원을 잘 달래 학원을 보냈다. 태범은 제가 둘러 준 목도리에 코를 킁킁거리며 건물로 들어간 유원의 뒷모습을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유원이 사라진 건물을 바라보던 태범은 자신을 일깨우는 핸드폰 진동에 고개를 숙였다. 기다렸던 전화에 핸드폰을 든 태범이 유원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상철은.”
-지금 데리고 강화 공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보지.”
전화를 끊은 태범은 차를 몰아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5시 전까지 모든 일을 해결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속도를 높여 인천으로 향하는 태범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순식간에 강화에 도착한 태범은 익숙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비릿한 냄새가 태범의 코를 찔렀다.
“형님.”
본가에서 유범이를 돌보고 있는 준석을 대신해 명훈이 태범에게 다가왔다. 그가 마련한 의자에 앉은 태범은 오늘 아침 출소한 모습 그대로 맞은편 의자에 묶여 있는 상철을 바라보았다.
이미 부하들에게 몇 대 맞은 상철의 얼굴과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상철은 찢어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태범과 두 눈이 마주치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도 태범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히려 그 옆에 있던 태범의 부하들이 주먹을 꽉 쥐고 보스의 명령만 기다렸다. 그러나 태범은 김상철을 마주하며 고조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기 와 있는 이유를 알겠지.”
태범은 길고 긴 악연을 끝내기 위해 입을 뗐다. 이미 7년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이었다. 혼탁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날의 유원이 떠올랐다. 그날 김상철을 놓쳤던 것이 이런 화를 불러일으킬 줄 알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차유원이….”
“닥쳐. 네가 감히 입에 담을 사람이 아니야.”
차분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태범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더러운 입에서 나오는 유원의 이름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상철은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차유원이 자살 시도를 한 게 과연 나 때문만이었을까?”
태범의 굳어진 얼굴을 본 상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감에 찬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자신은 그저 차유원이 몰랐던 사실을 말해 준 것뿐이었다. 애초에 차유원은 권태범에게 버림받았다. 그걸 자신이 거두려던 것뿐이었다.
“사실을 알려 준 건 나지만, 걜 버린 건 너잖아.”
상철은 그래서 늘 억울했다. 왜 자신은 안 되는지. 권태범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다고 차유원을 갖지 못하는 것인지. 오랜 시간 쌓아 두었던 분노가 터진 상철은 충혈된 눈으로 태범을 노려보았다.
“그래. 유원이를 힘들게 한 원인에 나도 포함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네 죄에 면죄부가 될 순 없어.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유원이가 낭비한 시간을 생각하면 널 곱게 죽이는 것도 시원하지 않군.”
“너는, 넌…!”
상철은 당장이라도 태범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듯 몸을 들썩거렸다. 그러자 태범은 특유의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각인이라고 아나?”
아무리 베타로 살아온 상철이라도 각인에 대한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상철은 태범의 입에서 나온 각인이라는 말에 충혈된 눈에 힘을 주었다. 실핏줄이 터지고 그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니 유원이한테 진 죄는 평생 그 옆에서 갚으면서 살아야겠지.”
“왜, 왜! 나는 안 되는데!”
“차유원이 선택한 사람은 나니까. 그게 너랑 내가 다른 유일한 이유야.”
태범은 억울하다는 듯 공장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김상철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직전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멘트를 담은 기계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치워. 다신 안 보이게.”
유원은 김상철이 평생 감옥에서 썩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점차 잊어 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유원의 곁에서 평생 죗값을 치를 것이다.
상철의 말대로 왜 자신만 그의 곁에 있냐고 물어도 어쩔 수 없었다. 유원에 관한 일에서만큼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유원과 함께라면 이기적인 사랑도 그의 몫이었다.
“아아아악!!!”
점차 상철의 목소리가 잠잠해져 가고 이로써 지난 7년 간의 지독한 악연은 완전히 끝이 났다.
***
“형수님, 신분증! 신분증이요!”
“으아, 네네!”
드디어 운언동 식구들이 기다렸던 유원의 수능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오가는 유원과 부하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범이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분명 어제저녁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인지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압빠아-!”
“응? 이것도 챙기라고?”
유원이 수능 준비를 시작하면서부터 새로 고용한 육아 도우미 품에 안겨 있던 유범이 자신의 애착 인형을 내밀었다. 호랑이 캐릭터가 그려진 애착 이불 다음으로 가장 아끼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유원에게 물건을 하나씩 챙겨 주자 자기 딴엔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유버미 꺼, 빌려주는 고야!”
“정말? 고마워.”
유범이가 건네준 호랑이 인형을 품에 안고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매일같이 유범이가 들고 다니는 거라 그가 얼마나 아끼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가슴이 부풀어있는 유범이의 모습을 보자 차마 아이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유원은 한 손에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유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시락도 챙기셔야죠!”
“아, 맞다!”
“손 시리니까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가세요.”
한 손에는 인형을, 다른 한 손에 도시락을 대롱대롱 들고 가려는 유원을 말린 주방장이 가방에 짐을 차곡차곡 넣어 주었다. 그 맞은편에선 준석이 그를 따라다니면서 체크 리스트를 확인하기 바빴다. 태범은 거실 소파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다 20분이 넘어간 시계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챙겼으면 이제 가야지.”
액상으로 된 청심환을 마시고 있던 유원이 입 안에 있는 것을 꼴깍 삼키고 태범을 돌아보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는 듯 울상을 짓는 얼굴에 태범은 유원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가방을 대신 들었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모든 사람의 응원을 받은 유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심호흡한 태범을 따라갔다.
“조금 더 있다가 갈래?”
“아니요, 미리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더 볼게요.”
시험장 앞에 차를 세운 태범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마른 입술을 깨무는 유원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유원이 누구보다 열심히 한 걸 자신이 가장 잘 알았고, 모두가 알았다. 지금까지 노력한 만큼 결과가 잘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태범은 자신과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나누어 낀 유원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지금까지 잘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와.”
“…그동안 다들 많이 도와주셨는데 수능 망치면 어떡해요. 그래서 대학도 못 가면…”
“아버지가 잔디 깔아 주시겠지. 내가 건물 세우면 되고.”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머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대답에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유원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태범은 조금 흐트러진 유원의 머리를 정리해 주고 고개를 숙였다.
쪽.
“정말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유원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이 미안했지만 그래도 형이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품에 안겨 있는 호랑이 인형을 한껏 끌어안은 유원은 은은하게 배어나는 아기 냄새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응, 저 진짜 이제 힘 나요! 잘하고 올게요.”
주먹을 꽉 쥐고 다짐한 유원과 태범이 함께 차에서 내렸다. 수능 한파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 아직 11월이었지만 날씨가 무척 추웠다. 유원이 단단히 껴입었음에도 태범은 다시 한번 옷을 여며 준 후 마지막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잘 다녀와.”
“네….”
태범은 멀어지는 유원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채 한참을 교문 앞에서 서 있었다. 마침내 유원의 페로몬 향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차에 돌아온 태범은 눈을 감았다. ‘그날’. ‘그날’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