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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122화 (122/136)

외전 6

결국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까지 형에게 시달린 끝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할머니와 아버님에게 유범이를 맡기고 몇 시간이나 호텔에서 관계를 가졌다는 생각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내가 초조하게 다리를 떨며 어쩔 줄 몰라 하자 그가 웃음을 머금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혼인데 뭐 어때. 그러라고 두 분도 시간 내주신 거고.”

“그래도 이건 어, 어떡해요.”

서로의 페로몬을 마음껏 내뿜은 탓에 아무리 샤워를 해도 진득한 향이 지워지지 않았다. 형이 내 목을 잘근잘근 짓이겨 씹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민망해하는 나와 다르게 형은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웃으며 차를 몰았다.

“다… 녀왔습니다….”

내가 눈치를 보며 집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서 유범이를 보고 있던 할머니와 아버님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다.

“잘 다녀왔누. 아이고, 춥겠다.”

“자, 잘들 놀고 왔나 보구나…. 크흠.”

베타여서 잘 모르는 할머니와 달리 아버님은 이런 우리의 상태를 한 눈에 눈치채신 건지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내고 왔습니다. 두 분, 식사는 하셨습니까?”

형은 뻔뻔하게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형과 달리 부끄러움에 어쩔줄 몰라 하는 나를 발견한 유범이가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우으아, 빱빠아!”

“유, 범아.”

호빵이의 부름이 이렇게나 반가운 건가. 어느 때보다도 반가운 소리에 할머니의 품에서 유범이를 안아 들었다. 반나절이나 못 봐서 그런지 유범이가 내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아고, 지 아비 오면 자려고 여태 안 잤나 보다.”

“헉, 오늘 아예 안 잤어요? 호빵이, 그랬어?”

“우으으, 우아.”

턱 아래로 흐른 침을 닦고 유범이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린 아기를 두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피곤함이 가득 물든 눈동자가 깜빡깜빡 속눈썹에 가려졌다가 떨어지더니 이내 호빵이의 두 눈이 감겼다.

“크흠, 너희들은 그, 저, 저녁은 먹었느냐?”

당황한 나머지 아버님의 말이 꼬였다. 사극 톤의 물음을 알아들은 내가 입을 벌리고 형을 올려다보았다.

“저흰 아직 안 먹었습니다. 두 분도 아직 식사 전이면 같이 하시죠.”

“난 저, 저녁 선약이 있어서. 여기 사돈 어르신이랑 같이 먹으려무나. 아가, 난 다음에 또 오마. 그럼, 사돈 어르신. 편히 있다 가십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빠져나가는 아버님의 모습에 뺨이 화끈거렸다. 하… 진짜. 앞으로 아버님 얼굴을 어떻게 보라고. 내가 호빵이를 꽉 끌어안은 채 눈을 감자 형이 작게 웃으며 내게서 유범이를 넘겨 받았다.

“할머님, 그럼 식사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잠시만 유원이랑 대화하고 계십시오.”

“그려, 권 서방. 유범이 얼른 눕히고 내려오게.”

“네.”

형은 익숙한 자세로 유범이를 품에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형이 사라지자 할머니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유원아.”

“네, 네?”

“권 서방이 예쁜 옷으로 사 줬나 보네.”

역시…. 우리 할머니 눈썰미를 깜빡 잊고 있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모르는 척까지. 나는 아까보다도 더 화끈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할머니의 웃는 목소리가 귓가에 스쳐 볼 안쪽을 꽉 깨물었다. 1월임에도 어느 때보다도 더운 날을 보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단둘이서의 외출은 끝이다, 끝.

***

세상을 이불처럼 포근하게 덮고 있던 눈이 녹아내리고 따스한 봄이 찾아왔다. 벌써 두 번째 봄을 맞이한 유범이는 호기심이 엄청 많았다. 저번에는 설아 선생님의 결혼식에서 받은 부케를 잘 말려 액자에 꾸며 놓았는데 그것을 건드리는 탓에 정말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었다.

누가 형의 아이 아니랄까 봐 성장은 어찌나 빠른지. 돌이 되기도 전에 걸음마를 뗀 유범이는 무럭무럭 자라 매일같이 집 안을 들쑤시고 다니기 바빴다.

“유범아!”

“파파!”

“아빠 많이 놀랐잖아.”

“여기 파파 킁킁 마니 나!”

잠깐 유범이를 재우고 주방에 내려갔다 왔는데 아이가 사라져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자기 방을 만들어 줘도 유범이는 항상 형과 내 옷장에 숨어 있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마 여기가 형과 내 페로몬이 잔뜩 있는 곳이라 아이한테 안정감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가 좋았어?”

“웅!”

“그랬구나. 그래도 다음부턴 말도 없이 사라지면 안 돼. 아빠 정말 놀랐단 말이야.”

“웅, 아라써. 파파, 미안.”

갑자기 사라져서 너무 놀랐지만 이렇게 내 뺨에 입을 맞춰 주는 아이를 보니 놀란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침이 범벅된 입가를 닦아 주고 유범이를 꽉 안아 주었다. 작은 손이 내 목을 감싸고 배시시 웃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형이랑 하는 짓이 똑같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도 그랬지만 유범이는 커 가면서 형을 빼닮기 시작했다. 눈 색만 나를 닮은 게 아니었으면 형을 축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관뿐만 아니라 하는 짓도 비슷할 때가 많았다. 이렇게 양손으로 내 뺨을 잡고 오랫동안 나를 응시한다거나, 힘을 주어 내 목을 끌어안는다거나.

그럴 때면 진짜 웃음이 나왔다. 또 형을 빼닮은 유범이는 얼마 전 영유아 발현 검사에서 우성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아주 크다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그것도 우성의 수치가 아주 높은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형의 집은 우성 알파로 발현했다고 하지만 요 조그만 아이가 형처럼 일찍 분가를 한다고 하면 속상할 것 같았다.

“유범아, 너는 결혼할 때까지 아빠랑 같이 살아야 돼, 알겠지?”

“우응! 조아!”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유범이는 꺄르르 웃으며 나를 꽉 잡았다. “마음 같아선 평생 같이 살고 싶다.”라고 속삭이자 뒤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이른 퇴근을 한 건지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형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 왔어요?”

“오늘도 잘 있었어?”

내 이마에 입을 맞춘 형이 작게 웃으며 유범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아들도 잘 있었어?”

“아빠!”

유범이의 이마에도 입을 맞춘 형이 나를 돌아보며 내 눈가를 문질렀다. 곧 있을 결혼 준비로 요새 통 잠을 못 자서 그런지 피곤한 것을 형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유범이를 따라 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많이 늦었지만 우리는 조만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오늘은 일찍 자.”

“치…. 형이 안 재우는 거면서.”

형을 올려다보자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뺨을 문질렀다. 그날 이후로 형은 고삐가 풀린 건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눕히는 바람에, 뭐…. 나야 좋지만 우리의 정력적인 밤은 매일 지속 되었다.

“그래도 형이랑 결혼한다니까 뭔가 여기가 간질간질하고 그래요.”

“다행이네.”

“뭐가요?”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바라보자 형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차유원이 나한테 질릴까 봐 걱정했는데, 아직도 설렌다고 해 줘서.”

“큭큭, 그게 뭐예요. 이렇게 잘생기고 착한 남편인데 누가 질린다고.”

까치발을 하고 형의 뺨에 입을 맞추자 그가 또다시 보기 좋은 미소를 띠고 나를 끌어안았다. 예전의 일은 생각하기도 어려울 만큼 형은 웃음이 많아졌다. 그리고 나도 너무 행복했다.

갑자기 중간에 끼게 된 유범이가 제 눈을 가린 태범의 손을 끌어 내리더니 “파파?” 하고 고개를 들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올려다보는 맑은 눈동자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

“아, 너무 귀여워!”

“유버미 나비네따이 해써여.”

동준 아저씨의 품에 안겨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유범이가 너무 귀여웠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범’이라는 발음이 잘 안 되는 말투가 사랑스러웠다. 형을 작게 줄여 놓은 것처럼 머리를 올리고 조그만 나비넥타이를 한 모습이 꼬마 신랑 같았다.

“오늘 형님이랑 형수님 결혼식인 걸 아는지 도련님이 얌전히 있었는데, 형수님을 보니 반갑나 봅니다.”

“아, 정말요? 유범이 안 울고 잘 있었어?”

“웅! 유버미 착해!”

“맞아, 우리 아들 진짜 착해.”

결혼식 때문에 새벽부터 나가느라 유범이를 아저씨들에게 부탁했다. 옷까지 예쁘게 차려입은 유범이를 보자 긴장되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형과 내 결혼식이라니. 어쩌다 보니 자꾸만 미뤄지게 되어서 결혼한 지 3년 만의 결혼식이었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에 서 있는 이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다.

“여기 부탁하신 청심환이요. 형님도 필요하시려나?”

“에이 우리 형님이?”

“아까 잠깐 만나니 얼굴이 조금 굳어 있으시던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동준 아저씨에게 청심환을 부탁했다. 액상으로 되어 있는 청심환을 마시자 콩닥거리는 가슴이 진정된 것도 같고.

“오늘 너무 멋지십니다. 형수님.”

“원래도 외모가 출중하셨지만, 오늘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멋있으세요.”

“헤헤, 감사합니다. 아저씨들도 멋져요.”

매일같이 보는 검은색 정장이지만 모두가 열심히 꾸민 모습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내가 유범이를 품에 안은 채 엄지를 치켜올리자 유범이가 그런 나를 어설프게나마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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