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119화 (119/136)

외전 3

사실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하고 아버님은 우리 집에서 열흘 정도 지내셨다. 당연히 내가 걱정되고 유범이를 사랑하셔서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그러신 거였겠지만 형은 그때를 생각하면 피곤하다는 듯 절대 허락해 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때랑 다른데 말이다. 내가 죄책감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형은 단호했다. 형이 이렇게까지 싫어하면 어쩔 수 없지 싶다가도 아버님의 생각이 종종 났다. 얼른 운전면허를 따서 내가 직접 아버님 댁으로 가든가 해야지.

“으, 우으, 흐엥….”

유범이가 눈가를 문지르며 잠투정을 부렸다. 유범이를 내려다보자 분유 한 병을 다 먹은 뒤여서 그런지 눈에 졸음이 한가득 있었다. 등을 토닥여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랬다.

“우리 아가, 많이 졸려요?”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혀가 토막 난 말투가 나왔다. 형은 그런 내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내 볼을 톡, 하고 건드렸다.

“이리 줘, 내가 재우고 올게.”

“고마워요, 형.”

“아부아….”

유범이의 목을 받쳐 안은 형의 자세가 자연스러웠다. 살이 뽀얗게 오른 오동통한 뺨을 형에게 기대 눈을 꼭 감은 유범이의 모습을 보자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스며들었다. 형이 아이의 등을 몇 번 두들기지 않아 작은 콧방울 아래로 일정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금방 올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다음 내 이마에 입을 맞춘 형이 유범이를 재우러 간 사이 어제 깜빡하고 못 썼던 육아 일기를 꺼내 들었다. 아직은 별다른 일이 없어 매일 비슷한 내용의 연속이었지만, 꾸준히 쓰려고 노력했다. 볼펜 끝을 볼에 콕콕 누르며 마지막으로 오늘 아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어떤 걸 쓸까 고심하는데 등 뒤로 형의 향이 느껴졌다.

“일기 써?”

“네, 잠깐만요. 거의 다 썼어요.”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서둘러 일기장에 적고 마지막으로 맨 아래에 호빵이의 몸무게를 적으며 일기장을 접었다. 벌써 꽤 많이 쓴 일기장을 보자 뿌듯했다.

“이제 다했어요.”

“잘했어.”

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나를 껴안았다. 넓은 품에 고개를 묻자 조금 전 느꼈던 페로몬이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어… 좋긴 한데.

꼬르륵-

우렁찬 소리가 배에서 나와 내가 민망한 얼굴로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 저 배고파요….”

부부끼리의 음… 뭐랄까. 그런 달콤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데, 현실 육아는 정말 힘들었다. 돌아서면 배고프고 기력이 달렸다. 지금도 한바탕하고 나니 속이 허했다. 민망한 얼굴을 하자 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밥 먹어야지.”

형은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방문을 열었다. 아니, 임신했을 땐 양말도 혼자 못 신었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유범이를 낳은 지 거의 일 년이 다됐는데 왜 아직도 이러는지 정말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럼 아저씨들을 다 분가시키냐는 협박 아닌 협박에 조용히 형의 목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들, 진짜 저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오늘도 형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속으로 아저씨들에게 속삭였다. 내가 그를 끌어안는 게 좋은 듯 형의 기분 좋은 페로몬 향이 느껴졌다.

출산을 하고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페로몬 향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임신을 하면서 페로몬 향을 맡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형이 아니더라도 다른 알파나 오메가의 향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임신할 때보다 형의 기분을 잘 느낄 수 있는 점이 너무 좋았다. 형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 안고 그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식당으로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내가 생각하기에도 뻔뻔한 얼굴로 주방장 아저씨한테 인사를 했다. 다 큰 성인이 아기처럼 형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이상하지 않은지 주방장 아저씨는 익숙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수님.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호빵- 아니, 유범이가 오늘도 엄청 귀여웠거든요.”

“도련님은 언제나 귀여우시죠.”

이젠 나를 부르는 형수님이라는 호칭도 낯간지럽지 않았다. 날 조심히 의자에 내려 주는 형의 뺨에 입을 맞춘 뒤 귓가에 고맙다고 속삭였다. 음식을 가지러 간 줄 알았던 주방장 아저씨가 그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고 부끄러워 사레가 들었다. 내가 아무리 뻔뻔하다고 하지만 이번 건 좀 창피하다….

발끝을 곱고 눈을 또르르 굴리고 있자 형이 뻗친 내 머리를 문지르다 볼을 콕콕 찔렀다. 하지 말라고 눈에 힘을 주었지만 형은 내 볼을 찌르는 게 재밌는지 손을 멈추지 않았다.

“크흠. 큼. 맛있게 드십시오.”

“자, 잘 먹겠습니다….”

“수고했어.”

씨이…. 그러게, 하지 말라니까. 결국 주방장 아저씨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또 보이고 말았다. 어휴…. 형을 야무지게 노려본 다음 숟가락을 들었다. 두부가 큼지막하게 들어 있는 차돌박이 된장찌개가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된장찌개를 앞 접시에 덜어 밥이랑 같이 비벼 크게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차돌박이를 넣어서 그런지 고기 육수의 진한 국물과 두부와 야채가 한데 어우러져 환상의 맛을 만들어 냈다. 내가 계속 된장찌개 하나만 먹고 있자 형이 시금치 무침을 내 숟가락에 올려 주었다.

“골고루 먹어야지.”

“네에. 근데 이거 엄청 맛있어요.”

예전에는 맛있는 게 있으면 뭣도 모르고 내 입에 들어가는 것만 신경 썼는데 이젠 형이 생각났다.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인가? 입 안에 있는 음식물을 삼킨 뒤 형 앞에 절반쯤 비워진 된장찌개를 밀어 주었다. 형은 씨익 웃더니 내가 밀어 준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어찌나 뭘 먹든 이렇게 깨끗하고 깔끔하게 먹는지, 더러워진 내 앞 접시를 보다 형의 밥그릇을 보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쓰윽, 밥그릇 뒤에 앞 접시를 숨기자 형은 그걸 또 봤는지 작게 웃었다. 이번엔 예쁘게 말아진 계란말이를 입에 넣었다. 하… 너무 맛있다. 이게 진짜 사람 사는 거지. 출산 후 거의 한 달 동안 매일같이 먹었던 미역국을 떠올리면 아직도 속에서 미역이 느글거리는 것 같았다.

“아, 맞아. 형, 이따 할머니 오시는 거 알죠?”

“응, 아까 전화 드렸어.”

“헐, 언제요?”

“차유원, 수박 찾으면서 잠꼬대할 때.”

“제, 제가요?”

이제 몽유병 증세는 조금 나아졌지만 잠버릇은 여전히 험한 모양이었다. 저번에는 형 턱에 작게 멍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진짜 너무너무 미안했는데….

흐, 으엥….

유범이의 침대와 연결해 둔 모니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벌써 깼나? 아직 깰 때가 아닌데.

“다 먹었어. 내가 데려올게.”

“미안해요.”

매번 유범이를 봐 주는 사람은 형인 것 같아 미안했다. 형도 애를 키우는 게 처음이고, 나도 처음인데 왜 나만 이렇게 어설플까. 유범이가 내려오기 전 남은 밥을 입에 넣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곧 유범이의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밥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범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빠읍, 빠!”

“우리 아기 왜 깼어. 파파가 보고 싶었어?”

“흐에… 흐….”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서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유범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유범이는 내 품에 안기자 언제 울었냐는 듯 코를 훌쩍이다 배시시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직 손 타면 안 되는데 큰일이네요.”

유범이를 추슬러 안으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얼마나 열심히 울었으면 등이 땀에 살짝 젖어 있었다. 지금이야 아직 유범이가 태어난 지 일 년도 안 됐기 때문에 최대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형과 내가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고 있었지만, 형이 회사 일에 아예 손을 놓을 수도 없었고 나도 조만간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때문에 다음 달 즈음엔 육아 도우미를 쓸까 생각 중이었는데, 이렇게 나와 형을 찾는 유범이를 보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내가 있잖아. 더 필요하다면 육아휴직 연장해도 되고.”

“그냥 유범이가 좀 더 크면 공부할까요? 아직 너무 어린데….”

작년과 올해는 유범이를 낳느라 수능이 물 건너갔기도 했고,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었다. 내년에 있을 수능 준비를 본격적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유범이를 떼어 놓고 하려니 아직 너무 어린 아이가 마음에 걸렸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더 생각해 보자. 대학교는 꼭 가고 싶어 했잖아.”

“네, 알겠어요.”

형의 말이 맞았다. 아직 급한 것도 아니고 시간은 충분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유범이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이의 부드러운 살갗이 뺨에 닿자 이 순간도 잠깐이라는데, 이때 공부를 하겠다는 결정이 맞는 건지 다시 헷갈렸지만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형과 함께 산책도 하다 잠이 깬 유범이의 밥을 먹이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오늘 할머니가 오신다고 했는데 잘 오고 계시려나?

내가 아니더라도 매일 할머니께 안부 전화를 하는 형이었다. 형에게 할머니는 어디쯤 오시냐고 물어보니 역시나 이미 통화를 했는지 할머니가 탄 차가 서울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는 대답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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