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움]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외전
외전 1
출산을 하고 회복을 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찌나 빠른지 계절이 바뀐 것도 모르고 겨울을 흘려보냈다. 처음 경험해 보는 육아는 생각한 것보다 무척이나 힘들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하더니 그 말은, 정말 과장하나 안 보탠 사실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끼니를 챙겨 먹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호빵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속상해서 형의 품에 안겨 눈물로 지새우는 날도 종종 있었다.
“우으아.”
“예쁘다….”
그러나 유범이의 미소 한 번이면 힘든 것도 전부 씻겨 내렸다. 나를 향해 맑은 눈을 깜빡이는 아이와 눈을 마주할 때면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다.
아쉽게도 시간은 내 바람처럼 기다려주지 않았다. 형의 손바닥만 하던 유범이는 쑥쑥 자라 태어난 지 벌써 백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돌아오는 주말에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간단하게 백일잔치를 하기로 했다.
시간이 진짜 빠르게 흘러간다 했지만 벌써 100일이라니. 이러다 또 금세 한복을 입고 돌잔치도 하겠지. 그때 우리 호빵이는 돌잔치 때 어떤 걸 잡을까? 쑥쑥 커가는 호빵이를 보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직업을 상징하는 청진기나 법봉을 잡아도 좋겠지만 이미 형이 엄청나게 부자이니 그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게 실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떠올렸다.
“아우, 우!”
생각에 깊이 잠겨있을 무렵 카 시트에 앉은 유범이가 작은 옹알이를 터뜨렸다.
“미안. 아빠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깜빡했어.”
“부우아…!”
딸랑이를 잡기 위해 손 싸개를 한 만두 같은 손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아이의 시선이 딸랑이의 머리를 향한 것을 보고 그제야 허겁지겁 전원을 켰다.
형과 나 둘 중에 누구를 닮은 건지, 유순한 성격의 호빵이는 웬만한 일에 울지도 않고 얌전했다. 그런 아이가 기다리다 지쳐 소리를 냈다고 생각하니 더 미안해져 마음이 급해졌다. 헛손질을 몇 번 하고 나서야 딸랑이의 전원을 켤 수 있었다.
“꺄아…!”
딸랑이의 머리가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고운 선율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손 싸개 때문에 손에 쥐여 주진 못했지만 유범이의 앞으로 가져가니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우리 유범이 신났네.”
“유범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에요. 멋쟁이 토마토.”
방긋방긋 웃음을 터뜨리는 유범이를 핸드폰으로 사진 찍으며 형에게 말했다. 잘 나온 사진은 따로 하트를 눌러 보관함에 담아둔 뒤 침으로 범벅이 된 아이의 턱을 닦아줄 때였다.
“도착했어. 이제 내리자.”
“아….”
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후였다. 아침부터 무거운 마음을 아이와 형을 보고 애써 외면했는데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막막했다.
“부우!”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외출을 한 호빵이가 기분이 좋은지 딸랑이가 꺼진 것도 모르고 팔을 버둥거렸다.
유범이의 병원을 갈 때를 제외하면 지난 백일 동안 한 번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혹시나 찬 바람에 아이가 감기라도 걸릴까, 멀리 사막에서부터 넘어온 모래바람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 그렇게 집에만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수도 없고, 오늘은 잊을 수 없는 그날이기에 유범이를 데리고 아버님의 집을 찾아왔다.
“왔니?”
작은 옹알이지만 그것을 놓치지 않은 아버님이 우리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아버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래. 오는데 힘들진 않았고?”
“네.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출산 이후에 아버님을 몇 번 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은 아버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죄송스러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어색하게 끌어올린 입꼬리가 파들거렸다.
아버님께서는 형에게 들어 이미 내 부모님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했다. 형은 이미 허락을 받았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형의 뒤에 숨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있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오늘 부모님을 대신해 아버님께 사과를 하겠다고 스스로 각오하고 나왔지만 막상 아버님을 보니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결국 억지로 끌어올린 입술을 놓아 내리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니? 권태범, 이놈은….”
언제나 그랬듯 다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뒤에 서 있던 형이 내 등을 감싸고 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하셨어요?”
일부러 형이 말을 돌리는 걸 아셨는지 아버님은 고개를 끄덕이곤 유범이를 데려가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형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다음 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아버님과 형의 차로 각각 나눠 탄 검은 세단으로 근교에 있는 납골당으로 출발했다. 하늘은 안타깝게 돌아가신 어머님의 죽음을 슬퍼하듯 연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납골당은 차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익숙하게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아버님을 우리는 뒤따랐다.
“여보, 나 왔소.”
한 손엔 새하얀 국화꽃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유범이를 품에 안은 아버님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아버님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들자 처음 보는 어머님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젊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이.
또다시 접어 두었던 죄책감이 피부를 뚫고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급히 손을 들어 입술을 막았지만 옆에 있던 형에게는 그 소리가 들린 모양이었다.
“괜찮아? 잠깐 나가….”
“괘, 괜찮아요….”
오늘은 사과를 해야 했다. 그리고 형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나 같은 애가 형의 사랑을 받아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파들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어머님의 사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형과 닮은 듯 그렇지 않은 듯한 젊은 얼굴을 보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우는 것조차 너무 죄송해서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내 통제를 벗어나 흘러나왔다.
“죄송, 흐… 너무 죄송해요….”
내가 사진을 바라보며 가슴을 쥐고 있자 옆에서 내 어깨를 감싼 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위로를 받는 것도 어머님에게 너무 죄송하고 면목 없고 그냥 눈물만 나왔다. 완성되지 못한 단어가 부서지듯 입 밖으로 흘러나와 형체를 완전히 잃었다.
“너무 죄송해요… 흐윽….”
가슴이 뜯겨 나갈 것 같았다. 울지 말고 제대로 용서를 구하고 싶은데, 이 기회를 빌어 여기 있는 형과 아버님에게 부모님을 대신하여 사과를 해야 하는데 눈물만 주르륵 흘렀다.
“아가.”
“아버님, 제가 죄송, 흐윽, 너무 죄송해요….”
“유원아.”
“너무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너무 죄, 죄송해서….”
울고 있는 내게 다가온 아버님이 내 눈물을 닦아주셨다. 그런 아버님의 얼굴이 평온해 오히려 더 울음이 나왔다. 너무 죄송했다. 내 이기심 때문에 아버님과 모두를 힘들게 만들어 너무 죄송했다. 그리고 이렇게 늦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전부 다 죄송했다.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지?”
“…흑, 아버님….”
나를 바라보는 아버님의 눈빛이 원망을 담았을까 봐. 후회를 하고 계실까 봐 무서웠다. 그러나 아버님은 여전히 따뜻하고 안타까움이 물든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님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고생 많았다, 아가.”
“왜….”
“가끔 그분들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 아예 없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그게 너희들 잘못은 아니잖니.”
그 말을 시작으로 아버님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모든 기억을 잃고 형이 많이 힘들어하던 그 시절, 술을 먹고 아버님께 찾아간 형이 용서를 구했다고. 내가 아니면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울음을 토하는 제 아들을 보고 아버님도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 놓으시더니 마지막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 번은 너를 찾아갔단다.”
아버님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어딘가 향해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아버님은 이내 내게 시선을 돌리고 내 손을 잡아 주었다.
“태범이가 말한 대로 착하고, 순하고, 밝은 아이더구나.”
“흐윽….”
“모든 걸 다 용서하고 내 아들과 행복을 빌어 주고 싶을 만큼 말이다.”
“아버, 아버님….”
“그리고 이렇게 사랑스러운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아버님이 내게 주는 무한한 사랑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기서 가장 힘든 분은 아버님일 텐데도 나를 배려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감사했다.
“이미 유원이, 너는 나한테 자식이란다.”
“아버, 흑, 아버님.”
“그러니 이제 그만 힘들어하렴. 내 자식이 힘들어하는 모습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단다.”
아버님의 말에 모든 것이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아직 마음속 깊은 곳엔 죄책감이 있었지만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다정한 말이 너무 따뜻했다.
아버님의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쏟아 내는 동안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던 비도 어느새 그치기 시작했다. 비가 멈추고 구름이 걷힌 사이로 나온 햇살이 따스하게 우리를 감싸 안아 주었다. 따뜻했다. 그동안 얼어붙었던 마음이 모두 녹아내릴 만큼, 너무 따스한 햇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