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完)
“들켰네.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
“우와. 나 부산 진짜 가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이상하게 제주도나 다른 곳보다 부산에 가보고 싶었다. 제주도는 수학여행 때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그런가?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강릉은 저번에 가봤으니 부산에 있는 해운대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어떻게 찰떡같이 알았는지. 형은 가만 보면 박수무당보다도 더 내 마음을 잘 알았다.
“내가 차유원에 대해서 모르는 게 뭐가 있다고.”
“형. 제가 지금 숫자 일하고 이 중에 어떤 거 생각하고 있는지 맞춰보세요.”
속으로 숫자 3을 떠올리며 피식피식 웃었다. ‘설마 이것까지 맞추겠어?’ 속으로 생각하며 형과 눈을 마주 보았다.
형이 내 눈 아래에 떨어진 속눈썹을 떼어내 후 하고 불었다. 그러더니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삼.”
“헉.”
진심으로 깜짝 놀라는 나를 끌고 형은 공항 안으로 향했다. 역시… 도망칠 때마다 들킨 이유가 있다. 앞으로 형을 절대, 절대 속일 생각은 하지 말자고 혼자서 다짐했다.
아저씨들 없이 둘이서 가는 여행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해야했다. 형이 직접 티켓도 발권하고 짐도 부치자 시간은 술술 잘 흘러갔다. 의자에 앉아서 탑승 시간을 기다렸다.
“으….”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부터 아랫배가 조금씩 아파 왔다. 배뭉침이라고 하기엔 규칙적인 고통이었다.
혹시 진통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했지만 그러기엔 출산 예정일이 2주나 더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는 거여서 긴장되나? 배를 둥글게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리자 형이 물었다.
“왜, 어디가 안 좋아?”
“아뇨, 그냥 괜찮아요. 아…!”
괜찮다고 말을 하다말고 또다시 배가 따끔하고 아팠다. 진짜 왜 이러지. 순간 덜컥 겁이 나 형의 손을 꽉 잡았다.
형은 심각해진 얼굴로 안 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려는 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닌데 괜히 여행 첫날부터 분위기를 망치긴 싫었다.
“아니에요, 하나도 안 아…. 흐윽.”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축축함에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앉은 다리 사이로 물이 주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혀, 형… 어떡해요….”
고개를 들자 형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놀랐는지 눈이 커져 있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한 얼굴로 나를 안아 들었다.
“일단 숨 크게 쉬어.”
“왜, 벌써. 흐윽, 어, 어떡해요….”
괜히 여행을 간다고 해서 그런 걸까. 엄청난 후회가 몰려오며 호빵이가 잘못될까 겁이 났다. 나를 안은 형은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형수님!”
“유원 님!”
그 순간 멀리서 익숙한 얼굴의 아저씨들이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아저씨들…?”
그 와중에 변장이라도 했는지 뒤집어쓴 선글라스에 신문지까지 손에 든 아저씨들이 제각기 말했다.
“당장 벼, 병원에 연락하겠습니다.”
“형수님, 그 라마네즈 호흡이요, 후… 하고 하… 하고.”
라마즈 호흡이겠죠….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아저씨들의 모습에 긴장감이 확 풀렸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아저씨들을 따라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차분해지려고 노력….
“아!”
펑하고 아예 물이 확 쏟아지는 느낌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형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형이 페로몬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형 특유의 시원한 페로몬 향이 안심시키듯 나를 감쌌다. 천천히 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 되뇌면서 눈을 감았다. 형이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감은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출산 예정일보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이미 양수가 터져 급히 응급 수술로 진행되었다. 수술 준비를 하는 내내 처음 겪어보는 일에 불안함에 떠는 내 곁을 형이 지켜주었다.
“잘할 수 있어. 그냥 눈만 뜨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거야.”
“흑, 무서워요…. 우리 호빵이 잘못되진 않겠죠? 어떡해요. 나 때문에…. 흐엉.”
“괜찮아, 우리 아들은 씩씩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숨 크게 쉬어.”
형을 따라 호흡을 내쉬며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곧이어 준비를 끝마쳤다며 나를 데리러 온 간호사 선생님의 말에 떨리는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형, 사,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차유원!”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형을 보며 소리쳤다. 멀리 떨어지는 연인처럼 서로를 향한 달콤한 외침에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작게 웃었다.
***
“하아….”
태범은 오늘따라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초조해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달달 떨리는 다리를 한번 내려 보다, 다시 시계를 올려보는 등 부산스럽게 움직이자 옆에 앉은 준석이 말했다.
“형님. 형수님 들어가신 지 이제 30분 지났습니다.”
“알아.”
“그래도 31주 차면 늦은 조산이라고 하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보통 남성체 오메가의 출산일이 33주 차에 이뤄진다고 하니, 31주 차면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준석은 자신이 미리 알아본 내용을 전해주려다가 태범의 입술이 잔뜩 찢어진 걸 보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아무리 위로해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태범의 다리가 탈수기마냥 떨리다 못해 보이지 않을 때쯤, 수술실 문이 열리고 수술을 담당한 주치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범은 그와 동시에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왕자님이에요.”
“유원이는, 우리 유원이는 괜찮은 겁니까?”
태범은 아이보다도 유원의 상태를 물었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애타는 심정으로 유원과 아이를 기다린 태범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했다. 작게 미소 지은 의사가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차유원 산부님 혈압, 맥박 전부 정상이시고 수술 잘 마치셨어요. 이제 곧 나오실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원이 괜찮다는 말에 한시름 마음을 놓은 태범은 아직 나오지 못한 유원을 기다리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아기는 건강한가요?”
유원의 상태를 먼저 확인한 태범은 그때서야 아기에 대해 물었다. 출산 예정일보다 이르게 나온 아기의 상태가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다. 물론 저와 유원의 아이라면 건강할 거라 확신하지만 부모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태범의 물음에 의사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기도 건강합니다. 손가락 발가락 전부 10개씩, 정상이고요. 예정일보다 이르게 나온 것에 비해서 몸무게도 3.6kg이나 나가서 늦은 조산아라고 크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 정도면 출산 예정일에 맞춰서 나온 아기들과 비슷해요.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일주일 정도 인큐베이터에 있으면서 상태 지켜보겠습니다.”
유원과 아기. 모두가 건강하다는 말에 태범은 그제야 미소를 되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실에서 나온 유원이 회복실로 옮겨졌고, 태범은 그의 손을 잡고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으….”
“유원아.”
마취가 깼는지 유원의 속눈썹이 나비처럼 파들거리며 그의 맑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을 박아 넣은 듯 부드러운 연갈색의 눈동자에 태범의 모습이 담겼다.
“형….”
유원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태범의 얼굴에 작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대체 얼마나 울었는지, 태범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태범은 유원의 손을 꽉 잡으며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수고 많았어. 고생했어, 유원아.”
“…우리 호빵이는요?”
갈라진 목이 아픈지 미간을 찌푸린 유원이 호빵이를 찾았다. 태범은 유원에 입술에 따뜻한 물을 적신 거즈를 물려주었다.
“우리 아들, 건강해. 씩씩하게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몸무게도 일반 아기들보다 많이 나간대. 손가락, 발가락도 10개씩이고.”
유원이 걱정할까, 태범은 담당의에게 들었던 호빵이의 상태를 줄줄이 내뱉었다. 그때서야 유원이 안심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일반 베타 여성이나 여성체 오메가에 비해 남성체 오메가는 수술이 불가피했다. 생살을 찢고 아이를 낳는 만큼 충분한 회복이 필요했다.
“나 우리 호빵이 보러 갈래요, 윽.”
하지만 유원은 그런 몸으로 당장 아기를 보러 가겠다고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몸이 조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봤자 유원은 호빵이를 봐야 한다며 계속 고집을 부릴 게 뻔했다. 태범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하는 유원을 보고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런 게 내가 아는 차유원이지.’
사랑스러운 눈으로 유원을 바라보던 태범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유원은 익숙하게 태범에게 달라붙어 빨리 가자며 졸랐다.
“형, 얼른요. 우리 호빵이, 얼른!”
태범은 발을 동동 구르는 유원의 재촉에 그를 꽉 끌어안고 부지런히 발을 옮겼다.
“우와…. 작다….”
태범의 품에 안겨 유리창 너머로 인큐베이터에 있는 호빵이를 바라본 유원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조그만 아기가 자신의 배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히히. 하품한다, 호빵이.”
유원은 작게 입을 벌리고 새근새근 잠이 든 호빵이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태범도 호빵이를 보자 가슴에서부터 처음 경험해보는 감정이 피어남을 느꼈다. 유원을 잡은 태범의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그는 속으로 평생 이 두 사람을 지켜주겠노라 다짐했다.
“우리 셋이 평생 행복하게 살자.”
“네, 우리 진짜, 진짜 행복하게 살아요.”
태범은 푸흐-하고 웃음을 터뜨린 유원에게 소중히 입을 맞추고 달게 느껴지는 이 행복한 감정을 만끽했다.
앞으로 그들에게 남은 건 더 행복해지는 일뿐이었다. 그것을 유원도 느끼는지 태범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저 너무 행복해요, 형. 사랑해요.”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