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15)화 (115/136)

#115

형이 이렇게 직접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아니, 그동안 내가 듣고 싶지 않아 그를 보지 않았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너무 미안해서… 너무나도 죄스러워서.

하지만 이제는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설령 그가 비난한대도… 모두 들을 거고, 그럼에도 그를 떠나지 않을 거였다.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살짝 쓸어본 형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건 그냥 사고였어. 나도 그걸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

“…그래도… 우리 부모님 때문에, 우리 부모님 때문에 돌아가신 게 맞잖아요.”

애써 미뤄두었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으며 또다시 눈물이 맺혔다. 형이 모두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저 사고일 뿐이라고 했지만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을 형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팠다. 오랜 세월을 혼자 외롭게 그 쓸쓸한 집에서 살아오셨을 아버님을 떠올리자 너무 죄스러웠다.

“너도, 너도 힘들었잖아.”

“…….”

“너도 아팠잖아.”

“흐, 흐윽….”

결국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힘든 순간이 많았던 것 같다. 부모님이 없다는 이유로 따돌림도 많이 받고 부모님의 빈자리가 그리워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너도 많이 외로웠잖아.”

“흡… 흐으윽…….”

그런 내 외로움을 처음으로 채워준 건 형이었다. 내게 위로를 건네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며 따스한 위로를 해주었다. 죄책감에 죽어있던 마음에 숨결을 불어주는 다정한 위로에 형을 끌어안았다.

“이제 우리 사랑만 하자.”

“…….”

“나를 사랑해줘.”

정말 형 말대로 그래도 되는 걸까. 나만 생각하면서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는 걸까? 이미 형의 곁에 있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책감과 이기심 때문에 편해질 수 없었다.

“나를 위해서.”

내 마음이라도 들여다 본 듯 덧붙인 말에 흠칫 굳었다. 형은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은 떠나보내자.”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형은 나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 주었다. 더 이상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말했다.

“정말… 정말 제가 그래도 될까요…. 흑, 진짜 그래도 돼요, 형…?”

“그래. 그래도 돼. 이제 슬픔 대신 사랑을 택해도 돼.”

“네… 그럴게요….”

“앞으로 다른 생각은 절대 하지 마.”

형이 내미는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절대 형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로, 우리 호빵이랑 셋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로 서로를 바라보며 맹세했다.

***

그리고 약 3주 만에 돌아온 집에선 작은 환영 파티가 열렸다.

“유원아, 여기 앉아. 태범 씨도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일이 있고 나서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금방 잡힌 김상철은 바로 검찰로 인계되었다. 혐의는 특수 살인미수와 총기 소지. 평생 감옥에서 썩을 거라고 얼핏 아저씨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생각보다 윤리적으로 해결한 결과에 묘하게 형이 기특해 보였다. 사실은 어디서 몰래 끌고 가서 죽인 다음 바다에 던져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앞으로 우리 호빵이가 태어나면 보고 배워야 하니 형도 그런 일에선 손을 조금씩 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었다.

“헉, 선생님 손에 반지 뭐예요?”

“봤어?”

윤설아 선생님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녀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다음 달에 결혼해.”

“기찬 아저씨랑요? 너무 축하드려요!”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더니 결국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받았나 보다. 진심으로 축하하자 선생님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 유원아.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어떤 부탁이요?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전부 다 들어드릴게요!”

“내 결혼식 부케. 유원이 네가 받아줄 수 있을까?”

“어….”

그러고 보니 형과 내 결혼식은 호빵이를 낳고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했으나 자세히 말해본 적은 없었다. 워낙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정신없기도 했고. 우선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호빵이 때문에 일단은 출산 후로 미뤄둔 거다.

“음… 그래도 될까요…?”

사실 이미 혼인신고는 마쳤지만 ‘결혼식은 안 했으니까 받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뭇거리며 슬쩍 고개를 돌리자 형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럼 제가 받을게요!”

“고마워. 나도 유원이 네가 받아주면 너무 행복할 거 같았거든.”

선생님의 부케를 내가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와 형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선생님이 결혼을 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형의 손을 꽉 잡으며 설레는 미래를 상상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파티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리고 이 파티가 과연 형을 위한 건지 나를 위한 건지 모를 만큼 모든 일의 중심은 나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형수님! 촛불 한번 부십시오!”

“형수님이 좋아하시는 초콜릿 분수도 저기 마련해놨습니다. 아, 마시멜로우도 구워다 드릴까요?”

“형수님, 이건 무알콜 샴페인인데 상큼한 사과향이라 입맛에 맞으실 겁니다. 한 잔 드릴까요?”

내 옆을 둘러싼 아저씨들을 보는 형의 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꿈틀거렸다.

분명 형 퇴원 기념 파티라면서 주인공을 뒷전에 두고 있으니 심사가 불편할 만도 했다. 물론 형의 입원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나도 병원에 있으면서 집에 안 들어온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그만.”

“도련님을 위해서 선곡은 클래식-”

“이건 스모어라는 건데-”

아저씨들의 목소리에 묻혀 형의 말은 무참히 씹혔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는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긴장한 건 나뿐인지 다들 화기애애 신이나 보였다.

“그만!”

“헉.”

“흡-”

결국 형이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다들 제자리에 앉았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큭, 크흣, 푸하하-.”

아, 너무 웃겨.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만큼 한참을 웃다가 겨우 눈을 뜨자 다들 신기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웃는 게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모두의 눈빛에 서린 애정에 마음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동준 아저씨가 가져다 준 샴페인 잔을 들었다.

“아저씨들, 모두 너무 감사해요! 저 잘 다녀왔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내가 크게 외치자 아저씨들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앞으로 뻗었다.

“형도 해요!”

내 재촉에 형도 일어나 잔을 내밀었다.

“…분가는 당분간 보류하는 걸로 하지.”

“와아!”

“형님, 최고십니다!”

아저씨들의 환호가 담장을 넘을 듯 우렁차게 퍼졌고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행복한 우리의 환영식은 성공적이었다.

***

오늘은 형과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바다를 가고 싶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형은 막달 검사 결과가 나오자 여행 계획을 세웠다. 담당 산부인과 선생님께 자문을 구하면서까지 형은 여행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형이 여행지가 어디인지 끝까지 말을 안 해주는 바람에 정말 몸만 딸랑 챙긴 게 전부였다.

“흠… 또 막 해외로 가는 건 아니죠?”

외국을 가는 것이 딱히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외면 챙길 게 한두 개가 아니어서 그를 떠보듯 말했다.

“아니야.”

“그럼 우리 비행기 타요, 차 타요, 기차 타요?”

“스무고개 하는 거야?”

픽 웃으며 한 손으로는 캐리어를 든 형이 다른 쪽으로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이건 언제 또 챙겼대…. 자는 사이에 챙긴 건지 말도 없이 짐까지 꾸린 그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이제 가자.”

나를 이끄는 손길을 따라 잠자코 밖으로 향했다. 정말 둘이 가는 게 맞는 듯 아무도 없는 조용한 주차장에 느낌이 이상했다.

“야유회도 좋았는데… 완전 가을 날씨에 딱!”

“…이래서.”

“네?”

내비게이션 소리 때문에 잘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는지 되묻자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뾰로통해진 것 같은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이래서 단 둘이 가고 싶었어.”

“어….”

“네가 자꾸 다른 사람 신경 쓰는 게 싫어서.”

술술 내뱉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동안 내가 눈치가 없었네…. 쌓인 게 많았는지, 형은 예전 복싱장 관장님의 이름까지 들먹였다. 내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아씨…. 얼굴에 왜 이렇게 열이 오르는 거야. 히터를 켠 것도 아닌데 화끈거리는 얼굴에 두 뺨을 문질렀다.

갑자기 들어온 그의 질투에 얼굴에 열이 오른 것도 잠시 고속도로에 진입한 차가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김포공항…?”

여기가 또 내가 죄를 참 많이 지었던 곳이지…. 하하…. 평소에 소설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내 상상력이 참 대단했었다. 그를 따돌리려 핸드폰을 인천공항으로 보내고 지하철을 갈아타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김포공항을 보자 그때 생각이 나서 일부러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미소를 지었다.

옛말에 웃는 사람한테 침 못 뱉는다고 했어.

지레 찔려서 뺨에 경련이 일도록 웃고 있자 형이 내 얼굴을 톡톡 건드리며 차를 멈춰 세웠다. 음… 역시 국내선 청사인 걸 보니 일단 해외는 아닌 거 같고.

“설마 우리 부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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