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병원을 가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했다. 형이 깨어날 때까지 있을 생각으로 이런저런 물품을 챙기다 보니 가방이 꽉 찼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자 태식 아저씨가 내 짐을 들어주었다.
“조금 더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형수님?”
“아니에요, 차라리 가서 있을래요.”
아저씨는 아직 해도 온전히 뜨지 않은 시간부터 병원에 간다는 내가 걱정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집에 있어도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아직까지 준석 아저씨에게서 형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다.
형이 깨어났다면 분명 아저씨가 내가 가장 먼저 연락을 했을 텐데 말이다.
뿌옇게 내려앉은 안개를 거치고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의 병원은 싸늘하리만큼 고요했다. 밤새 비가 내려서 그런지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날씨가 쌀쌀했다. 몸에 걸친 카디건을 여미며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밤새 형의 곁을 지키고 있던 준석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형수님.”
“네. 형은 좀 어때요…?”
“이제 혈압이랑 bpm도 안정되셨고 의식만 회복되면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우성 알파시잖아요. 회복력 하나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저씨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루 사이에 핼쑥해진 아저씨에게 말했다.
“이제 제가 옆에 있을게요. 한숨도 못 주무신 거 같은데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
“이정도야 괜찮습니다. 예전에는 사흘 밤낮으로 일하고도 멀쩡했는데요, 뭘.”
“그건 예전이잖아요.”
“하하. 그건 그렇죠?”
서로를 위해 애써 괜찮은 척 농담을 하며 웃었다. 결국 아저씨와 대기실에 나란히 앉아 형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저씨는 병원에 온 김에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라고 권했지만 조금 있으면 면회시간이라 형을 보고 가겠다고 했다.
“중환자실 면회 시작하겠습니다.”
간호사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형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간호사가 건네준 방호복을 갈아입고 소독을 마친 뒤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각종 기계와 인공호흡기를 매단 채 눈을 감고 있는 형의 얼굴이 보였다.
“형….”
마음이 무너지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이라도 오래 형을 눈에 담기 위해 눈가를 문질렀다.
“흐, 흑. 형…. 태범이 형….”
“…….”
“흐윽… 흐….”
새액새액. 거친 기계음과 형의 숨소리가 겹쳐 들렸다. 인공호흡기에 형의 숨결이 부옇게 번졌다. 축 처진 형의 손을 잡아 올리고 흐느꼈다.
“혀영… 일어나요. 흑,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당장이라도 일어나 입술 깨물지 말라고 다정하게 말해줄 것 같은데, 형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낯선 형의 모습에 투명한 눈물이 형의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형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울음기를 가득 매단 음성으로 애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요…. 나도, 흐윽, 나도 형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그동안 뭐하러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고 아꼈는지. 후회로 젖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먼저 나를 잡아주었던 손을 꽉 끌어안고 소중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해요….”
“…….”
“이제 안 그럴게요, 헤어지자는 말 안 할게요…. 흐윽, 평생 형 옆에서 있을게. 우리 이제 그렇게 해요…. 사랑해요, 형.”
입을 맞추고 고개를 떼어내려는데, 익숙한 손길이 내 뺨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톡톡. 느리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느릿하게 움직인 손가락이 내 눈가를 문지르다 떨어졌다. 나는 그 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멀어지는 손 너머에는 눈을 뜬 권태범이 있었다.
“형….”
“…울지…마.”
“흐윽, 태범이 형….”
“사랑해… 유원아.”
그 말을 끝으로 형은 어렵게 뗀 눈을 다시 감았다. 이런 형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그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지만 형은 깨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형이 정신을 차린 지 이틀째가 되던 날. 그는 다시 눈을 떴다.
“형, 정말로 어디 아픈 곳 없죠?”
“응.”
우성 알파의 회복력은 어마어마했다. 단 일주일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형은 가벼운 산책도 하고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총상을 입은 환자라곤 볼 수 없을 만큼 식사량도 굉장히 많았다.
덕분에 주방장 아저씨가 아침점심저녁, 아주 바쁘게 본가와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며 음식을 준비해왔다.
“호빵이가 형을 닮은 거 같아요.”
“왜?”
형이 다정하게 내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기분 좋은 간지러움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내가 먼저 형의 목을 끌어안았다.
“호빵이 성장 속도가 엄청나대요. 원래 남성체 오메가 아기들 성장이 20주 차 이후로 엄청 빠르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데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어요.”
“…힘들겠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형의 목소리가 걱정으로 물들었다. 정말 자기 몸은 그렇게 신경 쓰지도 않으면서 내 몸은 끔찍하게 아끼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에 고개를 들어 형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떼어냈다.
쪽-
“유원아?”
“힘든 것보다는 엄청 설레는데요. 우리 호빵이가 나올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잖아요.”
갑작스러운 내 스킨십에 놀랐는지 형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형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로 나는 거리낄 게 없었다. 어차피 내 남편이고 내 껀데 뭐 어떤가 하는 마음이었다.
쪽-
“왜요? 형도 설레요?”
“응. 설레. 앞으로 너와 함께 할 날들이 전부 다 설레.”
장난스럽게 웃는 나를 보던 형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다정한 웃음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술에 부드러운 살결이 닿았다. 천천히 입을 가르고 들어오는 살덩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형의 뜨거운 숨결이 나를 온통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
병원에 입원한 지 3주가 지나가 나서야 형은 퇴원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병원에서 지내던 게 꽤 힘들었는지 퇴원을 해도 된다는 말에 형은 아침 일찍부터 퇴원 수속을 밟았다.
“형, 집에 가는 게 그렇게 좋아요?”
신난 아이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하긴, 거의 한 달 동안 병원에만 있었으니 답답할 만도 했을 거다.
병원에 왔을 때는 여름 끝 무렵이었는데 어느덧 가을이 찾아왔다. 아직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웠지만 그래도 아침과 저녁이면 공기가 꽤 쌀쌀했다.
“응. 우리 여행 가기로 했잖아.”
형이 내 손에 깍지를 끼며 웃었다. 나도 그의 손을 맞잡고 열심히 고개를 끄떡였다. 형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될 쯤, 퇴원하면 같이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그냥 지나가는 듯 말해서 까먹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두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저희도 같이 가는 겁니까?”
“너희가 왜 따라와.”
형과 나란히 앉아 키득거리고 있을 때 병실에 들어온 준석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형의 핀잔에도 아저씨는 한쪽에 내려놓은 가방을 번쩍 들며 웃었다.
“가을맞이 야유회라도 하면 좋죠. 안 그렇습니까, 형수님?”
“음… 진짜 좋은데요? 다 같이 가면 북적북적 재밌고, 더 친해질 수도 있고!”
내게 동의를 구하는 준석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자 형이 내 손을 잡아당겼다. 콕콕 손등을 찌르는 형의 손길에도 아저씨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형. 진짜 아저씨들이랑 다 같이 가면 어때요? 매번 도망, 음… 막 그랬지, 한 번도 같이 놀러 간 적은 없었잖아요.”
“네가 걔들이랑 놀러를 왜 가. 안 돼.”
“같이 갈 수도 있죠, 한 식구인데!”
계속 보채자 형이 미간을 찌푸리며 준석 아저씨의 손에서 짐을 가져갔다. 갑자기 무슨 짓이지? 하고 준석 아저씨와 내가 형을 바라보자 그가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쟤네 다 분가시킬 거야.”
“네?”
“네?”
그렇게 느닷없이 선언된 분가에 나랑 아저씨가 한발 물러서 가을맞이 야유회는 없던 일이 됐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퇴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질투쟁이.”
“뭐가.”
“그렇게 저랑 단 둘이서만 여행가고 싶었어요오오~~?”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올라갔다. 진짜 권태범, 귀여워 죽겠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얌전히 있는 아저씨들은 왜 분가를 시킨다고. 진짜 질투 스케일 한번 커.
내가 혼자서 크흥크흥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형이 이상한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이구, 귀여워. 이젠 저 얼굴도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다시금 형을 와락 끌어안고 입술을 쪽쪽거리자 형이 마지못한 척 굳은 얼굴을 풀었다. 그래봤자 입가에 맺힌 웃음기는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입술을 떼어내자 형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네 방 없앨까?”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고개를 끄떡였다. 앞으로 그 방을 쓸 일은 없었다. 형을 힘들게 하며 그곳에 틀어박혀 있었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유원아.”
하지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일은….”
“…….”
우리 사이에 ‘그 일’이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