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우성 알파의 모든 오감이 유원에게 가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유원에게 아무 일이 없더라도 그의 얼굴을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사는 조심히 분리불안증 검사를 권고했었다. 그러나 유원이 또다시 제 곁에서 멀어질까 두려운 마음에서 일어난 것임을 본인 스스로가 제일 잘 알기에 딱히 검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해답은 유원에게 있었으니까.
이번 일도 그 일의 연장선일까. 태범은 차라리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높였다. 몇 번의 신호 끝에 집에 도착한 태범은 부하들을 보곤 유원이 있는 곳을 물었다.
“30분 전쯤에 유리온실로 가셨습니다.”
자신이 없을 때 대부분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는 유원이었다. 태범은 자연스럽게 유원이 자주 오고 갔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고?”
“네, 다만 혼자 계시고 싶다고 하셔서 리모컨을 드렸습니다.”
리모컨이라는 말에 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를 일에 버튼 하나만 누르면 설정해둔 모든 사람에게 유원의 위치와 알람이 가도록 제작한 것이었다. 그나마 시름을 놓은 태범은 하루가 갈수록 말라가는 유원이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다.
“오늘은 좀 어땠어.”
“똑같았습니다. 여전히 식사량도 적고, 잠도 잘…. 아, 그래도 유리 정원에 있는 시간이 꽤 늘었습니다. 잠도 조금 주무시는 거 같고요.”
태범의 어두워지는 얼굴을 바라보던 남자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태범은 멀리 보이는 유리 정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리 정원은 집안에서 유원에게 유일한 자유가 주어진 공간이었다. 이렇게라도 자유롭게 해 줘야 그도 숨을 쉴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상 지금의 상황은 유원에게 억지로 몸에 구속구만 달지 않은 것이지 거의 그를 감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스스로도 알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아…. 그래,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넵, 알겠습니다.”
유리온실에 도착한 태범은 저를 뒤따라온 남자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유원이 틀어 놓은 건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오는 가운데 꽃향기로 가득한 온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원을 위해 심은 해바라기를 본 태범은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었던 입가가 풀어졌다. 유원이 이걸 보고 자신을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직접 심어 놓았던 것이었다. 조금은 유치한 짓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유원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흐윽.”
태범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억눌린 신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유원이 혼자 있을 유리온실에서 날 리 없는 소리였다. 나서도 안 되는 소리고. 하지만 만에 하나 유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태범의 입매가 굳어졌다. 유원을 찾는 그의 눈길이 빨라졌다.
다급한 걸음으로 티 테이블로 향한 태범은 유원이 앉아있던 것으로 추측되는 빈 의자를 발견했다.
“유원아.”
유원을 부르는 태범의 목소리가 불안한 기운에 휩싸였다. 찻잔이 두 개였다. 그 뜻은 유원과 함께 있던 사람이 있었다는 거였다. 누구에게도 유원이 다른 사람과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게다가 유원이 사라졌다. 아무리 불러도 유원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유원이 도망간 것일까, 그렇다면 누가 유원의 도주를 도와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이를 악문 태범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윽!”
또 한 번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태범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시선을 돌린 태범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크게 솟아난 나무를 노려보았다.
크게 솟은 나뭇가지를 한 손으로 꺾어 내자 유원의 모습이 드러났다. 밧줄에 묶인 채 입이 막힌 유원을 발견한 태범의 흰자위로 핏줄이 솟아났다.
대체 제 집에서 누가 이런 짓을. 본능적으로 살기가 일던 것도 잠시, 우선 유원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태범의 이성이 돌아왔다.
태범은 우선 유원의 입을 가로막은 테이프를 떼어내고 그를 안아 들었다.
“유원아, 어디 다친-”
“태, 태범이 형, 안 돼요, 위험해…. 얼른 가요, 흑, 얼른 가…!”
유원은 울먹거리며 급히 태범을 밀어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태범을 밀어내는 손길이 잘게 떨렸다.
유원을 끌어안고 우선 진정부터 시키려고 하던 태범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김상철.”
싸늘하게 그지없는 태범의 음성이 유리온실 안을 울렸다. 그러나 상철은 비릿하게 웃으며 유원을 끌어안은 태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상철은 그동안 도망치며 궁핍하게 사느라 세월의 직격탄을 모두 받은 듯 몹시 추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김상철. 유원이한테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하하… 무슨 소리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상철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오메가 하나 잘 못 건드렸다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자신은 영영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반갑네, 반가워. 우리 3년 만이지?”
“죽고 싶어 발악하는군.”
“지금 죽을 사람은 너야. 아니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은 상철은 태범에게 겨눈 총구를 유원을 향해 겨눴다.
“차유원인가?”
저를 향해 겨눈 총을 마주했을 땐 끄떡도 안 하던 태범의 눈빛이 크게 동요했다.
“그래. 내가 기대하던 얼굴이 바로 이거였어.”
혀로 입술을 핥은 상철은 환희에 찬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임산부가 분명한 유원의 배를 내려다보고 비아냥거렸다.
“그동안 차유원 배 속에 있는 애새끼가 클 때까지 기다리느라 힘들었다고.”
“김상철.”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던 태범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상철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상철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오지 마! 시발, 당장이라도 저 대가리에 구멍 내줄까? 어? 한번 그래 봐?”
태범은 비정상적으로 희번득대는 상철의 눈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직 유원에게 총구가 향해 있었다. 어떤 미친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제 말을 따라 걸음을 멈춘 태범을 보며 상철은 만족감이 서린 얼굴로 총을 바로 잡았다.
요즘 지켜본 바로는 둘의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았는데 이런 걸 보면 차유원의 마음이 일방적으로 식었던 것 같다. 하지만 뭐,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소중한 건 바로 저것이니까.
상철의 눈이 유원의 배로 향하며 총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유원이 배를 보호하듯 감쌌다.
“왜, 어차피 너 권태범한테서 도망치려 했잖아. 근데 이 새끼 애는 낳고 싶어?”
“하, 하지 마.”
“내가 도와주려는 거야. 이 새끼한테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거라고.”
“아니야! 하지 마. 하지 마, 김상철!”
저를 도와준다는 핑계로 아이를 해치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결국 김상철은 유원 자신과 권태범 두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차라리, 나한테… 나한테 쏴.”
유원은 눈을 크게 뜨고 김상철에게 당당히 말했다. 어차피 아이만 괜찮으면 됐다. 배를 향해 쏘는 것만 아니라면 괜찮았다. 병원에 바로 가기만 한다면 호빵이는 크게 다치지 않을 거였다. 자신은… 이미 한 번 죽으려 했던 몸이었고, 아이와 권태범만 괜찮다면 그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었다.
“차유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 괜찮아요. 어차피 주, 죽으려-”
“차유원!”
결국 태범이 유원에게 소리쳤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애원같기도 한 목소리가 유원에게 닿았다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태범은 저와 유원을 번갈아 보며 재미있다는 얼굴로 흥얼거리는 상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랑 얘기해. 유원이는 이만 보내주고.”
“내가 왜?”
“김상철. 네가 원하는 게 있을 텐데.”
“하, 지금 와서 내가 원하는 게 있을 거 같아? 아, 원하는 게 있긴 하지. 너희가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거.”
그동안 가족에게 외면받고, 안락했던 삶을 모두 버린 채 하루아침에 쫓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고작 차유원, 저 거지 같은 새끼 때문에.
처음부터 예쁘장하고 얌전해 보이는 게 자신의 취향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홀라당 다른 새끼한테 간 것이 짜증 나서 정신을 차리게 도와준 것이 제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권태범이 보낸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며 그런 자신을 차마 버리지 못한 어머니의 도움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다만 그것이 끝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 하지 못한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도 한정적이었다. 처음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땐 언젠가 두 사람에게 복수할 날만 꿈꿨지만 그마저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바빠 잊고 있었다.
그렇게 이홍구라는 새 신분으로 살게 된 지 3년이 되었을 때, 우연히 길에서 차유원과 권태범을 발견했다. 임신을 한 듯 배까지 부른 차유원과 그 옆을 지키고 선 권태범이 행복하게 길거리를 거니는 모습에 잊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몇 달 동안 정원사로 분장해 이 집을 오고 가며 복수할 날만 기다려왔다.
자신을 보고 두려움에 찬 얼굴을 한 차유원과 그런 차유원이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듯 얼굴을 한 권태범을 보니 지난 세월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혈관을 따라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했다.
“그럼, 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