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11)화 (111/136)

#111

그러다 어느 날인가 한번. 정말 딱 한번 유원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전날 유원의 몸이 안 좋아 보인다는,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핑계를 대고 가게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애써 저를 반겼고, 자신 또한 가면을 쓴 듯 뻔뻔한 얼굴로 유원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억을 잃고 난 뒤에도 유원의 성격이 조금은 바뀌기도 했지만 그날의 유원은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밝고 제 감정에 충실한 유원을 지켜보며 태범은 난생처음으로 욕심을 부렸다. 유원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그를 놓지 않겠다는 결심을 내렸다.

‘흐윽, 제발요… 흡, 나 좀 놔줘요….’

‘…….’

‘그만해요… 흑, 우리 이제 그만해요….’

그래서 또다시 유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나, 나 좀 놓아주세요. 그거 소원권, 그걸로 해주세요, 형….’

저를 붙잡았던 소원권의 의미가 저를 밀어내는 것으로 바뀐 순간. 태범은 믿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현실에서 도망치듯 유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하아… 하….”

참았던 숨을 겨우 터트린 태범은 눈물로 가득한 얼굴로 저에게 놓아 달라 애원하는 유원을 떠올렸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에 태범은 괴로운 얼굴로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 모든 게 다 제 욕심일까, 유원이 원하는 대로 그를 놓아주는 게 유원을 다시 웃음 짓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까.

유원의 자취가 모두 사라진 고독한 침실에서, 태범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

“다행히 수축은 아니고 배뭉침이 맞네요.”

“그럼 별다른 이상은 없는 건가요.”

“네, 주 수에 비해서 임부님 몸무게가 적긴 하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물은 조금 많이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병원에 온 김에 호빵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유원의 몸 상태는 괜찮은지 여러 검사를 받았다. 워낙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 다른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양수가 부족해서 물을 마시라고 했다.

“그럼 다음 내원까지 오늘 말씀해드린 거 잘 지키시고 또 뵐게요.”

“감사합니다.”

진료를 마치고 몸을 일으키려는 유원을 부축하기 위해 팔을 잡았다. 유원은 흠칫 움츠리더니 조심스럽게 태범의 손길을 떨쳐냈다.

“밥 먹고 들어가자.”

“…괘, 괜찮아요. 그냥 집에….”

“경궁채로 가.”

한시라도 같이 있기 싫은지 유원이 거절했지만 태범은 여지도 주지 않고 준석에게 명했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시간이 흘러 고풍스러운 한식당에 도착한 유원은 태범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온갖 산해진미가 앞에 있어도 자신만 챙겨주는 태범의 눈치를 보며 식사를 마친 유원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우윽- 욱.”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태범은 이전처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유원의 곁을 맴돌며 유원이 제 마음을 받아주길 묵묵하게 기다릴 뿐이다.

***

막달이 다가올수록 아기집이 커지는지 배뭉침이 심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불규칙적으로 안이 왈칵 조이거나 당기는 느낌에 겁이 났다. 조심하려 했지만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이 너무 갑갑했다. 오늘도 결국 유리온실에 가려고 천천히 방을 나섰다.

“형수님, 유리온실에 가십니까?”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얼마 전까지는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기만 했던 아저씨들이 요즘엔 내 옆에 바짝 붙어 나를 혼자 두지 않으려 했다. 이것도 형이 시킨 거겠지. 아저씨들과 함께 산책로를 따라 유리온실로 향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누르셔야 해요.”

“네.”

아저씨들은 내가 혼자 전화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할까 봐 조그만 리모컨을 건네며 당부했다. 아마 이걸 누르면 아저씨들에게 내 상황을 전달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들을 뒤에 두고 유리온실로 들어갔다. 여러 꽃향기가 부드럽게 어우러져 기분 좋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해바라기를 지나 소파에 몸을 기댔다.

“우리 음악 들을까?”

안 그래도 그동안 너무 태교를 하지 않은 것 같아 며칠 전부터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묘한 안정감이 드는 공간에서 차분한 클래식을 듣자 근심 걱정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호빵이도 기분이 좋은지 연달아 배를 통통 작게 두드렸다. 기분 좋은 호빵이의 움직임을 느끼며 챙겨온 보온병을 꺼냈다. 양수가 부족하다는 말에 최근 들어 챙겨 먹는 차였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눈을 감고 태교에 집중했다.

부스럭-

한참을 눈을 감고 태교에 집중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혹시 아저씨들이 아직 안 갔나? 아니면 형인가?’ 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아….”

“아, 안녕하세요.”

저번에 나를 도와줬던 아저씨였다. 벙거지 모자와 마스크까지 써서 얼굴이 거의 다 가려졌지만, 옷과 몸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직 공사가 안 끝났나 봐요?”

사실 어떤 공사를 하는지도 잘 몰랐다. 주변을 삥 둘러보자 한쪽 끝에 어지럽게 쌓인 자재만 보일 뿐이었다. 내 말에 화들짝 놀란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모자를 고쳐 썼다.

흠… 그러고 보니 저번에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 같이 차라도 마시면서 인사드릴까?

“괜찮으시면 같이 차 한잔하는 거 어떠세요? 여기 쿠키도 있는데….”

오늘 주방장 아저씨가 배가 고프면 먹으라고 내가 좋아하는 피넛 버터 쿠키를 구워서 챙겨주셨다. 딱히 생각이 없어서 먹지 않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살짝 미소를 짓자 아저씨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아… 몇 걸음 정도 아저씨가 가까이 다가오자 저번에 살짝 맡았던 냄새가 느껴졌다. 주방장 아저씨 말로는 무슨 마약을 하는 냄새라던데.

근데 이 냄새를 내가 어디서 맡아봤더라. 익숙한 듯, 하지만 절대 익숙할 수 없는 냄새에 조금 의아했지만 이내 잊고 차를 준비했다.

“여기 드세요. 저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못 드렸네요.”

고개를 숙이자 아저씨가 손을 내두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저씨는 차를 마시기 위해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고 나는 아직 열기가 남은 루이보스 티를 입에 머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소한 차 맛이 괜찮았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따뜻한 차가 내려가자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

“차가 맛있네요.”

“그렇….”

“아주 맛있어요.”

마스크를 벗은 아저씨의 얼굴을 마주하자 심장이 저 깊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얼굴에 있는 선명한 상처가 눈에 들어왔고 익숙한 눈빛이 내 뺨에 내려앉았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겨우 내려놓고 최대한 침착하게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 아까 아저씨가 준 리모컨을 어디에 뒀더라. 주머니에 넣어놨던 리모컨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급하게 리모컨을 찾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쿠키도 맛있고.”

“다, 다행이에요.”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입이 쿠키를 잘게 부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초조한 마음에 손끝을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어떡하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데….

과거의 일을 반복하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남자는 크게 씨익 웃으며 쿠키를 입에 넣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는 두려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작게 터졌다. 이대로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잡고 아저씨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하지만 내 시선이 향한 곳이 느껴졌는지 남자의 고개도 따라 돌아갔다. 리모컨을 발견한 그가 나를 돌아보고 픽, 웃음을 터트렸다.

자리를 박차고 그것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남자가 한발 빨랐다. 내 손이 닿기 직전 남자가 리모컨을 잡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천천히 일어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모컨을 살핀 남자는 제 앞에 놓인 찻잔에 그것을 떨어뜨렸다. 퐁당. 작은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너랑 먹어서 그런가?”

“…아….”

“오랜만이야, 유원아.”

남자는, 아니 김상철은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3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김상철의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출산일이 겨우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 유원을 혼자 두는 것이 신경 쓰여 태범은 다시 회사 일을 재택으로 돌렸다. 하지만 오늘 갑작스럽게 생긴 미팅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회사로 향하던 중이었다.

타닥, 타닥.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침부터 자꾸만 유원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결국 태범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내려놓고 준석에게 말했다.

“미팅 시간 좀 늦출 수 있나?”

“네? 곧…. 아닙니다. 프레젠테이션 먼저 진행하면서 30분 정도 늦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준석은 난색을 표하면서도 태범의 굳어진 얼굴에 스케줄을 조정해보겠다고 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태범은 급히 차 키를 손에 쥐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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