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10)화 (110/136)

#110

“하아… 하…. 가, 감사합니다.”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온 주방장 아저씨가 물을 마시게 하고 내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이마에 남은 식은땀을 닦고 두 사람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큰일 날 뻔 했는데 덕분에 잘 넘어갔어요.”

“아, 아닙니다. 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저씨는 내 말에 엄청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을 본 주방장 아저씨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못 보던 얼굴인데….”

못 보던 얼굴이라니? 매일 아저씨들의 식사를 챙기는 주방장 아저씨가 같은 동료의 얼굴을 모를 수 있나?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말을 더듬던 아저씨가 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파득거렸다.

“아, 유, 유리온실 보수작업이 있어서요. 그것 때문에 고, 고용됐습, 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죄송합니다. 워낙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서 예민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눈에 띄게 당황한 아저씨의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지만 이곳 아저씨들의 얼굴을 보면 그럴 만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을 잃고 아저씨들을 봤을 때 그랬었으니까.

“혹시 원하시는 보상이 있으시면-”

“보, 보상이라니요! 괘, 괜찮습니다. 그럼 아직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아….”

급히 본채를 빠져나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나는데… 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아이고, 저놈 저거 약하는 놈이었네요. 들킬까 봐 급히 도망친 건가 봅니다.”

약? 이게 약 냄새라고… 코를 찌를 듯 나는 이상한 냄새가 약이었나 보다.

주방장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주방장 아저씨가 가져다 준 따뜻한 죽 한 그릇을 호빵이를 위해 전부 비워냈다.

오랜만에 배가 부른 느낌에 힘겹게 숨을 내쉬며 침대 머리맡에 기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집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똑똑-

“차유원.”

예고도 없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 형이 올 시간이 안 됐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일찍 찾아온 그에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꾹 다물었다.

“차유원.”

다시 한번 나를 부르며 재촉하는 목소리에 내 옆에 선 주방장 아저씨는 본인이 더 어쩔 줄 몰라했다.

“하아….”

그래.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어 주방장 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불이 켜진 듯 환해졌다. 달칵-하고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을 열자 형이 안으로 들어오고 아저씨가 자리를 피해주었다.

“유원아.”

“…….”

오랜만에 마주한 형의 얼굴이 생각보다 너무 엉망이었다. 잘생긴 얼굴 곳곳엔 피로함이 가득했고 푸석푸석한 피부가 거칠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나 때문이라는 걸 알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집스레 고개를 돌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형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성큼성큼 내게 다가온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 좀 보자….”

“…….”

“…우리 오랜만이잖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래서 형을 더 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형을 보면 내 마음이 약해질 걸 나도 알고, 형도 알았으니까.

파들거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도 꿋꿋이 그를 피하자 형이 내 손을 잡았다. 주먹을 세게 쥐어 난 손톱자국을 형이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러더니 그는 내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보고 싶었어.”

“…….”

“사랑해.”

그 말에 울컥하고 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차올랐다. 입술을 꽉 깨물며 숨을 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자 형이 나를 꽉 껴안았다. 언제나 나를 향해 단단하고 넓은 안식처를 내어주는 그의 품에서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형의 어깨를 밀어내고 그의 품에서 도망치려 해도 꽉 안은 손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듯이 단단하게 붙잡는 손길이 강인하면서도 애달팠다.

“흐윽, 제발요… 흡, 나 좀 놔줘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치며 울음을 토해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이제 다 그만하고 싶었다. 형을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을 숨긴 채 그를 밀어내야 하는 현실과, 그가 주는 달콤한 사랑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만해요… 흑, 우리 이제 그만해요….”

“……안 돼.”

“형, 제발…….”

눈물을 가득 매단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우리 사이에 있는 사랑 이상의 애달픔과 안타까움이 공기를 데웠다. 나는 그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소원권… 형, 아직 내 소원 안 들어줬잖아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내가 매달리듯 그의 손목을 붙잡고 애원했다.

“나, 나 좀 놓아주세요. 그거 소원권, 그걸로 해주세요, 형….”

“…….”

이를 악문 형의 입술 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빠진 채로 단단하게 굳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만큼 내 얼굴을 뇌리에 새길 듯이 집요하게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처음으로 나를 외면했다. 형은 고개를 돌린 채 중얼거렸다.

“병원 갈 거야. 준비하고 나와.”

“…흐윽, 형….”

살짝 고개를 돌린 형의 얼굴은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언제나 강인해 보였던 사람이 나 때문에 저렇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문을 닫고 나 혼자 남은 방에서 작게 움직이는 호빵이에게 속삭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호빵아….”

***

방에서 나온 태범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유원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많이 약해져 있었다. 지난번에 쓰러져 병원에 간 이후 되도록이면 호빵이를 위해서라도 식사를 챙기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유원은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니 침대에서 보냈다. 그나마 며칠 전부터는 유리온실을 오가서 한시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긴장하고 편히 쉬지 못하는 유원을 위해 되도록 회사에 가려고 노력했다.

그랬는데.

‘형님, 형수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막 출근을 하자마자 들려오는 소식에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급히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가는 내내 태범의 손끝이 달달 떨려왔다. 유원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의 곁을 비웠던 시간이 후회의 파도처럼 밀려와 온몸을 덮쳤다.

‘도착했습니다.’

남자가 말하기도 전에 차에서 내린 태범이 다급히 달려갔다. 순식간에 계단을 오르고 저택으로 들어간 태범은 곧장 유원의 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원이는. 쓰러졌다면서.’

‘네? 아, 배뭉침이 좀 있으셔서요.’

지난번처럼 쓰러진 것은 아니고 배뭉침 때문에 지나가던 정원사에게 업혀 들어왔다고 뒤늦게 상황을 전달받았다.

‘너넨 뭐 하고 있었어.’

‘죄송합니다.’

유원이 신경 쓰이지 않게 멀리 떨어지라고는 했으나 항상 곁을 지키라고 당부했었다. 정원사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의 위급한 상황에서 아무도 유원을 챙기지 않았다는 점에 태범의 얼굴은 굳어졌다.

‘똑바로 해.’

‘네.’

태범은 딱딱하게 굳은 채로 유원의 방문 앞에 섰다. 조금 망설이다가 똑똑-하고 문을 두드렸다.

‘차유원.’

역시나 오늘도 정적이 흘렀다. 한숨을 깊게 내쉰 태범은 문 너머로 들려오는 유원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유원아.’

평소 같았으면 그대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원의 몸 상태를 확인할 겸,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도 볼 겸 병원을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억지로 문을 열 각오까지 되어있었다.

‘형님.’

다행히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기 전 수광이 문을 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태범은 문이 작게 열린 틈 사이로 보이는 유원에게 다가갔다. 얇은 잠옷 위로 드러난 유원의 몸은 그새 더 말라 있었다.

답답한 듯 탁한 숨을 내뱉은 태범은 유원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리고 그를 달랬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 있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태범은 고개를 돌려 제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유원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보고 싶었어.’

‘…….’

‘사랑해.’

유원을 끌어안았다. 유원이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고 주먹으로 때려도 태범은 그저 그를 껴안았다.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유원의 체향을 느꼈다.

유원이 제 품에 있다고 생각하니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저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이기적이게 느껴졌다.

‘하지만, 유원이는 안 돼. 보내줄 수 없어.’

충동적으로 찾아간 그의 집 앞에서 유원이 창백한 얼굴로 실려 가는 모습을 보며 난생처음으로 후회를 했었다. 그러지 말걸. 유원을 차갑게 밀어내지 말고 따스하게 안아줄걸. 유원이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비로소 유원을 사랑하는 제 감정을 깨달았는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원을 멀리서 지켜보며 오랫동안 지독한 세월을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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