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09)화 (109/136)

#109

“고마워.”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선생님의 손에 내가 좋아하던 쿠키가 들려있었다. 가끔씩 선생님이 직접 구워서 주시던 피넛 버터 쿠키였다.

“음… 오늘 날씨도 따뜻한데 밖에 나가서 먹으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묻는 선생님의 말에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러고 보니 오늘 미세먼지가 많은 거 같다고 말을 바꾸었다.

침대 옆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선생님은 내가 먼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기다림에, 나는 마침내 오랫동안 혼자 묵혀두었던 말을 꺼내놓았다.

“선생님….”

“그래, 유원아.”

“왜… 왜, 그동안 모르는 척 하셨어요? 왜 저한테 아무런 말씀도 안 해주셨어요?”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선생님을 탓하는 말이 나왔다. 나조차도 말을 뱉고도 너무 놀라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제 말의 뜻은 그게 아니라….”

“유원이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네가 정말 많이 아팠어.”

내가 기억하는 건 수면제를 먹고 잠에 빠지기 전까지였다. 그렇게 많은 약을 먹고 멀쩡하게 일어날 리가 없었다. 선생님의 말에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간이 존재했다는 걸 깨달았다.

“네가 그렇게 된 이후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

“특히 태범 씨한테 말이야.”

선생님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내게 설명해주었다. 가게에 돌아간 이후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왔고, 수면제를 먹고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이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않게 나는 병원에 실려 갔지만 이미 많은 약을 복용한 상태라 나는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고.

“유원이 네가 좋아한다던 형이, 태범 씨 맞지?”

“…….”

차마 좋아한다는 말조차 감히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

“유원이가 예전에 그 형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었잖아.”

“…….”

“아니었어. 네가 잘 못 알고 있었어, 유원아.”

“…네?”

“태범 씨는 너를 아주 많이,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나는 형에겐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그게 맞을 텐데.

“네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곁을 지키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

설마….

“그래. 태범 씨야. 정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너만 찾더라. 예전에도, 지금도 참 완벽한 사람이잖아. 근데 그렇게 고통스러운 얼굴로 엉망인 행색을 하고 네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아….”

선생님이 말한 형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왜… 대체 왜 나 같은 것 때문에 형이…. 심장을 누가 꽉 움켜쥐는 것처럼 아팠다.

“괜찮아? 잠깐-”

“아니, 에요… 더… 계속 말씀해주세요….”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선생님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더 알고 싶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까지 전부 알고 나를, 그리고 형을 이해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네가 그런 선택을 하고 사경을 헤맨다고 했을 때. 사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서 도망쳤어. 내가 맡은 첫 환자이자 친동생처럼 여기던 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원이 너만큼은 아니지만 선생님도 정말 많이 힘들었어. 의사로서 실격인거지.”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선생님은, 의사 윤설아가 아니라 차유원을 아끼는 윤설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손을 단단히 잡으며 나를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근데, 태범 씨가 너를 포기하지 말라고 찾아왔었어. 네 옆을 지키고 회사 일도 하느라 바빴을 텐데도 홍콩이랑 서울을 오가면서 나를 설득하더라.”

“…….”

“언제든 네가 기억을 찾으면 돌아올 수 있게 준비해달라고.”

그럼 대체 형은 언제부터 나를… 내가 자살 시도를 한 건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선생님이 내게 해준 말을 보면 권태범은 2년 동안이나 기억도 하지 못하는 나를 기다리고 지켜봤다는 소리였다.

“그만큼이나 태범 씨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그것만큼은 유원이 네가 알아줬으면 해.”

***

‘그만큼이나 태범 씨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그것만큼은 유원이 네가 알아줬으면 해.’

선생님이 내게 해주고 간 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형은 언제나 나를 지켜주고 기다려주고 사랑해주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며 당장이라도 형에게 뛰어가고 싶었다.

“안 돼… 내가 무슨 염치로… 내가 무슨 자격으로 형 옆에 있어….”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형의 어머니를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한 것도 모자라 형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온 형을 알지만, 더 늦기 전에 형을 떠나는 게 맞았다.

“그래….”

원래부터 이게 맞는 거였다. 오히려 선생님의 말을 듣고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원래 집에서 가지고 왔던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장 문을 열고 옷을 챙기다 문뜩 남색의 트레이닝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처음 형이 내게 줬던 옷이었다. 동파된 수도관이 터져 홀딱 젖은 내게 형이 건네줬던 옷. 기록적인 한파에 찬물까지 뒤집어 써 얼음장 같은 몸에 입었던 바로 그 옷. 그 옷을 입었을 땐 누군가가 품에 안아준 것처럼 따뜻했었다. 마치 형의 온기처럼.

여전히 생생한 그 온기를 외면하듯 트레이닝복이 들어있던 서랍을 닫았다. 탁, 하고 서랍이 맞물려 닫히며 트레이닝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마음도 거기에 두었다.

한참을 불편한 몸으로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여길 나가는 게 문제인데…. 이번엔 과연 잘 도망칠 수 있을까. 창밖을 바라보자 어느덧 해가 저물어 어두컴컴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형에게서 도망가야 한다는 현실이 막막하게 다가왔다. 나는 쿵쿵 뛰는 배를 감싸 안았다.

도망을 가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 호빵이 방에 가는 척 미리 꾸려놓은 가방을 들고 도망쳐 보기도 하고, 할머니를 보겠다며 억지로 집을 나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강원도로 도망갔을 때는 장난이었다는 듯 내 주변에 삼엄한 감시가 이루어졌다. 보통이었으면 내 부탁에 어쩔 수 없다며 굳은 눈매를 풀던 아저씨들은 단호한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사방이 전부 꽉 막힌 탓에 내가 도피하듯 찾은 곳은 유리온실이었다. 형의 어머니가 손수 그를 위해 가꾸었다는 유리온실은 모순적이게도 내게 안식처가 되었다.

여름을 맞아 아름답게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잠든 사이 온실의 모습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예쁘지만 조금 불편했던 의자는 푹신한 패브릭 소재로 바뀌어 있었고, 조금 컸던 테이블은 내 앉은 키에 맞춰져 있었다.

“하아….”

차라리 나를 원망하고 모질게 대했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거였다. 항상 내게 다정하게 구는 형을 볼 때면 죄책감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해바라기네….”

힘없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내 시선에 한쪽에 활짝 피어있는 노란 해바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 심은 건지, 해바라기 주변의 흙만 좀 더 진한 흑갈색이었다. 해바라기를 보자 자동적으로 해바라기의 꽃말이 떠올랐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기다림.

나를 보라고 형이 가져다 둔 것일까. 너무 자기중심적인 생각 같지만 형이라면 왠지 그랬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참을 샛노란 해바라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 그래, 미안해, 호빵아.”

작은 태동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식사가 부실했다는 걸 깨달았다. 불만을 토로하는 듯 배를 뻥뻥 차는 호빵이를 달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라도 먹기 위해 유리온실을 빠져나와 본채와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갑자기 밖으로 나오니 한여름의 날씨가 훅 하고 뺨을 덮쳐왔다.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로 높은 기온에 잠시 걸음을 멈춰 섰다. 혹시 따라오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시는 하되,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했는지 아저씨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점점 어지러워지는데. 점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미간을 찡그리며 무릎을 굽혔다. 하… 어떡해. 잠깐-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핸드폰을 찾기 위해 손을 더듬거렸다. 그 순간 누군가 내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읏.”

또다시 배뭉침이 온 것 같았다. 20주 차가 지나면서부터 아기집이 늘어남에 따라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필이면 밖에 나왔을 때….

식은땀을 줄줄 흘리자 아저씨가 나를 부축해 본채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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