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그동안 매일 약도 잘 먹고 상담 치료도 잘 받으며 잘 지냈다. 그날의 일을 모두 잊은 사람처럼 웃기도 하고, 할머니의 손을 꽉 잡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반년이 넘게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오늘로 결심했다.
명확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재차 청했다.
“이제 그만 퇴원할래요.”
“안 뎌.”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는 듯 할머니는 단호하게 내 부탁을 일축했다. 호화스러운 병실 내부를 둘러보며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집 형편에 이런 1인실 병실은 말도 안 됐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우리 형편에 보험도 안 되는 병실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머니, 저 여기 있기 싫어요.”
“…….”
“여기 형이 해준 거죠….”
“…아니여, 할미가-”
“…….”
‘거짓말…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서요.’
할머니는 내 표정을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희미하게 남은 그날의 기억 끝엔 권태범이 있었다. 내 손으로 형에게 상처를 남기고, 내 손으로 그를 다치게 했다. 아직도 손목을 타고 흐르는 권태범의 뜨거운 피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형은….”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형을 걱정하고 생각할 자격조차 없다. 그의 어머니로도 모자라 형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이런 걸 악연이라고 하는 거겠지.
언젠간 형과 내가 운명이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 아니라 악연일 뿐이었다. 그것도, 나만 그에게 죄를 지은 악연.
“할머니. 저 갈래요… 그렇게 해주세요.”
“…유원아.”
“여기… 있으면 자꾸만 형이 생각이 나서 그래요. 제가 너무 힘들어요.”
형을 떠올리니 다시금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어룽진 눈물 너머로 나이든 할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할머니,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차마 할머니께 전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눈을 감았다.
결국 할머니는 내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래간만에 돌아온 집은 여전히 모든 게 그대로였다. 전부 같았는데, 나만 달라져 있었다.
할머니는 오랜만에 혼자 남을 나를 걱정하느라 가게도 나가지 못하고 내 앞을 서성거렸다.
나는 억지로 괜찮은 척 웃음기를 머금고 할머니에게 가게를 가보시라고 권했다. 오랫동안 가게를 닫아놨으니 확인할 때도 됐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할머니께 끝까지 웃는 낯으로 배웅하고 현관문을 단단히 잠갔다.
곧바로 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한 장씩 넘겨서 내가 살아온 발자취를 따라갔다.
“이때 진짜 행복했는데….”
형과 처음으로 자동차 극장에 갔던 날을 회상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다녔던 운동을 형이 있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가자 몸이 버티질 못했었다. 결국 온몸에 근육통이 생겨 제대로 걷지도 못하자 형이 나를 데리고 밥도 사주고 영화도 보여줬었다.
어두운 차 안에서 스크린의 불빛이 비추는 형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꽉 잡았었다. 설렘이 가득한 일기를 내려다보며 그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때도 나 엄청 행복했네….”
형을 만나기 전과 이후로 일기장의 분위기는 나뉘어져 있었다. 추억을 회상하며 일기장을 한 장씩 넘기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이렇게 형을 좋아한다고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 욕심이었다.
지익-
형에 대한 내 마음을 낱낱이 드러낸 일기장을 뜯어냈다.
지익-
그와 만난 세월만큼 쌓여있는 우리의 추억을 모두 지워냈다.
지익-
갈기갈기 찢어진 종잇조각을 바라보며 텅 빈 일기장 아래에 오늘의 날짜를 적어나갔다. 후드득, 눈물이 떨어져 종이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을 적어두고 일기장을 닫았다.
“정말 죄송해요….”
침대에 앉아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약병을 꺼냈다. 병원에서 주는 약을 먹지 않고 그동안 조금씩 모아두었던 것이었다. 약통에 든 약을 전부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목으로 작은 알약이 무더기로 넘어갔다.
“읏, 하아….”
너무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약을 삼키는 것도 힘들었다. 알약이 뱃속을 굴러다니는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억지로 숨을 꾹 참으며 헛구역질을 눌러 담았다.
슬슬 속이 쓰려오며 약이 녹는 게 느껴졌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눈을 깜빡거렸다. 점점 흐려지는 시야에 힘없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픽-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겨우 이렇게 끝내려고 그동안 아프게 살아오며 버텼던 것일까. 웃음인 듯 울음인 듯 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하아…….”
좁아지던 시야가 암전되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부디 내게도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그냥 권태범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남길. 마지막 남은 힘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
‘왜, 왜 나를 다시 찾아왔어요?’
태범은 정신을 잃기 전 유원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유원을 놓지 못한 것도, 유원을 다시 찾아간 것도 모두 자신이다. 원망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죄책감에 잔뜩 물든 얼굴로 바라보는 유원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유원이는.”
문 앞을 지키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꽉 닫힌 문을 열려던 태범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곤 문고리에서 손을 떼어내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
“유원아. 문 좀 열어 봐. 우리 얼굴 보고 얘기하자.”
태범은 조용히 문 건너편에 있을 유원을 불렀다. 잠시 시간이 흐른 다음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전해졌다.
“형이랑 할 말 없어요. 그냥 저 좀 보내주세요.”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는 상황에 태범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기억을 되찾은 유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안에 혼자 숨어든 것이었다. 운언동 사람들과는 절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혼자 고립된 상황을 고집했다.
“일단 나와서 얘기하자. 벌써 며칠 째야.”
또다시 입을 다문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태범이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식사도 거부하며 집에 보내 달라는 말밖에 하지 않아 참다못한 태범이 억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발작 비슷한 증세와 함께 유원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태범을 밀어냈다. 그렇게까지 저를 거부하는 모습에 태범은 결국 유원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밥이라도 먹어. …호빵이를 생각해서라도. 알겠지?”
유원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 태범은 문 앞에 선 남자를 향해 턱 끝으로 지시를 내렸다. 오늘도 유원을 보지 못한 채 1층으로 내려와서야 태범은 2층의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모든 감각이 예민한 우성 알파의 체질이 원망스러웠다.
“형님.”
태범은 거실 소파에 앉아 준석이 건넨 서류를 넘겼다.
“피곤하시면 일정 조율할까요.”
“됐어.”
태범은 단호한 말투로 거절하고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태범은 1분 1초 자신의 몸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따스한 햇살처럼 온기로 가득했던 집 안은 삽시간에 몇 년 전, 누구의 온기도 남지 않았을 때처럼 차게 식어갔다.
준석은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불안한 공기를 마주하고 조용히 태범의 곁을 지켰다.
***
“하아… 하아….”
형이 돌아갈 때까지 숨을 꾹 참고 있다가 몰아쉬었다. 그의 앞에서는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은 뒤 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무기력하게 흘러갔다. 밥을 먹지 않아 쓰러질 뻔 한 적도 있고, 일주일이 넘도록 밖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 덕분에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 지기도 했다.
“아….”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은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왔다. 정갈한 음식을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힘겹게 침대에 누웠다.
얌전히 누워 불러온 배 위에 손을 올려두자 호빵이의 태동이 느껴졌다. 배를 조금씩 쓰다듬으니 호빵이가 반가운 듯 발을 뻥뻥 찼다. 호빵이의 활발한 움직임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호빵아.”
이런 내 마음을 호빵이도 느낀 걸까. 태동이 점차 잠잠해져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도 형과 나의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일이 존재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형과 나 사이에 호빵이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묵과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터널 안에 갇힌 것처럼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떻게 할까, 호빵아…….”
입맛이 없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차게 식을 때까지 무력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문을 작게 두들기며 나를 불렀다.
“유원아…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윤설아 선생님이었다. 여느 때처럼 나를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잠시 고민하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