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의했는데 임신부터 하면 어떡해요 (107)화 (107/136)

#107

“하, 하지 마. 흐윽… 내가 잘못, 흡, 잘못했어…. 이제 그만해….”

“정신 차려, 차유원!”

“아니야, 흣…. 저리, 저리가…. 아니야, 아흐….”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흐느끼는 유원이 점점 격렬하게 경련했다.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끄윽, 끅 소리를 내며 태범을 밀어내다가도, 다시 태범을 끌어안고 간절히 매달렸다.

“자, 잘못했어요…. 가지, 흑, 가지 마세요….”

“차유원….”

“잘못했어…. 미안해…. 흐으윽…. 잘못했어….”

유원은 여기서 도망가고 싶었다. 이 잔인한 현실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제 손으로 태범을 다치게 했다는 현실에 스스로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왜 조금 더 일찍 죽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머릿속이 삐-하는 이명으로 가득 찼다. 태범이 뺨을 어루만졌지만 유원은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뇌리에 담고 눈을 감았다.

“차유원!”

태범은 망가져버린 유원을 끌어안고 흔들었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런 유원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유원을 보냈던 과거가 너무 후회되었다.

그렇게 보내지 말걸. 뭐라고 말이라도 할걸. 외면하지 말걸. 수많은 후회와 고통이 흘러넘쳤다. 그는 이를 악물고 짓씹듯이 말했다.

“그 새끼 잡아 와.”

“형님, 일단 치료부터…!”

“박준석.”

지옥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태범의 음성에 준석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신 제 셔츠를 찢어 태범의 피를 지혈했다.

그러나 태범은 아주 간단한 처치만 받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분 일 초라도 이곳에 유원을 두고 싶지 않았다. 유원을 소중한 손길로 감싸 안은 태범의 발걸음이 서둘러 창고를 빠져나갔다.

***

병원에 도착한 태범은 자신의 상처 치료는 뒤로하고 가장 먼저 유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단순한 영양실조와 타박상이라 몸에 큰 이상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강해 유원은 도통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권 이사님, 일단 차유원 환자는 진정제를 투약하고 안정된 상태입니다. 다만 정신과 치료는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몸은 이상 없습니까. 다른 자상이나, 약물 복용같은.”

말을 하면서도 태범의 손끝은 떨렸다. 유원이 받았을 충격이 걱정되면서도 유원이 그런 행동을 하려했다는 것에 태범이 받은 충격 또한 적지 않았다.

“네, 다행히 이사님께서 초기대응을 해주신 덕분에… 그런데 이사님 치료는….”

의사가 치료를 권했을 때 준석이 병실로 들어왔다.

“형님.”

“치료는 조금 이따가 받을 테니 이만 나가보셔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태범의 거절에 의사는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태평하게 치료나 받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비릿한 통증이 겨우 태범의 정신을 깨우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원을 바라보면서도 차마 만지지도 못했다.

준석이 조심스레 용건을 꺼냈다.

“그 미친놈이… 이런 걸 계속 틀어준 모양입니다.”

준석이 틀어준 영상을 본 태범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이 영상은 태범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모를 수가 없지. 이런 걸 유원에게 보여준 이유라면 그 목적이 너무도 투명했다.

“그 새끼가 이걸 어떻게 안 거지?”

자신도 유원의 부모에 대해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 새끼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유원을 괴롭혔는지 태범은 그게 궁금했다.

“검찰 쪽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거 같습니다.”

“의정부지검 검사장 아들이라고 했었나.”

“네. 김상철의 아버지는 김상준 검사장이고 어머니는 부인은 인아 그룹 신정수 회장의 차녀입니다.”

태범은 눈을 흉흉하게 빛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인아 쪽 자금줄 틀어막고 인아에 투자하는 기업은 앞으로 IPO 투자 선상에서 제외 해.”

“알겠습니다.”

“지금 김상철은 어디에 있지?”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김상철의 소재에 태범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 빌어먹을 창고에 갇힌 유원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태범은 잠든 유원의 작은 손을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유원이가 그 영상을 봤다. 그리고 그 일을 전부 알게 되어버렸다.

용서해달라는 말도 차마 하지 못하고, 잘못했다고만 반복하는 유원의 말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이래서 유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었다. 서로에게 상처만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거리를 둔 것이었다. 그게 유원에게 이렇게 큰 상처가 된 줄 몰랐지만.

태범은 유원의 고백 이후 마음 한구석에 유원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그냥 동생으로만 생각하던 그였는데 어째서 이렇게 유원의 일 하나하나에 자신이 신경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유원이 납치됐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유원의 고백을 외면했던 일이 후회스러웠다.

후회… 그 감정을 깨달았을 때, 심경이 복잡했다. 과연 유원과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넘을 수 있을지. 그리고 항상 불안하고 위험한 제 옆에 유원을 둬도 괜찮을지. 저의 욕심이 아닐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태범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유원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유원아, 오늘 기분은 어때?”

“…….”

오랜 먹구름이 걷히듯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반갑지는 않았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외면하고 싶은 기억이 선명해졌으니까.

“유원이, 오늘도 말하기 싫어?”

“…….”

맞은편에 앉은 윤설아 선생님이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슬퍼하시는 거지? 작은 의문이 들었다. 우리 엄마아빠는 나쁜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 사람인데 내가 그런 걱정을 받아도 되는 건가?

“말하기 힘들면 이 앞에 있는 인형을 들어볼래? 왼쪽 인형을 들면 그렇다, 오른쪽 인형을 들면 아니다.”

선생님은 내 앞에 작은 인형 두 개를 놓아주었다.

“이것도 하기 싫어?”

그냥 인형을 드는 것도,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전부 귀찮았다. 얼른 다시 눕고 싶은데…. 대답도 없이 창밖만 바라보자 선생님은 더 권하지 않고 차트에 이것저것을 적기 시작했다.

결국 제대로 된 상담을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상담 치료는 끝이 났다. 터덜터덜 병실로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이불 안에 숨어 몸을 꽁꽁 가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봄이 다가온 건지 나뭇가지 끝에 피어난 새싹이 푸릇했다.

“유원이, 니 오늘도 아무것도 안 먹었누?”

등 뒤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게에 가시기 전에 들렸는지 아직 창밖의 해가 하늘 높게 떠 있었다. 뒤에서 무어라 말하는 할머니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눈을 감았다.

“니 진짜 굶어 죽을 기가? 어? 니 몸을 봐라! 삐쩍 말라가지고 나무꼬치 만키로!”

귀에 들어온 ‘죽는다’는 단어에 눈이 떠졌다. 죽는다… 죽을 수도 있구나. 죽는 것도 방법이구나.

할머니의 말에 해답을 찾은 것처럼 모처럼 정신이 번쩍 뜨였다. 할머니껜 죄송하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바꾸기 위해, 나의 행복과 가족의 평화를 위해 버텼다.

하지만 그 일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겁쟁이라고 해도… 아니, 자신은 겁쟁이가 맞았다. 그렇지만 그냥 지금 이 지옥 같은 삶을 그만하고 싶을 뿐이다.

충동적으로 들었던 생각이 점차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아무도 몰래 먹지 않은 약이 꽤 많았다. 그걸 잔뜩 모아 선반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만큼 무수한 날이 흘렀다. 새싹이 푸릇하게 돋아났던 나뭇가지엔 그 결실이 맺혔고 팝콘 같은 벚꽃잎이 꽃비처럼 흩날렸다.

“유원아-”

창밖에서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곤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예쁜 선생님. 똑똑한 선생님. 착한 선생님. 형 옆엔 선생님같이 좋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은 싫어. 형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게 너무 싫어.

선생님을 향해 힘없이 손을 흔들다 갑자기 속이 울컥해졌다.

그 모든 것을 알았으면서. 우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를 다 알았으면서 여전히 이기적인 내가 너무 싫었다.

서둘러 커튼을 치고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분명 형 옆엔 선생님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 가슴이 너무 아팠다. 머릿속으로 형 옆에 있을 다른 이를 떠올리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자. 따끔한 심장 부근을 꾹꾹 누르고 눈물로 젖은 눈가에 팔을 올려두었다.

***

“……할머니.”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서 그런가.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쇳소리가 났다. 하지만 처음보단 많이 나아진 상황에 할머니의 표정은 어둡지만은 않았다.

“저 이제 퇴원하고 싶어요.”

“……유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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