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읏.”
눈가로 흘러내리는 피에 손을 들려 하자 팔이 뒤로 묶여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팔을 비틀고 아무리 힘을 줘도 단단하게 묶인 팔은 그대로였다.
“하아… 흡.”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비릿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눈앞이 아찔했지만 벽에 기대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야….”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살 것 같이 보이진 않았다. 장판도 없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쓰레기는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한쪽에는 주사기와 약병이 무더기였다.
누가 아픈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창문 밖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이때다 싶은 마음에 크게 소리쳤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여기 사람 있어요! 도와주세요!”
그러자 운동화를 신은 발이 멈칫했고 나는 있는 힘껏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요! 여기 사람이 갇혀있어- 아!”
갑자기 머리가 확 젖혀졌다. 언제 왔는지 탁한 눈을 한 김상철이 내 머리를 움켜쥐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미간을 찌푸리자 김상철이 비틀린 입매로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일어났어? 일어났으면 말해야지. 나 많이 기다렸는데.”
“…하지-”
“이리 와, 차유원.”
김상철의 손이 점점 가까워졌다. 한없이 다가오는 손에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빌었지만 역시 신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최악의 상황이 나를 향해 불쑥 다가왔다.
“이제 그만해.”
약에 잔뜩 취해 널브러져 있는 김상철을 향해 말했다. 벌써 며칠째 나를 가둬두고 감시하듯 바라보는 시선에 차라리 죽고 싶어졌다.
“왜애… 더 보여, 줄, 큭큭, 아, 웃겨.”
“하지, 흑…. 하지 말라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김상철은 담배를 쭉 빨더니 영상을 재생시켰다. 내가 울부짖고 발버둥을 쳐도 김상철은 그저 비정상적인 웃음소리만 터뜨렸다.
그가 내 머리를 억지로 화면을 향해 고정해 놓고 영상을 보게 만들었다.
[오늘 오전 10시 태호 그룹, 권태철 회장의 부인, 이현정 씨가 서울 백병원에서 숨졌습니다. 경찰은 반대편에서 중앙선을 넘은 차량과 추돌하여 이 씨의 차량이 전복된 것으로 보고 자세한 경위를 파악할 예정입니다. 현장에서 구조된 이 씨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결국 사망했습니다. 빈소는 서울 백병원이며 발인은 22일 오전 7시…]
“그만… 그만 해… 제발….”
손발이 묶여있어 귀를 막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파고드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외면할 뿐이었다.
김상철에게 납치되고 사흘 내내 같은 영상이 수없이도 반복 재생되었다.
12년 전, 건너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졸음운전 차량에 치여 사고를 당한 피해자의 장례식에서 앳된 얼굴의 권태범이 상복을 입고 있는 영상이었다. 저 사고의 원인이, 권태범이 어머니를 잃은 이유가 다름 아닌 우리 부모님이라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이제 알겠어? 끄윽, 큭, 너랑 그 새끼가 안 되는 이유를?”
“알아… 안다고! 그니까, 흐윽… 이제 그만해….”
권태범은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어서 나를 외면한 거였다.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사귀어 달라고… 만나 달라고 붙잡았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흐으… 흑.”
“으… 뭐야, 술이 없잖아. 퉤-”
약에 잔뜩 취한 김상철은 몸을 비틀거리며 술을 더 사기 위해 창고를 빠져나갔다. 여전히 귓가엔 김상철이 보여준 영상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이… 나를… 버린 이유가 이거였어….”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진 것처럼 희망이 모두 사라졌다.
형이 그렇게 나를 밀어낼 때, 내가 더 열심히 살고,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면 형이 나를 조금이라도 봐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형에게 더 이상 매달릴 수 없었다. 나를 원망하고, 우리 부모님을 원망하는 형에게 차마 모습을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나는 애초부터 형에게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형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어.”
그것을 깨닫자 오히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정답을 본 것처럼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느새 내 인생은 형이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형이 없는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살 이유도 없어.”
밖으로 나간 김상철의 감시가 느긋해진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다리엔 커다란 족쇄가 채워져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손은 자유로웠다.
죽으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
유원의 마지막 모습이 잡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부터 퀴퀴한 냄새가 느껴졌다. 정말 이런 곳에 유원이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사람이 살기엔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다.
뚜벅뚜벅. 조용한 복도에 태범의 구둣발 소리가 울렸고 그 뒤로 남자들이 뒤따랐다.
“여기입니다.”
“열어.”
태범이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명령을 받은 남자는 망설임 없이 문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탕- 탕-
두 번의 총격음이 울려 퍼지고 불필요한 행동 없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을 가득 채우던 마리화나 냄새가 더 농밀하게 느껴졌다.
인상을 쓴 태범은 안으로 걸음을 옮겨 유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유원을 마주했을 때, 태범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발견하곤 크게 소리쳤다.
“차유원!”
“오지 마세요, 흑, 오지 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만 안 둬?”
유원은 칼을 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제 손목을 그으려 하고 있었다. 태범이 막으려 했지만 유원이 칼을 제 손목에 더 가까이 가져간 탓에 그는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태범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온 부하들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납치를 당한 유원이 갑자기 이러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보단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태범은 강경한 유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차유원! 일단 진정해.”
“오지 마요… 흐윽, 이제 그만하고 싶어…. 제발 나 좀 내버려 두라고요!”
눈을 질끈 감은 유원이 칼을 꽉 잡은 손을 높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범의 경악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했다. 유원은 서둘러 제 손목을 향해 팔을 크게 휘둘렀다.
“꼬맹이, 말 한 번 더럽게 안 듣지.”
“…하지, 흣.”
하지만 유원의 움직임은 태범에게 가로막혔다. 언제 가까이 왔는지 그가 제 손목을 단단하게 잡고 있었다. 이를 악문 유원이 손을 비틀었지만 태범의 힘을 이기긴 역부족이었다.
“칼 내려놔.”
“놔요.”
“차유원.”
바보같이 여기가 어디라고, 내가 뭐가 걱정된다고 이렇게 찾아오는 거야…. 끝까지 다정한 권태범을 떠올리며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그냥 나 같은 건 신경을 쓰지 말지. 유원은 순간적으로 태범을 크게 밀어내고 칼을 잡은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나 좀, 그냥 나 좀 내버려 둬요!”
그러나 분명 있는 힘껏 태범을 밀어냈는데, 그는 여전히 자신을 감싸 안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순간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잠시 적막이 흐른 후, 태범에게서 흘러나온 신음 소리가 유원의 귓가를 스쳤다.
“윽-”
“…….”
“형님!”
“태범, 형님!”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유원은 그제야 자신을 단단히 잡고 있는 태범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휘두른 칼에 베였는지 태범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명한 색의 피가 유원의 두 눈동자에 박히듯 들어왔다.
유원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너무 놀란 나머지 칼을 떨어뜨렸다. 쨍그랑-하고 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 코끝에 스며드는 비릿한 피 냄새에 정신이 어질해졌다. 이 피가 태범에게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니 손, 발이 벌벌 떨리고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유원은 제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태범의 피로 만들어진 새빨간 웅덩이를 바라보았다. 태범에게 다가와 상태를 확인하는 남자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야, 꼬맹이.”
“어떻, 아… 아….”
목에서 흐른 피가 셔츠를 온통 적시고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고 있음에도 태범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유원을 일으켰다.
유원은 여전히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더욱 몸을 떨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아… 어떡해… 윽.”
“차유원!”
숨을 꺽꺽대던 유원이 순간 크게 휘청거렸다. 태범은 출혈이 심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지는 유원을 잡았다. 그러나 유원은 가물가물한 눈을 하고도 발작하듯 태범을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