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새해를 맞이한 서울의 기온은 기록적인 한파를 맞이했으며 1월 2일로 넘어가는-]
생각 없이 틀어놓은 티브이에서 나오는 일기예보 소리에 태범의 눈빛이 예민하게 번뜩거렸다.
“시발….”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설마 아직도 기다리진 않겠지 싶었지만, 생각보다 고집 있는 유원이기에 마음이 불안했다. 태범은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 유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핸드폰이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
“하… 진짜.”
전화기가 꺼져있는 유원의 핸드폰에 태범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핸들을 꽉 잡은 태범의 손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유원이 집으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있을 유원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태범은 차의 속도를 더 높였다.
끼익-
빠른 속도로 커피숍 앞에 차를 세운 태범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유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짜 말을 더럽게 안 듣는 꼬맹이었다. 그쯤 했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힘을 꽉 준 태범의 손등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솟았다.
“너 바보야?”
“…형?”
지친 얼굴임에도 두 눈을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태범은 울컥하고 속에서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보폭을 늘려 유원에게 다가간 태범은 겨우 코트 하나만 걸친 채 손목과 발목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형. 와, 와줘서 고마워요!”
퍼렇게 질려버린 입술을 달달 떨면서 태범이 와 줬다는 사실에 유원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유원을 바라보며 태범은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얼굴은 왜 이렇게 상했어요?”
“용건만 말해.”
태범은 추위에 붉게 달아오른 유원의 살갗을 외면했다. 유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를 꺼내곤 태범의 손을 잡았다. 태범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유원이 흠칫 몸을 떨더니 “너무 차갑죠, 미안해요.” 하고 작게 사과하며 급히 손을 떼어냈다. 태범은 얼음장 같은 유원의 체온에 다시금 속이 답답해졌다.
“이게 뭐야.”
“어…. 그, 그게 그러니까 형이 어떤 거든 소원 하나 들어주신다고 그때 그러셨잖아요…?”
감기라도 걸린 건지, 붉어진 얼굴로 유원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태범이 대답하지 않자 우물쭈물하던 그가 갑자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형, 저, 이제 그… 성인 됐어요!”
“…….”
“저 형 많이 좋아해요, 사실 그동안 쭉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저랑 만나주면 안 돼요?”
유원은 민망한 얼굴로 뒷머리를 머쓱하게 긁적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소원으로 저, 저랑 사귀어 주시면 안 돼요…?”
“…차유원.”
“네…?”
피곤한 얼굴을 한 태범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그리곤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유원에게 내밀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너도 잘 알지. 집에 가. 다신 찾아오지 말고.”
“이… 이걸 왜 줘요? 저 돈 받으려고 차, 찾아온 거 아닌데요….”
태범은 제 말에 충격으로 물든 눈동자를 마주했다. 눈물을 참는 사람처럼 입술을 꽉 깨물며 파들거리는 입꼬리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태범은 짙은 한숨과 함께 제 머리를 쓸어 올리고 유원을 내려다보았다. 유원은 이게 마지막 만남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자신에게 매달렸다.
“형, 저 처,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자, 장난 아니고 진짜 형을 좋아해요. 그게… 제가 아직 어리고, 그렇긴 한데 하, 한 달이라도…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만나 주면 안 돼요…?”
태범은 점점 눈물이 차올라 얼어버린 볼 아래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유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애달픔이 섞인 간절한 목소리가 태범의 가슴을 울렸다.
모든 것을 쏟아내는 사람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유원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가만히 지켜보던 태범은 제 겉옷을 벗어 유원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 다신 찾아오지 말고.”
“왜, 왜요? 제가 너무 어려서요?”
“너라서.”
“네…?”
상처받은 얼굴이 눈동자에 담기자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그 형체 모를 감정을 태범은 그저 제 어머니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그는 무감정한 얼굴로 유원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너라서 우린 안 돼. 내가… 지금 너 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내 생각하지 마. 앞으로 다신 보지 말자, 차유원.”
“형…! 형, 가, 가지 마요, 제발…. 흐윽, 형… 좋아해요…. 태범이 형!”
태범은 뒤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무시한 채 천천히 걸어갔다. 차마 따라오지 못하고 제 이름만 부르는 유원의 목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손톱이 손에 파고들 정도로 감정을 억눌렀다. 그저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떠올라 아픈 것이다. 그뿐이었다.
***
앞자리가 바뀌고, 성인이 되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김상철 무리가 할머니 가게에 찾아올까 여전히 무서웠고, 형이 보고 싶어 매일 밤 그리움이 사무쳤다.
“할미 잠깐 나갔다 올 테니께, 밥 알아서 챙겨 먹고. 굶지 말고. 알았제?”
밥을 언제 먹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제도 안 먹었었나. 열린 문틈 사이로 할머니의 음식 냄새가 흘러들어왔지만 식욕이 돌지 않았다.
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 집 안이 고요해졌다. 나는 그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겉옷을 챙겨서 나왔다.
거실로 나오니 정갈한 반찬이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할머니의 정성을 알았지만 역시나 속이 좋지 않아 그것을 그대로 지나치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권태범의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
그 뒤로 거의 매일, 혼자 회사 앞에 찾아가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곤 했다. 운이 좋으면, 잠시나마 그를 볼 수 있었으니까.
한번은 그런 생각도 했다. 이왕 오메가로 발현할 거면 우성 오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나를 바라봐주었을까? 이렇게 나를 버리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죽기보다 오메가가 되기 싫었으면서 권태범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이렇게 생각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 형이다.”
오늘도 역시나 권태범은 여러 사람을 거느리며 바쁘게 움직였다. 회사 정문에 세워진 차를 타기까지 겨우 몇 초간 그를 볼 수 있었던 게 전부지만 그래도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도 잘생겼네… 근데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빠진 거야…. 많이 힘든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차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저릿했다. 권태범이 탄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자리를 뜨지 못했던 나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서 저린 허벅지를 두드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순식간이었던 거 같은데 돌아가는 길은 왠지 멀고도 고됐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한참을 터벅터벅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드는 데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아 으슥한 안쪽으로 데려갔다.
“윽, 이거, 아…!”
화들짝 놀라 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치려 했지만 남자의 손에 단단히 막힌 입은 작은 웅얼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으읍, 으, 흐으!”
“아, 이 새끼가!”
틀어막은 손등을 손톱으로 긁어내리자 욕설과 함께 내 얼굴을 놓아주었다.
“김…상철?”
김상철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난 뒤에도 몇 번이나 찾아오긴 했지만, 지난 몇 달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잊고 있던 얼굴이었다.
“네가 왜….”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문신을 한 모습은 여전히 질 나빠 보였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자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은 김상철이 손을 흔들었다.
“잘 있었냐, 오메가? 이젠 진짜 오메가 다됐네.”
오메가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여전했다. 저런 말에 더 이상 감정 소모를 할 기력도 없었다. 내게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은 김상철을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김상철이 내 손목을 확 낚아채곤 을러댔다.
“어딜 도망가.”
“이거 놔.”
“어째 힘이 더 약해진 거 같다?”
김상철은 진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내 살갗을 문질렀다.
“하지, 윽-”
“오, 냄새도 좋아.”
그러면서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까지 했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있는 힘껏 김상철의 머리를 밀어내고 손톱을 세워 그의 숨결이 닿은 피부 위를 세게 긁어냈다. 얇은 살결에 상처가 나서 따끔거렸지만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라 멈출 수 없었다.
“흐으, 으!”
“하지, 시팔, 뭐 하는 짓이야!”
다시금 손톱을 세워 목을 긁어내리자 김상철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내 손을 세게 잡았다.